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산티아고의 추억 5

한국인 순례단

by 이프로

모처럼 숙면을 취했다. 날씨도 어제보단 쬐끔 나아져서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로 향하는 피레네 산의 능선에서는 운무가 바람에 날려서 힐끗힐끗 보였다 가렸다 하는 초록빛 신록이 운치 있었다. 어제는 우연처럼 한국 순례자들을 길에서 만나 동행을 하고 같이 식사를 했지만 오늘은 출발부터 다 같이 모여서 함께 출발했다. 다들 길을 몰라서 내가 앞장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나는 다른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산티아고 순례가 초행길이었지만 예전의 스페인 여행 경험을 통해 인사나 숫자, 간단한 주문 같은 쉬운 스페인어를 몇 마디 한다는 것과 한국에서 받아온 gps 맵을 활용한다는 점이 달랐을 뿐인데 모두들 별 준비 없이 그냥 배낭 메고 물어물어 이곳까지 온 처지여서 나를 대단하게 여기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여러 차례 읽은 다른 순례자들의 후기와 하도 여러 번 들여다봐서 외우다시피 한 프랑스길 지도와 지명들이 익숙해서 내가 앞으로 갈 길과 경로를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일행들은 그 점에서도 나와 큰 차이를 보였다. 걷다가 물을 마시거나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할 때 일행들은 앞으로 남은 거리나 소요 시간 등을 물었는데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나는 이런저런 아는 체를 하게 되었고, 또 어제 나머지 한국인들의 숙소와 저녁 문제를 내가 해결한 것처럼 와전돼서 일행들은 이제 선무당 같은 내 얕은 카미노 상식을 야고보 성인의 계시라도 되는 양 신뢰하게 된 것이다.


하루 만에 넘었어야 할 피레네 산맥을 이틀 동안 넘으니 오히려 누적된 피로도 풀리고 경치도 감상하는 여유가 있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오늘은 산길이 뚫려서인지 생장에서 곧바로 론세스바예스로 넘어온 순례자들이 많았다. 여러 자원봉사자들이 자리 배정과 세탁물을 받아서 대신 빨래를 해주었다.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봉사자들이어서 내가 한국인들의 자리 배정과 세탁을 모아서 함께 하도록 했고 순례자 여권에 쎄요를 찍는 것도 모르는 친구들이 있어서 알려주었다. 모두들 옷을 갈아입고 샤워도 하고 한시름 돌렸다. 당시 우리 중 누구도 유심을 아직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한국을 떠난 지는 며칠이 됐으니 모두들 가족과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졌다.


나는 이리저리 숙소 근처의 와이파이 신호를 찾다가 알베르게 맞은편 호텔에 비밀번호가 없는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로비에는 편안한 소파까지 구비되어 있으니 아주 훌륭했다. 오래간만에 카톡으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사진도 보내주고 동료들과 친구들에게도 스페인 피레네의 아름다운 정경을 보여주었다. 내가 이메일을 확인하고 지인들과 이런저런 소식을 주고받고 있을 때 한국인 순례자들은 내가 보이지 않자 모두들 흩어져서 나를 찾으러 다녔다. 서로 간에 아무런 통신수단이 없는 이 당시에는 모든 소식을 걸어서 직접 전달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는데 나는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라 홀로 이들을 떠나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ㅂ이 나를 찾아서 내가 하는 모습을 보고 내 옆에 앉아서 카톡을 시작했고 호텔 로비에 들어오기를 주저하던 다른 우리 일행들도 내 모습이 보이자 하나둘씩 로비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카톡 삼매경에 빠졌다. 잠깐 사이에 로비는 한국인 순례자로 꽉 찼고 모두들 공짜 와이파이를 이용해 지인들과 연락을 하느라 난데없는 '까톡'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터졌다.


프런트 직원이 우리 청년 누군가에게 와이파이 사용을 제지하는 안내를 했는데 그는 알아듣지 못하고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계속 카톡을 했다. 직원은 스페인어로 말하다가 안 되니까 영어로 말했는데 알아듣지 못하고 예스, 오케이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 휴대폰만 들여다보니 이번에는 직원의 상사인 듯한 사람이 내게로 왔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는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이 빨개져서 급히 일어나 사과를 했다. 한국인들을 모두 나가게 한 뒤 스페인이 처음이고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한 상태여서 그랬다고 미안하다고 재차 사과를 했다. 상사는 너그럽게 웃으며 다른 시간엔 괜찮은데 지금은 체크인, 체크아웃 손님들이 많이 오는 시간이니 로비를 다 차지하고 있으면 곤란하다고 했다. 호의적으로 설명을 해주니 더 창피했다. 답을 알면서도 계면쩍어서 괜히 유심 카드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주변에 없냐고 뜬금없는 질문을 하다가 호텔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ㅂ이 한국인들과 투덜거리고 있었다.

