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처음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 후로 10km 대회나 하프 코스 대회에 나갔었는데 50대 중반이 넘어서 시작한 운동이라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 운동에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꾸준함 consistency이었는데 일주일에 최소한 3회 이상 달려야 현상 유지를 할 수 있었다. 사실 다른 운동과 비교할 때 그 정도는 그리 큰 장애는 아니었다. 대신에 달리기가 주는 미덕은 얼마나 크고 많은지 나는 금방 달리기에 빠져버렸다.
그런데,
이 운동을 잘하려면 또 하나 요구되는 것이 있었으니 '부상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부상에는 발목과 무릎 부상 등 달리기와 직접 관련된 것도 있으나 감기나 두통 등 달리기에 영향을 주는 질병도 모두 부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나는 작년에 대망의 꿈을 품고 JTBC가 주최한 서울 마라톤 풀 코스에 등록을 하고 열심히 준비를 했으나 막판에 무릎을 다쳐서 연습을 하지 못하게 되고 대회도 취소해야만 했다. 너무너무 아쉬웠다.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코스도 마음에 들었고 주관사인 JTBC의 깔끔한 운영도 여러 경험자들이 칭송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작년을 보내고 올해 봄에 있는 동아마라톤을 준비 중이다. 겨우내 장수가 칼을 벼리듯 마라톤 준비를 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감기가 뒷덜미를 잡았다. 1월 초에 있었던 여수 해양마라톤 하프코스에 참가했던 나는 살짝 감기 증상이 있었는데도 강행을 했었는데 여기서 나는 된통 감기에 걸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감기는 무려 두 달 동안 나를 가택연금 상태로 만들었다. 살면서 겪은 어처구니없는 일 중 손에 꼽힐만한 일이었다. 병원을 바꿔가면서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고 두통은 계속 이어져서 감기가 아니라 혹시 어떤 큰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의심스럽기까지 했으나 올 겨울 나와 같은 증상으로 내와, 이비인후과에는 환자들이 넘쳤다.
그 감기가 마침내 떨어졌고 나는 한 맺힌 듯이 달리기를 시작했으나 두 달을 쉰 달리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마음을 내려놓고 대회 전 장거리 연습용으로 참가하려던 챌린지 레이스 32km 대회도 취소하고 개인 연습을 했다. 연습량이 너무 적으니 3월 17일로 다가온 동아마라톤은 완주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회에 임박해서는 장거리 연습이 해로울 수 있으니 대회를 2주 앞둔 오늘쯤이 장거리 연습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몸을 더 움츠리게 했다. 아내는 무리하지 말고 다음 대회를 준비하라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30km는 꼭 뛰어보고 싶었다. 매주토요일 새벽에 모여서 연습을 하는 내가 속한 달리기 동호회에서도 오늘은 가볍게 10km쯤 트랙을 도는 조깅으로 연습을 마무리했는데 나는 작심하고 32km LSD, Long Slow Distance 장거리 훈련을 준비하고 나왔다. 동호회 멤버가 알려준 대로 8km마다 섭취할 에너지젤을 챙기고 시작부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느리게 달려서 쉬지 않고 32km를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 기온은 영하 8도로 장갑과 버프로 목과 귀가 얼지 않게 감싸고 달렸지만 숭숭 뚫린 러닝화 속으로 매서운 바람이 들어와 발가락은 감각이 없어졌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가 내 준 떡을 두덩이 먹고 시작해서 배는 고프지 않았는데 감밤에 잠을 설쳐서 컨디션은 꽝이었다. 하지만 회원 40여 명과 함께 캄캄한 트랙을 달리면서 기분이 좋아졌고 서서히 해가 떠오르면서 사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10km쯤 지났는지 뛰던 사람들 중 반쯤이 빠져나갔다. 한 시간이 넘자 나머지 사람들도 빠지고 모두들 식당을 정해서 아침 식사를 하러 장소를 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계속 뛰었다. 이때까지 6:10 정도 속도로 달렸는데 지치거나 숨이 차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에 물을 많이 마셔서 너무 소변이 마려워서 뛰다가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렇게 잠시 호흡을 쉬니까 힘이 더 나기 시작했다. 계속 비슷한 속도로 달렸다. 이젠 오늘 급수 당번들도 철수를 하는지 동호회 테이블과 음료수, 간식들을 정리했다. 나는 그들에게 물 한 병만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영하의 날씨에 얼어버린 물이지만 내가 마실 만큼은 남아있었고 이때는 해가 떠 있어서 양지바른 곳에 물병을 두었다.
8km마다 살가운 회원 친구가 준 에너지젤을 꺼내 먹으며 달렸다, 이것이 오늘 내가 지치지 않고 달리게 한데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나는 달리면서 계속 내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를 기울였는데 지난번 24km를 달릴 때에는 20km 지점을 넘어서자 피로도가 급격히 올라왔고 호흡도 어려웠던 기억이 있었다. 오늘은 그런 신호가 전혀 없었다. 나는 20km를 넘어 30km가 가까워 오는데도 '힘들어 죽겠다'는 생각보다는 스스로에게 놀라며 달리고 있었다. 와, 이게 되네!
어제 찾아본 유튜브 달리기 비디오에서는 장거리 훈련 막바지에 힘이 남았다고 생각되면 마지막 2-3km에서는 속도를 올려서 달려볼 것을 권하고 있었다. 24km 지점에서 나는 오늘의 세 번째 에너지젤을 까먹으며 30km 지점에서 한번 속도를 올려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까지도 힘이 남았던 것이다. 해는 떴지만 날씨는 여전히 차가워서 남겨둔 물병을 들이켜면 물보다 얼음이 더 많이 입으로 들어왔다. 얼음을 오도독 씹어먹으며 나는 슬쩍 속도를 올려보았다.
한 바퀴 내내 속도를 낼 수는 없었고 직선 구간에서 조금 올리다가 이내 6분대의 속도로 32km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트랙에서 나 홀로 장거리 훈련을 무사히 마쳤다. 행복하고 즐거웠고 무엇보다도 몸이 지치지 않았다. 잠깐 허기가 몰려왔으나 물을 마시니 다른 건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따사로운 3월 초의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스트레칭으로 마무리를 했다. 무릎을 굽히고 앉으니 그제야 아이고 비명이 나왔다. 허리도 풀어주고 허벅지와 옆구리 발목과 무릎을 조심스럽게 풀어주고 돌아왔다. 집에 와서 샤워를 마치고는 찌릿하게 신호를 보내오는 발목에는 냉찜질을 하고 나머지 종아리와 무릎, 허벅지에는 마그네슘 리커버리 크림을 발라주었다.
이렇게 나의 첫 장거리 훈련을 마치고 나는 이제 14일 후의 동아마라톤을 나가게 되었다. 첫 풀코스 대회이니 나는 기록보다는 완주에 집중할 생각이고 오늘 기록과 그동안의 기록을 보건대 4시간 후반대에서 5시간 사이에 대회를 마치지 않을까 예상한다. 아마도 내가 속한 동호회에서 가장 느린 속도일 텐데 그렇게라도 완주를 할 수 있다면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할 것이다. 그게 내가 바라던 바이다. 내 속도로 멈추지 않고 42km를 달리는 것, 즐겁고 행복하게 달리는 것. 오늘의 경험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확신으로 다가온다. 남은 기간 동안 꾸준히 연습해서 실제의 결과로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