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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산티아고 항공권을 끊었다

by 이프로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것은 2013년의 일이다.

그땐 40대였고 몸도 젊고 마음은 학생들 못지 않은 청춘이라는 생각에 피도 뜨거웠다.

학교에서 1년간 연구년을 받아서 시간이 여유로울 때였는데 그 몇 해 전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알게 된 이후로 조금씩 도보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막상 떠난 낯선 유럽 서쪽 끝 나라의 800킬로미터 도보여행은 중년에 접어든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다.

힘든데 기쁘고 남루한데 행복한 그 이상한 아이러니!

그렇게 산티아고 프랑스 길을 걸은 이후로 나는 포르투갈 길, 북쪽길, 프리미티보 길, 아라곤 길, 두 번째 프랑스 길, 산살바도르 길을 걸었다. 코로나 기간 중 은의 길을 시도했다가 감염되는 바람에 중도에 걷기를 포기하고 형벌같은 타국에서의 자가격리를 감당한 후 돌아오기도 했다.


이제 염색을 하지 않으면 백발이 성성하고 정년퇴임도 그리 먼 얘기가 아닌 시기가 되었는데 다시 1년 동안의 안식년이 주어졌다. 퇴임하기 전에 주어진 1년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용도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스페인 순례를 가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아직 걷지 않은 미지의 길, 걷다가 중도 포기한 은의 길 Via de la Plata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스페인의 순례길 중 천 킬로미터가 넘는 긴 구간의 길이고 이베리아 반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종단하면서 2천년 전 로마 군단이 만든 길과 카톨릭 유적을 지나는 여정이다.

순례객이 많지 않고 바르와 알베르게도 적은 편인데 따가운 햇살을 피할 그늘은 많지 않아서 힘들고 외로운 길이라고 한다. 그 길을 걷고 싶다.


나는 왜 자꾸 이 길고 힘든 도보여행을 되풀이하는 것인지 자문해 보았다.

확실한 것은 내가 걷는 순례 여행이 보통의 여행이 주는 '관광'과 '휴식'이 있는 여행은 아니라는 것이다.

매일 바뀌는 잠자리와 낯선 사람들, 혹은 아무도 없는 곳을 걷고 아무도 만나지 못해서 겪는 외로움, 늘 입은 옷을 세탁하고 말려야 하는 성가심과 궂은 날씨에도 우비를 뒤집어쓰고 거리로 나서야 하는 일정은 쾌적한 환경에서 일하고 안락한 집에서 쉬다가 온 사람에게는 쉬이 적응이 어려운 조건이다.

생전 처음 걸어보는 길,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밥과 잠자리를 부탁해야 하는 상황은 느슨해질 틈 없이 늘 긴장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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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었던 길, 그리운 길

예약까지 해둔 숙소가 잠겨있거나 아무리 걸어도 쉴만한 카페나 바르가 나타나지 않아서 끼니를 거르고 걸어야 할 때는 낭패감과 불안감으로 마음이 착잡해질 때도 있다. 대개의 경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거나 포기하는 마음으로 터덜터덜 걷고 있을 때 신비롭게도 스르르 내 의지와 관계없이 문제가 엉뚱하게 해결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행운처럼 맞이하는 그날의 침상에 기대어 안도의 숨을 내쉬면 하루 내내 곤두서 있던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진다. 비록 몇 시간 뒤의 먹을 것과 잠잘 곳을 걱정해야 하는 나그네 신세지만 다음날 입을 속옷이 창밖의 빨랫줄에 걸려 뽀송하게 말라서 펄럭이는 모습을 보면 행복이 여기 있구나 싶은 마음마저 드는 것이다.


새벽바람에 길을 나서다가 만나는 신비로운 빛깔의 여명과 장엄한 일출, 오로지 내 그림자만 바라보며 외롭게 걷는 동안 떠올리는 내 지난 날들, 내 가족들, 내 일상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마주칠 그리 많지 않은 나날들.

내가 머나먼 스페인 땅을 걸으며 즐기는 순례 여행은 자초한 고독과 긴장을 천천히 음미하고 가끔씩 전화로 가족들과 메시지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고독감을 이겨내고 낯선 침대에서 피로를 풀며 마음을 내려놓는 자기 단련 훈련이다. 먹을 것과 잠잘 곳이라는 원초적인 욕구를 그날그날 해결하는 위기감의 수축과 이완으로 나는 늘 앞서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의 병을 다스리고 오는 식으로 또 몇 년간 이 땅에서 버텨 낼 근육을 얻어 오는 것이다.


이번에는 어떤 길들이 내 앞에 펼쳐질까.

얼마나 많은 비를 맞고 얼마나 강한 바람과 맞서야 할까. 동행자를 만나게 될까.

쉽지 않을 것이고 후회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측 건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마 나는 다음 카미노를 구상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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