'어차피 열어 논 와이파이 좀 쓴다고 내쫓을 건 뭐야, 치사하다, 스페인 놈들!'

저녁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어서 각자 산책도 하고 쉬면서 산티아고까지 가는 큰 관문을 하나 무사히 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오늘 생장에서 곧바로 온 한국인들도 여럿 있었는데 어제 하루 발카를로스에 묵으면서 알베르게와 스페인 식당과 음식을 접해 본 우리 일행들은 하루 후배들에게 알베르게 상식 등 아낌없는 지도편달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초보 순례자들을 보고 슬며시 웃었다.


저녁 식사는 순례자들이 레스토랑에 합석하여 먹는 식이었다. 우리는 모두 8인석 한 테이블에 앉기를 원했는데 앞의 외국인 순례자들이 앉고 남은 자리가 네 자리가 있어서 떨어져 앉게 되었다. ㅂ은 내 옆에 찰싹 붙어 있었는데 나는 같이 합석한 프랑스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들은 서툴지만 영어가 가능했고 이후로도 계속 만나게 돼서 친구가 되었다. 이들 중 한 명은 신기하게도 한센병과 비슷한 흔적이 한쪽 손에 있었는데 손가락 몇 개가 몽당 손이었던 것이다. ㅂ은 내게 손가락으로 그의 손을 가리키며 내게 '여기도 한센병이네' 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나는 재빨리 ㅂ의 손가락을 거두게 하고 입조심을 하라고 했다.

이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것을 봤는데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와인을 따라주며 분위기를 바꾸었다.

돼지고기 스테이크와 감자튀김, 샐러드가 나오는 석식 순례자 메뉴였는데 와인은 2인당 한 병씩이 나왔다. ㅂ과 나는 나머지 동석한 외국인들과 건배를 하고 식사를 했는데 ㅂ이 나와 함께 마시던 와인을 내 쪽으로 옮기더니 프랑스인들이 마시던 와인 병을 들어 나와 자기 잔에 채웠다. 내가 쳐다보자 '우리 건 아껴야지.' 하고 눈을 찡끗했다.


나는 한국말로 ㅂ에게 낮게 말했다.

'선생님, 외국인도 한센병이라고 말하면 알아들을지도 몰라요. 그건 한국어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렇게 손가락으로 면전에서 가리키시면 어떡해요?'

ㅂ은 '그런가'하면서 또 프랑스인 와인병을 들어 우리 잔을 채웠다. 나는 다시 한번 눈짓으로 ㅂ에게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내쪽에 있는 와인병을 들어 프랑스인들에게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거 우리가 더 먹으려고 챙겨놓은 건데...'

ㅂ은 내가 와인을 돌려주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는데 다른 테이블에 있던 한국인 청년들이 자기들은 넷이서 한 병이면 충분하다며 온전한 한 병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날이 되었다.

이제 전형적인 스페인 날씨였다.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청명한 아침 공기.

모두들 산티아고 790km라고 쓰인 이정표에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어젯밤에 만난 독일인 개신교 신자들 일행과 출발 전에 예배를 드렸다. 길에서 만나는 교회는 모조리 가톨릭 성당이었고 미사를 드리는 건 개신교 신자인 나에게 맞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독일인들이 출발 전 개신교식 예배가 있으니 관심 있으면 오라고 한 것이다. 그들은 독일어로 나는 한국어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우고 그들은 독일어로 나는 한국어로 같은 찬송가를 불렀다. 그들의 기도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앞으로 남은 순례 일정 동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안전하고 즐거운 순례를 이어갈 수 있도록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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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먼저 가라고 했는데도 한국인 순례자들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출발을 하려니까 군 전역 후 취업준비 중이라던 청년 ㅈㅂ이 내게 와서 인원 보고를 했다. 남자 네 명과 여자 일곱 명에 나까지 포함해서 모두 12명 출발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제 길에서 만난 미국 교수 일행은 이미 떠났고 남은 어제 인원에 어제부터 우리 그룹에 합류한 인원들이 있었다. 어제 식사 후에 나에게 와서 조심스럽게 같이 걸어도 되겠냐고 묻던 아가씨들이었다. 내 길도 아닌 남의 나라 땅인데 내가 허락하고 말 것도 없어서 그러자고 했더니 한두 명을 더 데리고 온 것이다. 내 옆에는 ㅂ이 붙어있었고 그 뒤로는 열 명의 한국인 청년들이 띠를 이루어 3일 차 산티아고 순례를 시작했다. 에스피날쯤에서 문 열린 카페가 나오길래 커피와 아침을 먹기 위해 멈췄다. 조그만 카페는 갑자기 들이닥친 12명의 한국인들로 곧 시끌벅적해졌고 다시 한번 ㅈㅂ이 내게 와서 20유로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저희는 모두 아이스 아메리카노이고 한 명만 코코아를 먹겠답니다.'

