순례를 마치며
새벽에 일어나서 걷다가 지평선에서 해가 뜨는 장엄한 일출에 신의 숨결을 느꼈다.
부지런한 카페에서 아침 카페콘레체를 마셨고 20km를 넘어선 11시 무렵 만나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거나 전날 준비한 바게트나 과일로 나무 그늘에 앉아서 점심을 때우기도 했다. 재수가 좋으면 마을 어귀나 길에서 노점상을 만나는데 대개는 싱싱한 체리나 복숭아 등을 팔았다. 1, 2유로 동전 한 닢에 양손 그득 담아주는 스페인 촌로의 인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때는 '그라시아스'만으로는 부족한 듯해서 뒤에 '고맙습니다'도 덧붙인다.
공립 알베르게와 사립 알베르게가 있으면 웬만하면 공립에 묵었고 눈이 마주치거나 같은 침상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될 인연과 둘셋씩 짝을 맞춰서 식당에서 순례자 메뉴를 사 먹거나 가끔씩 파스타나 스테이크를 사다가 구워 먹었다. 단순한 일상이었고 그래서 순례다웠다.
걷고 먹고 자고, 그리고 이걸 반복했다.
ㅂ은 어느 날 갑자기 쫓아오지도 않고 한국과 긴 통화를 하더니 마드리드에 다녀오겠다고 바람처럼 떠났다. 떠나기 전 한국에서 마무리되지 않은 송사가 있다고 했었는데 표정이 어두워져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긴 설명 없이 떠나서 과연 돌아올까 했는데 나중에 산티아고가 얼마 남지 않은 갈리시아 땅에서 재회했다. 마드리드에 2, 3일 다녀온 것 말고는 돌아와서 꾸준하게 걸었다고 한다. 다시 만난 ㅂ을 찬찬히 관찰해 보니 그동안 ㅂ은 어엿한 한 명의 순례자로 거듭 나 있었다. 물론 그의 옆에는 여전히 시중을 들어주는 한국 젊은이들이 두세 명 붙어다니긴 했으나 건강하게 얼굴이 그을었고 혼자서 길도 자신 있게 잘 찾아 걸었다. 나와 다시 만났지만 내 도움이 전혀 필요 없어 보였고 굳이 내가 묵는 숙소로 옮겨오지도 않았다.
나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ㅂ에게도 산티아고 순례는 큰 의미와 교훈을 준 듯하다. 사리아 이후부터 같이 걸었지만 굳이 같은 숙소를 구하려 들지 않았고 나도 그를 챙겨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ㅂ은 나와 같은 항공권을 갖고 있어서 그와 나는 어차피 돌아가는 길에 동석을 하게 될 운명이었으나 마드리드를 다녀온 그는 돌아가는 표를 바꿨다면서 산티아고에서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포르투갈에 여행을 하러 간다고 했다. 걸으러 가는 건지 여행을 가는 건지 길게 설명을 하지 않아서 굳이 캐묻지 않았다.
산티아고 도착 후 일정에 이삼일 여유가 있었으나 나는 하루쯤 더 산티아고에서 쉬고 마드리드로 내려왔다. 한식이 너무 먹고 싶어서 한인 민박집에 삼 일간 머무르며 톨레도 관광을 하고 돌아가기로 정한 것이다. 그런데 산티아고에서 예약한 민박집에서 갑작스럽게 예약을 취소한다는 카톡이 왔다. 그것도 마드리드로 가는 렌페 열차 안에서...
나는 산티아고 도착 후 자랑스럽게 대성당 앞에서 찍은 사진을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바꿔놓았는데 그 후에 네이버 검색으로 찾은 마드리드 민박에 예약할 때는 내가 산티아고 순례를 마친 사람이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었다. 굳이 내 행적을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마드리드에서 톨레도 여행을 하고 파리로 이동한다고만 말했을 때는 아무 말 없었는데 그때는 민박집에서 나를 단순 배낭여행자나 관광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민박집 사장은 단호한 어조로 순례를 마친 사람은 투숙객으로 받지 않느냐고 하길래 이유를 물었더니 다른 투숙객에게 빈대를 옮기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모든 순례자가 빈대를 옮기는 것 은 아니지 않으냐고 물었지만 예전에 그런 사례가 있어서 피해가 컸다면서 예약 시 스스로 순례자임을 밝히지 않은 것을 오히려 원망하는 눈치였다. 나는 잠시 후 마드리드에 도착하면 잘 익은 김치에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가슴이 한껏 부풀러 올랐던 터라 너무나 아쉽고 야속했다.
다시 폭풍 검색을 해서 찾은 마드리드 외곽의 한인민박은 내가 순례자임을 밝혀도 순순히 예약을 받아주었다. 심지어 가격대도 좀 전의 민박집보다 몇 유로 저렴했는데 도착해 보니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식 제공이라고 했지만 조식만 제공하는 조건이었고 민박집을 운영하는, 부부로는 보이지 않는 젊은 커플이 늦잠을 자고 늦게 일어나는지 저녁에 미리 만들어 둔 밥과 반찬을 아침에 전자레인지에 데워주는 식의 기운 빠지는 조식이었다. 다음날은 시내의 한국 식당을 찾아다니며 마침내 꿈에 그리던 물김치를 얻어먹을 수 있었고 마드리드가 처음이었던 나는 미술관과 공원을 헤매고 다니며 놀다가 쇼핑을 해서 돌아오고 와인에 취해서 잤다.
