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주행거리 10km 신차를 공장으로 보내면서
일생동안 자동차를 몇 대를 샀을까 생각해 보니 생각보다 대수가 꽤 된다. 오래 살았다는 얘기도 되고 자동차를 많이 사용한다는 얘기도 되는데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에서, 그것도 대중교통을 기대할 수 없는 캘리포니아에 살았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첫 차는 대부분 가난한 유학생이 그렇듯 중고차로 시작했고 그 중고차가 고속도로에서 퍼지자 집에서 신차를 구입해 주었다. 내 인생 첫 차는 닛산 '알티마' 아마도 1992년형이었을 것이다. 이 차는 그해에 처음 나온 닛산의 중형차인데 지금까지도 단종되지 않고 나오는 닛산의 대표 세단이 되었다. 그 후 대학원 다닐 때는 혼다의 '어코드'를 2000년에 신차로 구입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중고차를 타다가 결혼 후 구입한 2004년 현대 '산타페', 그 뒤 몇 대의 차량을 더 구입해서 아내와 아이들을 태우고 다녔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내연기관차와 안녕을 선언하고 기아 자동차의 전기차 'EV6'를 구입했다.
이번에 차량을 구입한 경위는 좀 특별한데 차를 구입하면서 색깔을 결정하느라 무척 오랫동안 고심했었기 때문이다. 이전 자동차들의 색깔은 은색, 청록색, 자주색, 흰색 등 별로 색깔이 튀지 않고 무난한 편이라 색깔보다는 구입하려는 차량의 등급과 추가 옵션에 더 관심이 많았고 편의와 안전사양에 관심을 더 기울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라는 구동계의 변화만큼이나 혁명적인 빨간색 차를 구입하겠다고 가족에게 선포했었는데 전기차는 이견없이 통과됐지만 빨간 차는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 즉 아내와 두 아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이들을 설득해야 했다. 가족들이 마지못해 동의하자 이번에는 오히려 내가 스스로 마음을 접고 흰색 차량으로 번복했다가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또다시 번복하여 최종적으로는 처음부터 원했던 빨간색을 구입하게 된 것이라 딴에는 우여곡절 끝에 원하는 차량이 어렵게 손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빨간색 차로 결정이 난 후 나는 어서 자동차를 받았으면 했는데 마침 일본 출장이 겹쳐있어서 막상 자동차는 출고가 되었지만 일주일 동안 차고에 대기시켰다가 출장에서 돌아온 뒤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타고 있던 자동차는 또 처분을 해야 해서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고 매도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차량 인도일인 당일 아침!
전날 밤 자동차 때문은 아니었고 출장에서 돌아와 정리할 일들 때문에 깊은 잠을 못 자고 새벽에 깨었다. 부스스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는데 이럴 때 기분전환을 하고 기분을 상쾌하기 만드는 데에는 달리기만 한 게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찌뿌둥한 몸으로 동네 운동장으로 달려가서 가볍게 10km를 달렸다.
금세 몸이 상쾌해져서 나는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차량 인도 장소로 버스를 타고 갔다.
카마스터는 서비스라며 차량의 틴팅과 트렁크 보조등을 달아주었는데 그래서 우리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동차 인테리어 샵에서 만났다. 전기차가 처음인 나를 위해서 카마스터는 꽤 오랫동안 필수 기능들과 설정방법 등을 일러주었고 마침내 나는 빨간색 내 첫 전기차를 몰고 도로로 나왔다. 시승 때 전기차 경험을 해보긴 했지만 내가 직접 운전한 것은 아니어서 35년 운전경력과 무사고 기록이 있음에도 운전을 하면서 나는 도로에서 조심스러웠다.