그러니 나에게 주문을 해달라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나와 ㅂ이 마실 커피 주문을 하려고 일어서던 차여서 그들의 주문도 함께 했다. 그런데 카페콘레체의 맛을 알게 된 나는 그들에게 카페콘레체를 설명해주어야 했다. 카페 주인은 우리 청년들이 원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카페올레와 비슷한 우유 탄 커피이고 얼음은 없어서 따뜻하게 마셔야 한다. 그리고 ㅂ과 나는 크루아상과 함께 먹을 건데 빵은 생각 없냐?'

청년들은 모두 카페콘레체와 크루아상을 원했다. 나는 다시 주인에게 돌아와 카페콘레체 12잔과 크루아상 12개를 주문했다. 계산이 복잡해서 내가 계산하고 20유로를 돌려주었다. 커피 한잔과 빵 한 조각을 먹으려고 했을 뿐인데 12명이 한꺼번에 주문하고 받으려 하니 시간이 배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순례객들은 덩달아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아침 출발부터 내 뒤를 따르는 11명은 내가 움직이는대로만 따라서 움직였다.

내가 물을 마시면 따라 마셨고 내가 쉬면 같이 쉬고 내가 화장실을 가려고 잠깐 카페에 들르면 모두들 내가 들어간 카페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화장실을 이용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알아봤더니 내가 독일인들과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이에 ㅂ이 한국인 청년들에게 내 얘기를 했다고 한다.

'산티아고 가려고 휴직을 한 교수인데 순례길 코스를 알아보느라 몇 년을 공부하고 산도 잘 타며 스페인어와 영어에 능통한 카미노 고수이며 자신과는 소록도에서 봉사하다가 만났다'라고 정확하지도 않고 엄청 부풀리기만 한 소식에 해외여행과 유럽이 처음인 청년들은 나에게는 묻지도 않고 나를 자기들의 순례길 대장으로 정해버린 것이다. 이들 중 ㅈㅂ은 ㅂ의 임명으로 총무 겸 소대장 역할을 맡았고 나와 나머지 청년들의 소식을 중계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나는 이런 사실도 모른 채 휴식 시간에 유난히 걸음이 느리고 힘들어하는 여성 한 명의 배낭을 들어보았다. 헐, 몸집도 작고 여린 여성이 짊어지기엔 너무 배낭이 무거웠다. 내가 무슨 짐이 이렇게 많냐고 했더니 원래는 많지 않았는데 순례를 시작하기 전에 파리 여행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산 여행 기념품이 배낭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수비리 가기 전 언덕길에서 너무 뒤로 처지길래 나와 배낭을 바꿔서 맸다.

내가 메고 걷기에도 버거운 걸 보니 10킬로는 훨씬 더 나가는 것 같았다. 수비리 알베르게에 도착한 뒤 각자 정비를 한 뒤 내가 다시 그 여성을 불러서 그 짐들을 다 들고 순례를 이어가는 건 무리라고 짐을 버리거나 한국으로 부치는 게 좋겠다고 충고를 했다. 그 여성이 갖고 있던 짐을 들고 나와 알베르게 로비에서 풀어 보였는데 가관이었다. 금속으로 된 에펠탑 모형이 서너 개 되는데 포장이 커서 부피를 크게 차지했다. 그것 외에도 에펠탑 스노볼과 키체인, 노트르담 마그넷, 파리 기념 티셔츠 등 기념품이 적지 않았다.

호스피탈레로는 우리 모습만 보고도 우리가 짐 때문에 걱정이라는 걸 알고 산티아고로 짐을 부칠 수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나 역시 한국으로 짐을 부치는 건 비용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산티아고로 부치는 건 괜찮아 보였다. 내일 도착하는 빰쁠로나에 우체국이 있으니 하루만 더 고생하면 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우체국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고 와이파이 없이도 찾을 수 있도록 구글 오프라인 지도로 저장해 두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청년 몇 명이 더 나를 찾아왔다. 우리 일행을 그동안 멀찌감치 떨어져서 지켜보며 따라오던 이들인데 영어를 못하고 여행도 너무 힘들다고 자기들도 우리와 합류하고 싶다는 것이다. ㅂ은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괜찮아, 내일 아침에 우리 출발할 때 같이 따라와!' 하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청년들은 기뻐하며 돌아갔지만 나는 자꾸만 늘어가는 한국인 인원들이 슬슬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청년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도 어느새 '대장님'으로 바뀌었고 ㅈㅂ은 식사나 휴식 시간마다 나에게 인원보고를 했다.


헷갈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내 안식년을 순례길 800킬로미터를 걸으며 조용히 돌아보고 앞으로의 내 연구와 학교 생활, 신앙생활을 계획해 보는 시간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내 순례는 어느새 20년 전 강원도 양구군에서 보냈던 군 생활과 비슷하게 바뀌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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