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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산티아고의 추억 7

순례 일상

by 이프로

이젠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서 출발하고 싶은 시간에 떠난다.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에는 날씨도 시원하고 사람도 별로 없어서 마음껏 속도를 낼 수 있다.

청년들과 걸을 때는 속도가 느린 사람과 보조를 맞추느라 쾌속보행이 어려웠다.

이제는 상쾌한 시속 5km. 기분 좋을 땐 그 이상도 나온다.

두 시간쯤 걷고 나면 때마침 적당한 카페가 문을 열고 있다.

내 사랑 카페콘레체와 크루아상 또는 달달한 도넛 한 조각의 짧은 휴식 뒤에는 또다시 시속 5km로 걸을 수 있다.


이제 막 해가 뜬 이른 아침 내 그림자를 바라보며 서쪽을 향해 걷는 시간은 스페인 들판이 수줍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매직아우어이다.

적당히 자란 밀밭이 바람에 날려 파도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길가에 무리 지어 핀 선홍색 아마폴라의 춤은 관능적이고 요염하다.

초록빛 들판에 노란 아침 햇살이 물에 떨어진 물감이 퍼지듯 번져가는 모습을 넋을 잃고 보다가 이리저리 사진도 찍어보지만 다 소용없다.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긴다.

어느덧 해가 머리 위로 솟아올라 작렬하고 그늘이 반가워지는 시간이다. 도착지가 멀리 보이니 굳이 서두를 필요 없다. 적당한 나무 그늘이 나오면 비 올 때 뒤집어쓰려고 챙겨 온 판초를 돗자리처럼 깔고 배낭을 베고 누워 하늘을 본다.


파 란 하 늘 !

이러려고 여길 왔구나. 이걸 보려고, 여기에 누워보려고 내가 여길 온 거였구나. 코끝이 찡해진다.


어느 날은 해뜨기 전 여명에 속도를 내며 걷다가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는 독일 청년을 만나 함께 걸었다. 속도가 비슷해서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바로 뒤에 따라오는 여자친구도 준족이다. 자기 신경 쓰지 말고 가라고 손짓한다. 막내 조카뻘이지만 잠깐 대화에 맑고 착한 심성이 엿보인다.

프랑스길에는 순례자들이 흔해서 잠깐 쉬거나 걷는 속도가 비슷하면 친구 사귀기가 좋다. 하루에 길동무가 여럿 생기고 또 여럿과 헤어진다. 만났다 헤어지고 다른 사람과 얘기를 나누다가 오전에 사귄 친구를 다시 만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순례를 이어가다 보면 내가 걷는 반경 30-50km쯤에는 어느 카페, 어느 바르, 어느 알베르게에 들어가도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생전 처음 와보는 마을인데도 아는 사람이 노천카페에 앉아있다가 맥주를 권하고 밥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서는 어제 같은 숙소에서 묵은 이가 빈자리를 권한다. 내가 각자 알고 있는 그들끼리도 서로 친구 사이가 되어 있어서 만나면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인사하고 다른 이의 안부를 묻고 오늘 컨디션이 어떤지 살핀다. 놀랍고 신비한 경험이다.


멀리 내 앞을 걷는 이는 어제 물집으로 고생한 아무개이고 내 뒤로는 왈가닥 캐나다 아줌씨들이 불어로 수다가 한창이다. 내 옆을 쌩하고 지나는 한 무리의 아미고들은 스페인 남부에서 휴가를 이용해서 온 동창들이다. 가끔씩 자전거 순례자들이 엄지를 올려 보이며 우리 곁을 지나치고 더 가끔씩은 말을 탄 순례자들도 지나간다. 반려견과 함께 하는 순례자, 텐트를 갖고 다니며 캠핑을 하는 순레자도 간혹 눈에 띈다. 한국인보다 훨씬 드물게 일본인이 한 둘 있었던 것 같고 중국인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흑인도 거의 못 본 것 같고 슬라브 계열의 동유럽인과 러시안들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순례길의 동양인은 거의 한국인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도 한국인이라고 답하면 늘 우리에게 남쪽인지 북쪽인지 되묻는 걸 보게 되는데 이들에게 한국은 가장 먼저 분단국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나 보다.