집에 거의 다 와가는 도로에서 잠깐 들러야 할 일이 생각나서 경로를 바꿨다. 대로에서 직진을 하다가 좌회전을 했고 좌회전 후 곧바로 우회전을 해야 했다. 나는 좌회전 후 편도 3차선 도로의 3차로에서 우회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내 좌 측 전방 2차로에는 화물트럭이 있었다. 우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하려던 내차로 갑자기 2차로에 있던 화물트럭이 우회전을 하면서 내차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왜 저럴까 싶어서 정지했는데 트럭은 계속 우측으로 긴 차를 회전시키면서 내 빨간 신차의 좌측 전방 면을 그대로 찢으며 밀어붙였다. 육중한 트럭이 내가 앉은 운전석 앞까지 들이밀고 내가 어렵게 고른 빨간색 차량의 범퍼와 보닛을 산산조각 내버린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동차가 이제 막 내 손에 들어왔는데 5분도 안되어서 내 눈앞에서 박살 나는 것을 지켜보는 느낌은 말할 수 없이 비현실적이었다.
차가 찢겨나가는 소음은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는데 트럭이 어디까지 밀어붙일지 가늠이 안 돼서 잠시나마 공포가 엄습했다. 마침내 트럭이 사고를 인지하고 정차했다. 어느새 기사가 내 운전석 쪽으로 달려 나와서 손가락질을 했다.
"대형 트럭이 우회전을 하는데 거길 끼어들면 어떡해요!"
일단 트럭기사는 이 사고로 인해서 신체에 별 이상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나 역시도 즉각적인 의료지원을 받아야 할 외상은 발생하지 않은 듯했다.
나는 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상태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게 이런 기분이로구나 싶었다. 트럭 기사는 한눈에도 신차인 내 차를 보고 멈칫했지만 이내 사고 사진을 찍으면서 겨우 바깥으로 나온 나에게 트럭은 회전이 큰 차량이라 회전 시 뒤따르는 차량이 양보해야 한다면서 자기가 큰 피해를 보았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보험사가 어디였더라. 경찰신고를 해야 하는 걸까. 아내를 불러서 도와달라고 해야 하나.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가슴은 계속 두근거렸고 가라앉지 않았다.
귓속이 웽웽 울리고 있는데 어디선가에서 보험사에서 보내준 견인차와 견인기사, 사고조사관이 와서 이것저것 내 신상과 사고에 대해 물었다. 멍한 눈으로 불과 몇 분 전까지 완벽한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대책 없이 부서진 차를 바라보았다. 견인기사는 도로 바닥에 로드킬 당한 동물 사체처럼 널브러진 내 빨간 자동차의 범퍼와 망가져서 떨어진 부속들을 한쪽으로 발로 차서 치웠다. 깨지고 찢어진 빨간 자동차 파편들이 노견으로 아무렇게나 발로 차여 던져지는 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피 흘리며 쓰러진 내 자식들을 함부로 다루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쓰리고 아팠다.
그들에게는 일상이라는 듯 사무적인 사고처리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지고 나는 넋이 나간채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은 두근거리는데 머릿속은 멍한 기이한 상태. 이 일을 아내와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침내 형제들로 이루어진 단톡방에 형이 차는 잘 가져왔는지 묻는 글을 남겼길래 차 사고 소식을 전했다. 형은 곧바로 전화를 해서 내 안부를 확인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냐, 네 몸은 다치지 않았잖아."
나는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차라리 내가 다쳤으면 좋았겠더라."
나는 진심이었다. 빨간 자동차의 부서져 떨어져 나간 선홍빛 부속들을 보았더라면 정말로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이 안 다쳤으니 천행이지. 자동차야 새 거라서 마음은 아프겠지만 고치면 될일 아니냐."
나는 형제들에게 아무 트집을 잡아서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진이 다 빠지고 영혼은 탈탈 털려버린 느낌이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아내가 퇴근해서 돌아왔다.
"여보, 주차장을 다 둘러봤는데 빨간 차가 안 보이네요. 차 어디 있어요? 아, 충전 중인가?"
아내는 빙긋 웃으며 내게 물었다가 낯빛이 심상치 않은 내 모습을 보고는 철렁하는 눈빛으로 내 앞에 앉았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사고 순간이었지만 최선을 다해서 아내에게 설명해 주었다.
아내의 반응도 내 형제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보 큰일 날뻔했네요. 그래도 차만 망가졌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모두들 나와 생각이 달랐고 그들끼리는 같았다.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그 말이 싫었다. 동의하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