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남자는 자동차에서 관심이 자유로워지는 걸까?
평소 출퇴근 시 자전거와 전철을 이용하며 남이 운전해 주는 이동수단에서의 자유로움과 편의에 만족해하고 있었는데 그러다가도 급한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자동차를 운전해서 출근하기도 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 것과 없어서 사용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였다.
아내가 자동차가 필요해지면서 대부분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자동차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동차가 필요한 일들이 밀려왔다. 날씨까지 갑자기 추워져서 집 근처 간단한 볼거리는 자전거를 이용하던 것들이 불가능해지고 버스를 타자니 귀찮고 싫었다.
자동차가 한 대 더 있어야겠네.
탄식처럼 아쉬움을 토로하자 웬일인지 아내와 아이들이 이번엔 호응을 해준다. 일 년쯤 전에 내가 렉서스 하이브리드에 꽂혀서 대출을 받아서 차를 뽑겠다고 하자 모두가 쌍수를 들고 반대했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이다. 차종을 바꿔서 그런가? 이번에는 테슬라를 사겠다고 한 것이다.
가족들은 동의했지만 이번엔 테슬라가 문제였다.
차가 없다고 한다.
3-6개월을 기다려야 차를 받아볼 수 있고 내년에 보조금이 얼마나 나올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올해보다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나마 덜 기다리고 싶으면 빨리 주문을 해야 된다고 해서 계약금 300만 원을 결재하고 시승도 신청했다.
하지만, 자동차 주문을 했다고 차가 생긴 것은 아니어서 여전히 불편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알아보다가 쏘카에 6개월 장기렌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차종에 따라 월 임대료는 조금씩 달랐지만 월 3-40만 원을 내면 6개월 동안 자동차를 빌려 탈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보험료도 포함된 가격이라 우리에게 딱 맞는 방식이어서 아내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무슨 차가 좋을지 둘러봤다. 경차와 소형차는 30만 원대, 중형차는 40만 원대. 6개월치면 200만 원대 지출이 발생한다.
그래, 뭐 200만 원을 주고 편의를 산다고 생각하자.
그러다가 시간이 남아서 이리저리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중고 시장인 당근마켓을 둘러보았는데,
세상에! 중고 자동차도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내가 맞닥뜨린 중고차는 혼다 시빅 Honda Civic!
내 인생 첫 차였던 바로 그 차였다.
자동차를 팔겠다고 올린 사람은 중년 여성이었는데 자신이 두 번째 차주이고 구입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신차를 구입하게 돼서 서둘러 판다고 했다. 첫 차주 역시 여성이었는데 세컨드카로 잠깐씩 사용했던 차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자동차는 2007년 2월 출고한 차였는데도 주행거리는 115,000km 밖에 되지 않았다. 16년 동안 탄 거리가 이 정도면 한 해 평균 7천 킬로쯤을 주행한 셈이었다.
당근에서 차를 구입한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나는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우선 판매자의 신용도라 할 수 있는 당근 점수와 판매자와 중고물품을 거래했던 사람들이 남긴 구매평을 확인했다. 여성은 60점대의 점수로 평균 이상의 점수였고 특히 내 눈길을 끈 것은 무료 나눔 횟수가 무려 30번이 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구매한 사람들의 댓글이 한결같이 호평 일색이었다. 한마디로 아주 마음씨가 좋은 판매자라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구입할지는 정하지 않은 채 판매자가 올려놓은 차 사진을 보고 이끌려서 채팅창을 열었다. 몇 마디 주고받은 뒤 이때가 성탄절 연휴즈음이라 연휴 마지막날 차를 보러 가기로 했다.
