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별 선언
산에서건 길에서건 나는 업힐 uphill, 즉 오르막에 강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르막길이 나오면 시작도 하기 전에 힘들어하고 속도가 떨어지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평지를 걸을 때와 별 어려움 없이, 어떨 때는 오히려 평지나 내리막보다도 더 속도를 낼 수가 있는데, 이때 속도가 쳐지는 앞사람들을 단숨에 앞지르게 된다.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어나는 내 뒤의 한국인 순례자들을 감당하기가 버거웠고 이들이 나를 대장님으로 부르는 것도 탐탁지 않았다. 나는 봉사하러 카미노에 온 것이 아니었다. 길눈도 어둡고 언어도 서툰 한국인들을 돕는 건 능력이 된다면 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얼마나 이 날만을 기다려왔는데, 나의 소중한 카미노를 골목대장 노릇하며 한 달여를 걷게 된 작금의 상황이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나는 둘째 날 출발에서는 모든 사람이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ㅂ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쌩하고 먼저 길을 나섰다. ㅈㅂ은 황급히 쫓아오며 '대장님, 아직 인원들 다 나오지 않았는데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화살표보고 천천히 따라오세요.' 하고 먼저 길을 나섰다. 나와 함께 서울에서 체력을 기른 ㅂ도 내가 평소보다 속도를 올리자 힘겹게 따라왔다.
'왜 이렇게 빨리 가?'
나는 아침 해뜨기 전 풍경이 좋으니 뭉기적거리지 말고 빨리 오라고 재촉하며 바람처럼 날리듯 빠르게 걸었다. 카페가 나왔다. ㅂ이 '커피 한잔 안 하고 가?'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지만 나는 다음 마을에서 쉬자고 손짓을 했다. 이제 우리 뒤에는 한국인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더 쉬지 않고 속도를 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걷다 보니 어느새 도로가 나오고 시내가 나왔다.
팜플로나였다. 한국 청년들이 먼발치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떨어졌다고 생각되자 그제야 카페에 앉았다.
'왜 이렇게 한국인들을 모으세요? 이렇게 무리 지어 다니면 모두 불편하기만 해요.'
나는 ㅂ에게 일행이 많아지면 불편한 게 더 많아진다고 하자
'길을 모른다고 도와달라잖아. 같이 가면 좋지 뭘.' 하며 맘씨 좋고 너그러운 어른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ㅂ이 왜 한국 청년들을 모으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지 않았다.
50대 후반에 접어든 ㅂ은 당연히 우리 중 최고령이었는데 '대장님'인 나의 최측근인 그는 청년들이 보기에 대장과 동격이거나 혹은 상급자여서 청년들은 어디를 가든 그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했고 빨래를 돌리거나, 널고 개키는 일, 쎄요를 찍으려 할 때 배낭에 넣어 둔 크레덴셜을 갖고 내려오는 일 등 성가신 일을 대신 해주었고, 간단한 간식이나 음료를 먹을 때는 그가 늘 최우선순위였다. 이층침대에서는 당연히 아래층 코너 자리가 그의 자리였고 식당에서건 카페에서건 그는 화장실을 가장 먼저 갈 수 있었다.
물론 그가 거저로 이런 대접을 받는 건 아니고 그는 틈틈이 청년들에게 커피와 간식 값을 대신 치러주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순례에 나는 길잡이로, 다른 청년들은 그의 어시스턴트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차근차근 ㅂ에게 이번 순례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나는 결코 이런 한국인 순례단의 대장을 원하지 않았음을 설명했다. ㅂ은 자기도 이렇게 많이 불어날지는 몰랐다고 이제는 더 안 받겠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이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고 이제부터 나는 내 속도로 갈 것이고 뒤처지는 사람은 내가 책임질 수 없다고 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ㅂ이 물었다.
'그래도 나는 데리고 갈 거지?'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속도를 냈다. 빰쁠로나 공립 알베르게가 나오기 전 여러 사립 알베르게가 나오고 그중에는 한글로 알베르게 영업을 알리는 곳도 있어서 뒤에 처진 청년들이 천천히 걸어오다가 이들 알베르게 중한 곳에 묵을 거라고 생각하고 ㅂ과 나는 빰쁠로나 도심 외곽의 눈에 잘 안 띄는 사설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했다. 이제는 한국 청년들과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후련했다. 우리는 각자 씻고 빨래하고 옷을 갈아입고 시에스타 시간이 지난 것 같아서 느긋하게 시내로 나가서 유심도 구입하고 바르에서 맥주 한잔하고 오기로 했다.
며칠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청년들과 움직이면 기동성이란 생각할 수 없었다. 커피를 한잔 마시려면 나는 모두에게 음료 메뉴와 함께 먹을 수 있는 빵과 간식을 설명해 주고 각자 원하는 것을 대신 주문해 주는데 개성 강한 이들은 항상 다른 메뉴와 색다른 간식을 원했다. 당연하지, 첫 유럽인데 모든 게 신기하고 재밌을 것이었을게다. 그러면 난 각자에게 조금씩 다른 금액을 알려주고 거스름돈을 확인해 주고 내 자리에 앉으면 언제나 내 커피는 다 식어있었다. 사실 대강 알려주고 알아서 시켜 먹으라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지만 간단한 걸 몰라서 쩔쩔매거나 엉뚱한 대답을 하는 바람에 알지도 못하는 음식을 주문하는 걸 보고 있을 수만 없었다. 그렇게 한둘을 도와주다 보니 식사 때도 크게 상황은 다르지 않아서 내 식사를 제대로 하기가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었다. 그들은 한 명이 찾아와 궁금한 걸 물어보는 것이지만 나는 10여 명을 상대해야 했다.