한국에 돌아왔다.
아직도 여름은 많이 남아있었고 조교는 일 년 만에 복귀하는 나의 가을학기 강의 시간표를 보내주었다. 집에 돌아온 이후 나는 꼭 필요한 외출이 아니면 은둔하듯 방에만 있었다. 체중은 의외로 5kg쯤 줄었는데 양복바지가 헐거워졌고 신기하게 손목시계가 커져서 팔목에서 마구 돌아갔다. 체중과 체격이 금방 회복되지는 않았다. 걷는 동작을 한국에서 하려니 어색했다. 내 몸의 일부처럼 붙어있던 배낭 없이 외출하거나 걸을 때는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개강은 며칠 남아있었지만 학교엘 가봤다.
오랜만에 차를 운전하여 고속도로에 오르니 잠깐 아찔한 기분이었다. 시속 4-5km로 이동하다가 100km로 달리는 기분은 몹시 비현실적이었다. 학교까지의 거리 50km는 하루를 꼬박 걸어야 도착이 가능한 거리인데 한 시간도 안 걸려서 내 연구실 책상에 앉을 수 있었다. 먼지 쌓인 연구실 책상에 앉아 창 밖을 한참 바라봤다. 녹음이 우거진 산은 스페인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고 높은 데시벨로 울어대는 매미 소리도 스페인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개강을 하고 시간표에 맞추어 나는 수업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 교수들과 인사를 하고 학생들과도 즐겁게 얘기를 나눴다. 내가 800km를 걷고 돌아왔지만 세상은 예전 그대로였다. 나도 예전처럼 표정 짓고 예전에 입던 옷을 입고 바로 그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감사했다.
떠나기 전 그대로 세상은 나를 맞아주었고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 마음속엔 스페인에서 담아 온 파란 하늘과 너른 들판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다시 수업과 연구에 치여 마음이 지쳐갈 때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회의가 답답해질 때면 가슴속에서 스페인 그림들을 한 장씩 떠올렸다.
대충 빨아서 널어 둔 빨래에서 물 뚝뚝 떨어뜨리며 말라가는 알베르게 정원 풍경을 떠올렸고, 나무그늘에 기대어 앉아 납작 복숭아 한입 베어 물며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던 스페인 오후를 꺼냈다.
한밤중에 화장실 가려고 나왔다가 문득 쳐다본 하늘에 펼쳐진 은하수와 별똥별은 여러 번 꺼내봐도 지루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비 내리는 날 촉촉해진 들판에서 뒤집어쓴 우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걸었던 이름 모를 마을의 아무도 없던 길, 이른 새벽 입김이 나오는 기온에 소름이 돋아서 들어간 바르에서 막 갈아서 내려주던 따뜻한 카페콘레체와 크루아상 한 조각.
내 가슴속 스페인 풍경 라이브러리는 힘들고 위로가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그림을 보여주며 내가 가진 가장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ㅅㅈ이 결혼을 했고 오랜만에 우리 한국인 순례단은 다시 만났다. 이후로도 몇 차례 ㅂㅇ과 ㅅㅎ를 서울에서 만나 같이 식사를 했고 겨울쯤 ㅅㅎ가 자신의 집에서 보자고 해서 같이 걷던 많은 청년들이 모여서 파트럭 파티를 했다 청담동 ㅂ도 오고 스키폴 공항의 착한 건축설계사 ㅅㅁ이 빵을 구워왔다. 그 사이 간호사 ㄱㅎ도 결혼을 해서 예식장에서 반갑게 인사하고 잘생긴 남편 얼굴도 봤다. ㅇㅇ은 학교에 복학을 했고 안경사였던 ㅈㅂ은 보험사 영업직으로 직장을 옮겼다. 미술선생 ㅅㅇ은 포천으로 귀농을 했다. 산티아고 이전에 남미를 거쳐 왔던 ㅇㅈ은 희망대로 여행사 직원이 되었고 또 다른 청년 ㅁㅅ은 내가 히말라야 트레킹 가는 걸 알고 자신의 안나푸르나 경험담을 들려주고, 포카라의 맘씨 좋은 한인 민박집을 소개해 주었다.
소록도에서는 자원봉사 소식을 이메일로 보내주었고 내가 봉사자로 있을 때 리더였던 수사 청년은 사제가 되었다.
나에게 첫 순례였던 2013년 산티아고 프랑스길 순례는 이후로 내 삶의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고, 또 내 삶의 패턴이 되어 방학이 되거나 연구년을 맞으면 어김없이 새로운 카미노를 찾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른스럽지 못했던 나는 카미노를 걸으며 반추하고, 반성하고, 성장하고 있다.
활자와 모니터에 묻혀 사는 내 삶에서 스페인 들판과 파란 하늘은 내게 말없이 어깨를 토닥여주는 영혼의 케렌시아가 돼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