나는 오랜만에 혼다 시빅을 구경할 생각에 검색창에 차와 연식을 입력하고 각종 정보를 알아보았다. 내가 타던 그 옛날 혼다와는 완전히 달라진 신형 시빅에 대한 정보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중고 시빅 시세표가 나와서 몇 개의 사이트를 통해 판매자가 올린 자동차를 입력해 보니 현재 시세는 200만 원 이하대로 나왔다. 그런데 판매자가 올린 가격은 320만 원인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판매자에게 다시 연락을 해서 혹시 어떤 자료를 바탕으로 가격 책정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는데 답변은 자신이 400만 원에 올해 초 구입했고 그 사이 8,000 키로를 운행했으니 320만 원쯤 올리면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최근에 선팅도 다시 하고 혼다 정비소에서 엔진오일과 필터도 교체했다고 덧붙였다. 판매자로써는 그 정도 가격으로 파는 것은 일리 있어 보이고 부당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혹시 중고 지동차 시세표를 보셨는지 물었는데 판매자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알아본 몇 개의 중고 시세표를 보내드리고 참고해 보시라고 하고 채팅을 마쳤다. 자동차를 보고 싶었지만 시세보다 100만 원 이상을 더 주고 구입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는데 내 머릿속에서는 계속 혼다 시빅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다시 차주에게 연락을 해봤다. 마침 다른 구매 희망자가 차를 보러 오기로 했다고 했다. 나도 마침 시간이 남는 날이라 그럼 나도 보러 가기로 약속을 잡았다. 판매자는 내가 보내준 중고 시세 사이트를 통해서 시세를 알아보고 최종 가격을 250만 원으로 낮췄다고 했다. 그래도 시세보다는 높은 가격이지만 판매자로써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차를 보러 갔다.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마침 지상 주차장에 혼다 시빅이 세워져 있었다.
세상에, 16년 된 차 치고는 너무 곱상한 외모에 흠도 거의 없었다. 잠시 후 인상 좋은 판매자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오늘 차를 보러 오기로 했던 사람은 일이 생겨서 못 온다고 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자동차 후드를 열어보고 시 운전도 해봤다. 이제 이 차는 내 차가 될 것 같은 운명이 느껴졌다.
타이어도 보고 문이 잘 열리고 닫히는지 보기는 했지만 건성이었고 마음속으로는 이미 구입을 결정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을 좀 축이고 한숨 돌리려고 카페에 들렀다.
쉬기는 커녕, 곧바로 자동차 보험을 알아보고 개인 간 중고차 거래에 필요한 사항들을 폭풍 검색했다.
그렇게 나에게 2007년 혼다 시빅 8세대 2.0이 들어왔다.
안 쓰는 잡화나 소품 등을 팔거나 나누는 동네 플랫폼으로 알고 있던 당근마켓을 통해 중고 자동차를 구입한 것이다. 아주 좋은 판매자를 만났고 상태도 꽤 좋은 추억이 담긴 중고차를 행운처럼 얻었다.
차를 받아서 돌아오는 길에 주유도 하고 세차도 했다. 와이퍼는 한 번도 갈지 않는 듯 낡은 상태여서 당장 쿠팡에 주문을 넣어 교체했다. 내가 탔던 혼다 시빅과는 모든 것이 달라진 차였지만 기본 정비는 손수 해본 적이 있어서 자가 정비도 가능할 듯싶다. 집 근처에 자가 정비소도 알아보고 혼다 시빅 동호회에 가입해서 국내에서 부속품을 구하는 정보도 물었다. 새 차를 타게 되면 그 나름의 즐거움과 기쁨이 있지만 이런 친숙한 중고차를 구입해서 하나씩 손수 정비하고 고쳐서 타는 맛도 색다를 것 같다. 아내는 내가 사 온 중고차를 보더니 차가 작고 아담하다면서 자기 차와 바꿔 타자고 하는데 나는 당신이 안전하고 큰 차를 타야 된다는, 언뜻 듣기에는 꽤나 신사적이고 아내를 배려하는 듯한 멘트를 날렸지만 사실은 어렵게 구한 혼다 시빅을 아내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이 차가 앞으로 큰 골칫거리가 될지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취미 생활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내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을 책임져 주었던 옛 차와의 만남은 묘한 즐거움과 반가움이 새록새록 솟아나서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