식사 시간이 지나서 바르에 있는 메뉴밖에 안 된다고 하면 언제든지 식사가 가능한 대한민국에서 온 청년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왜 식사 메뉴가 안되는지 설명하고 나면, 왜 스페인 사람들이 한가롭게 낮잠 자는 것 때문에 자기가 배를 곯고 기다려야 하는지, 왜 저녁 식사는 그렇게 다 늦은 시간에 시작해야만 하는지 그들은 나에게 묻고 나에게 불평했다.
그러게 궁금하고 이상한 것들은 한국에서 공부를 하고 왔어야지 이것들아!
보다폰 매장에서 내 전화기에 유심을 먼저 구입해 설치한 후 ㅂ의 전화기에 유심을 설치할 동안 나는 유심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보려고 매장 밖에 나와서 아내에게 카톡 전화를 해보았다. 신호가 가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서 간호사 출신 ㅅㄱ이 지치고 힘든 기색으로 걷다가 나를 발견했다. 재빨리 외면하고 싶었지만 이미 ㅅㄱ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나를 불렀다.
"대장님!"
유심 설치가 끝난 ㅂ이 매장에서 나오면서 ㅅㄱ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정말 울고 싶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ㅅㄱ의 뒤로 우리 청년들이 줄줄이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인근에 있던 우체국에서 우선 파리 기념품으로 배낭이 무겁던 청년의 불필요한 짐들을 산티아고 우체국으로 한 달 보관일정으로 부쳤다. 한 명이 부치니 여기저기서 배낭을 풀더니 이거도요, 저것도요 하며 배송을 부탁했다. 나는 묵묵히 그들의 기념품과 순례에 불필요한 물건들을 산티아고 우체국으로 부치고 나중에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우체국 직원도 영어가 서툴러서 역시 우편물을 부치러 우체국에 온 고등학교 학생이 우체국 직원의 말을 영어로 통역해 주었다. 청년들은 앞서 내뺀 나를 보고 배신감과 의아함을 보이더니 다시 그들의 짐을 고이고이 챙겨서 산티아고로 부쳐주는 모습에 다시 어제의 대장님으로 나를 대했다. 나를 찾느라 쉬지도 못하고 걸었다는 이들은 땀이 절어서 옷에는 허옇게 소금기가 배어 나올 정도이고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다고 했다. 다시 이들을 데리고 우리가 묵는 알베르게로 데리고 가서 체크인 수속을 해주고 그들이 씻고 빨래를 할 동안 ㅂ과 나는 중국인 마트에서 시장을 봐다가 계란 넣은 신라면을 푸짐하게 끓여주었다.
굶주리고 근심하며 걸어온 이들은 식사하는 동안 별로 말이 없었다. 나는 이들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겨서 내가 설거지까지 다 했다. 그리고 이들을 알베르게 입구 공터에 모두 모이게 했다. 내가 입을 떼려 할 때 막내인 ㅇㅇ이가 먼저 내게 물었다.
"대장님, 왜 그러셨어요!" 원망과 설움이 가득 찬 목소리로 ㅇㅇ이는 실제로 툭 치기만 하면 울음이 터질 기세였다.
이들과 나는 긴 시간 얘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그제야 이 청년들 중 일부는 내가 한국에서부터 이들을 데리고 온 인솔자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식사와 출발을 챙기고 길 안내를 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것이었다. 나에 대한 말이 돌고 돌아서 결국 나는 순례팀 인솔자로까지 오해를 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나에게 당연한 듯 요구했고, 묻고, 따졌던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떻게 여기를 오게 되었는지, 나에게 이번 순례가 어떤 의미이고 얼마나 소중한지, 내가 이 순례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준비했고 큰 기대가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소중한 순례를 계획했던 대로 진행하고 싶으며 그래서 앞으로 여러분과 동행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이해시켰다. 덧붙여서 산티아고 순례는 누구에게 의지하고 부탁하는 것보다 자기 힘으로 길을 찾아 걷고 문제를 해결하며 걸어야 제대로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경험이 될 것이며 그래야 마침내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 뿌듯한 자부심과 성취감이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나는 이들에게 gps 맵 사용법과 유심을 구입해서 설치하는 것을 알려주었고 하루 걷기를 마친 후에는 인터넷 산티아고 카페에 접속해서 내일 걸을 길에 대한 관련 정보를 알아보고 잠자리에 들것을 권했다.
모두들 내 설명을 이해하고 내가 홀로 걷고 싶어 하는 이유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엄숙했고 무거웠다. ㅂ은 먼저 자리를 뜨고 나도 아직 gps를 이해 못 하는 몇 명에게 시범을 보이고는 내 자리로 가서 쉬었다. 표정이 어두워진 청년들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계속 그들과 함께 행동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소등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ㄱㅎ와 ㅂㅇ이 내 자리로 찾아왔다.
"대장님 그동안 고마왔습니다."
두 사람은 내게 따끈하게 삶은 계란 몇 개와 체리를 갖고 왔다. 내 사정을 이해한다고 그동안 피곤했겠다며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가시라며 자기들끼리도 얘기를 나누고 각자 알아서 걷기로 했다고 알렸다.
옆에서 듣던 ㅂ이 거들었다.
'그래, 카미노는 원래 혼자 걷는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