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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 델 살바도르 2

본격적인 칸타브리아 산맥 종주

by 이프로

어제 살바도르길로 방향을 틀면서 새벽길을 나섰었는데 이제는 산속에 있다 보니 기온도 떨어지고 해 뜨지 않은 시간에 산길을 걷는 것이 위험하기도 해서 나는 그동안의 새벽 출발 습관을 버리고 동이 트고 난 후 사위가 환해지면 출발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도 킴과 나는 알베르게에서 일찍 출발하는 편에 속했다.

같이 숙박한 스페인 사람들은 시에스타를 꼭 지키고 여럿이 둘러앉아 거나한 와인과 함께 하는 늦은 저녁식사 후에 잠자리에도 늦게 드는 스타일들이라 순례자의 일정이라기보다는 스페인 촌로들의 일정으로 하루 이동 거리도 20km 안팎으로 잡고 느긋하게 걷는 것처럼 보였다.


둘째 날은 월요일이었고 우리 여정은 로블라 La Robla 마을에서 폴라두라 데 라 테르시아 Poladura de la Tercia 인데 산길로 24km였다.

로블라 마을을 빠져나가면서는 도로가를 따라 잠깐 걷기도 했지만 이내 산길로 바뀌었고 예쁜 경치가 펼쳐졌다. 직장인이 주말을 잘 쉬고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월요일 동트기 전 여명에 산기슭을 거침없이 올랐다.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는데 쌀쌀한 한기가 느껴져서 바람막이를 꺼내 입고 후드도 뒤집어썼다. 불과 이틀 전 레온에서 더위에 힘들어하던 일이 오래전처럼 느껴졌다.


본격적인 산악 지형이 시작되었다.

지형은 그리 난도가 높지는 않았는데 토양과 산세는 우리나라와 많이 달랐다. 고도가 꽤 높아도 초원으로 이루어진 곳이 많아서 그 깊은 산속에서 방목 중인 소떼와 양 떼를 자주 만났고 가끔씩은 말들도 떼를 이루어 풀을 뜯고 있었다. 우리나라 산은 고도 천 미터 이상을 오르면 겹겹이 포개진 산그리메가 사방으로 펼쳐진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고 신비로운 느낌도 주는데 이번 카미노 시작을 피레네 산맥에서 보내고 이제는 칸타브리아 산맥을 넘고 있는 내 경험으로 스페인 산악지방에서 한국 산과 유사한 점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바위산과 흙산이 포개어 있기도 하고 번갈아 나오기도 하는데 바위산은 우리나라의 바위산처럼 예술가가 빚은 듯한 절묘한 아름다움이 있기보다는 그냥 큰 바위 몇 덩어리가 나머지 풍경을 압도하는 모양새여서 가까이에서 보다는 멀리서 봐야 아름다웠다. 다만 이런 산새와 낮게 깔린 구름,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파란 하늘이 산세와 어우러져서 이국적이고 지구가 아닌 다른 세상 느낌을 주었다.

한국과는 다르지만 충분히 아름답고 눈길을 사로잡는 풍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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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24km는 평지 같은 프랑스길의 같은 거리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걸렸다.

벼랑길 옆에 난 작은 오솔길 같은 구간은 풍경을 감상하며 걷기에 좋았고 가끔씩 나타나는 초원으로 뒤덮인 길에서는 어디가 길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그런 초원에는 노란 화살표를 그려 넣을 나무도 돌멩이도 없어서 방향도 못 잡은 채 순전히 느낌만으로 한참을 내려갔다가 길이 아닌가 싶어서 다시 올라오기를 반복하다가 GPS를 꺼내보며 겨우 멀리 떨어진 길을 발견하고 험한 풀숲을 헤치고 찾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발렌티나를 길에서 만난 것은 바로 이런 애매한 초원길 내리막에서였다.

전날 알베르게에서 그녀에게 접근하여 우리의 숙박과 식사 예약을 부탁한 우리는 필요이상으로 그녀에게 미소를 날리고 친근감을 마구 표현해 댔는데 아무런 일행 없이 홀로 다니는 그녀는 '츤데레'처럼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기는 했지만 살갑게 굴지는 않던 아가씨였다. 그녀는 우리가 쉬는 시간 없이 전투적으로 산봉우리를 몇 개를 넘어 선 후 그림 같은 경치가 펼쳐지는 오솔길에서 자리를 깔고 앉아 도넛과 콜라를 까먹고 있을 때 바람처럼 나타나 '하이, 유 가이스' 한마디 하고는 다시 사라졌다. 우리는 배가 고파서 허겁지겁 도넛과 콜라를 입에 쑤셔 넣고 있던 참이라 대꾸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기만 했는데 날렵한 몸매답게 준족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바로 그 애매모호한 초원길 내리막에서 헤매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보다 뒤에서 산기슭을 내려오며 이리저리 고개를 갸우뚱하며 방황하던 그녀를 쭈욱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길이 없어졌어!'를 반복해서 외치며 이리저리 희미한 발자취를 찾고 있던 그녀에게 나는 호기롭게 GPS 지도를 꺼내 보이며 '따라와, 내가 길 알아.'하고 오빠처럼 앞장섰다. 제밥과 잠자리도 스스로 준비하지 못하던 별로 신뢰가 안 가던 한국인 남자 두 명이어서인지 처음에는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꽤 꿋꿋하게 내려가다가 결국 어설프게나마 흔적이 남은 길을 찾아내어 결국 마을로 이어지는 도로로 연결지점을 찾아내니 그제야 발렌티나는 미소 지으며 엄지를 올려 보인다. 평지로 내려와서 편안하게 펼쳐진 보도를 걸으며 가벼운 신상파악을 했다. 자세히 보면 미남배우 탐 크루즈의 눈과 코를 하고 있는 발렌티나는 주근깨가 포인트인 미녀로 살바도르 길이 끝나는 오비에도에서 오래된 친구를 만나서 며칠 보낸 후 직장이 있는 바르셀로나로 복귀할 것이고 조만간 그동안 하고 있던 안경사 일을 그만두고 스페인어 선생님 자격을 딴 후 학교에 취업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점심 무렵 알베르게에 도착했지만 식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음식으로 만 해결해야 하는 구간이라 오히려 여유로웠다. 천천히 샤워하고 천천히 빨래하고 흐린 후 날이 개어 쨍한 햇볕으로 먼지 쌓인 건조대를 끌어와 옷가지를 널었다. 작은 마을이라지만 세대수가 어느 정도 되었는데 상점이나 바르가 없다 보니 오후 시간이 되어도 거리에는 행인이 거의 없어서 마을은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개와 고양이 세상이었다. 킴은 베드에 누워서 낮잠을 자는 듯했고 나는 알베르게 앞에 놓인 벤치에서 좀 기대어 있다가 잠깐 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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