이때까지는 강남스타일도 BTS도 봉준호도 아직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기 전이니 그럴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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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하나뿐이니 빨리 걸어서 쉬고 있을 때나 식사를 하고 있을 때 헤어진 우리 청년들을 만나기도 하고 숙소에서 만나기도 한다. 반갑게 인사하고 이젠 같은 순례자로 서로를 대하니 부담이 없다. 다시 만날 때마다 그들이 쑥쑥 성장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역시 스스로 헤쳐나가도록 결별한 것이 서로에게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ㅂ과 나는 ㅅㅈ이라는 청년 하나와 동행했다. 이젠 리딩이 아니라 동행이다.

문창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다가 온 청년인데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틈틈이 여자친구와 나누는 카톡 전화 내용이 들리면 오글거리고 꿀이 떨어지는 게 느껴져서 ㅂ과 나는 마주 보고 웃었다. 좋을 때다.

나도 책을 몇 권 내 본 터라 출판사 생리와 관례들이 궁금하여 ㅅㅈ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걷는데 ㅅㅈ은 그동안 말도 못 하고 참고 있었는지, 한국에서 등산화를 부실한 걸 신고 와서 발에 물집이 심하게 많이 잡혔다. 현금도 부족했는지 ㅂ이 임시변통으로 돈을 꿔주고 한국 계좌로 ㅅㅈ의 부모가 ㅂ에게 입금해 주기로 했다. 새로 등산화를 구입하려고 해도 도시가 나와야 하는데 다음 도시가 마침 부르고스여서 우리는 겸사겸사 에어비앤비로 아파트를 빌려서 하루 더 묵어가며 삼겹살과 쌀밥으로 몸보신을 하기로 했다.


부르고스에 도착한 뒤 ㅂ과 ㅅㅈ은 등산화를 사러 시내 쇼핑몰을 가고 나는 에어비앤비 사장과 만나 체크인을 하고 시장을 봤다. 쇼핑을 마친 그들과 일단 에어비앤비에 짐을 두고 나와 부르고스 대성당 구경을 했는데 우리는 그 화려함과 디테일한 건축 양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당 내부의 박물관도 둘러볼 것이 많아서 나는 시간을 한참 보냈는데 ㅂ은 지루했는지 먼저 밖으로 나와서 혼자 순례를 온 미술선생 출신 아가씨 ㅅㅇ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ㅅㅇ은 우리와 함께 걸은 아가씨들 중에 나이가 많은 축이었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해서 우리에게 가톨릭 예절이나 미사에 관해 알려주었다.


어둑해질 무렵 숙소로 돌아와 삼겹살 요리를 시작했다. ㅂ과 나는 아직 한국에서 가져온 튜브 고추장이 많이 남아있을 때라 싱싱한 유럽 상추에 이베리코 삼겹살을 구워서 함께 먹으니 꿀맛이었다. 숙소는 대성당 바로 옆이어서 밤이 되니 근사한 야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두둑해진 배를 두드리다가 우리는 밖에 나가서 산책도 하고 부르고스 중심가 바르에 들러 한잔 더 마시고 들어오기로 했다. 청년들과 단체로 걷다가 이렇게 두세 명 소그룹으로 걸으니 참 좋았다. 걸을 때는 각자의 속도대로 걷다가 먼저 걷던 내가 적당한 바르나 카페가 나오면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해두면 ㅂ과 ㅅㅈ이 도착해서 같이 휴식을 취했다. 스페인은 이제 6월인데 한낮에는 꽤 뜨겁게 태양이 달아올라 우리는 웬만하면 시에스타 전에 그날 일정을 마쳤고 대부분 하루에 30km를 넘게 걷지 않았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이제 모두 걷기와 스페인 날씨, 순례 일정에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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