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알코올중독자 교수

by 이프로

그렇게 시간 강사로 시작했던 학교에서 나를 잘 보았던 건지 전임교수 공고가 나고 원서를 냈더니 일이 술술 풀려서 교수로 임용이 되었다. 교수가 되야겠다는 계획 없이 덜컥 임용이 돼서 처음 몇 년은 학교 생활에 고전했다. 전임 교수가 되자마자 내 이름 밑으로 지도학생이 생겼고 내가 맡는 담당 과목이 생겨서 전체 커리큘럼과 조율도 해야 했고 매주 있는 학과회의에서는 내가 따르고 감당해야 할 각종 지시, 전달 사항들이 내려왔다. 풀타임 직장이니 학교에 전심을 다해야 하는데 아직도 내 마음은 늘 충무로와 프로듀서들이라는 콩밭에 가 있었다. 임용 초 몇 학기 동안 나에게 대학 교수는 알바의 연장이었고 내 마음은 어느 영화사에서라도 연출 계약을 하자고 연락이 오면 당장에 학교는 때려치우고 달려갈 작정이었다.


강사일 때는 일주일에 하루만 학교에 나오는 것이라 차라리 학생들에게 집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지만 전임 교수가 되고는 주중에 계속 출근해야 했고 기본 시수로 9시간 수업에 추가로 대학원 수업도 하나를 맡아야 해서 몸이 바빠졌다. 이제 나는 차기 작품 감독의 위치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몸이 달아올라 임용 첫 학기에는 내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하고 수업은 남은 시간에 마지못해 들어가서 학생들만 혼내고 나오는 식으로 대충 때우기도 했다. 일은 많아지고 몸은 바빠졌지만 그렇다고 술 마시는 시간을 줄이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학교 일이건 학교 밖의 일이건 모든 일에는 늘 ‘뒤풀이’와 ‘회식’이 있었다.


교수는 수업 외에도 학생 전체를 돌봐야 했다. 학기초에는 입학식과 오리엔테이션이 있고 학기가 시작되면 개강총회, 엠티, 축제가 있었으며 학기말에는 종강총회와 학생회 부서별 워크숍이 있었다. 책과 교실만 있으면 되는 일반 학과가 아니라 예술대학의 영화학과이다 보니 학과에서 관리하는 촬영, 조명, 그립 등 각종 기자재와 후반 작업 실습실, 촬영 세트장, 녹음실, 연기연습실 등의 관리 감독도 해야 하고 학교에서 힘들게 따 온 그해 예산에 맞게 기자재 구입 신청과 실험실습실 보수와 정비도 해야 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신임 교수이자 가장 젊은 교수인 나의 몫이었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있다 보니 학교에서 술을 먹는 일이 잦아졌다. 같이 임용된 동기나 역시 밤늦게 남아서 공부하고 있거나 작업 중이던 예술 대학의 다른 과 교수들과 마셨다. 여전히 학생들과도 마셨지만 학생들은 이제는 신분이 강사에서 교수로 바뀐 나에게 예전처럼 격의 없이 다가오지 못했다. 같이 술에 취해 형이라고 불러도 오케이 했던 나는 이제 건방지게 굴거나 귀찮게 구는 학생이 있으면 권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편리했다. 갑자기 권위적이고 목에 힘을 주는 내가 학생들이 보기에는 재수 없겠지만 나는 이제 원하기만 한다면 갑질도 가능한 교수인 것이다. 실제로 학교에서는 내가 보기에도 꽤나 재수 없게 구는 ‘교수 놈’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우리 학교는 여느 대학과 비교해도 교수 채용 비리나 재단 비리가 없는 청청 대학에 속했고 존경하고 싶고 닮고 싶은 교수님들도 꽤 많은 학교임에는 분명했지만 어느 사회나 이상한 놈들, 나쁜 놈들은 꼭 있기 마련이었다.


학생이 작업에 필요한 장비나 실습실을 요청하면 자기가 예뻐하는 학생 우선순으로 사용하게 하고 자기에게 밉보인 학생들은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불이익을 주는 교수, 장학금 면담을 할 때도 학생의 처지와 상황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기 말을 잘 들었는지를 고려하여 장학금을 주는 교수도 있었다. 노골적으로 뭔가를 기대하는 교수, 여학생이 딸 같다면서 뒤에서 안거나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놈도 있었다.

교수가 되고 보니 왜 그렇게 교수가 되려고 목을 매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강사일 때는 말도 못 꺼내볼 일들을 교수가 되고 나니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술자리에 가면 상석을 양보했고 나에게 먼저 술을 따라주고 내가 원하는 안주를 주문해 주었다. 촌에서 선달 노릇도 못하던 이가 갑자기 벼슬아치가 된 것 같은 변화였다.


교수들도 월급쟁이이고 월급쟁이들이 술 마시는 것처럼 교수들도 술을 마신다. 내가 속한 학과의 선임교수들은 영화이론을 전공해서 그런지 영화판 출신들과는 다르게 아무도 술을 마시지 않아서 그동안 회식 때마다 우리 과는 술도 못 마시는 무능한 과라는 핀잔성 농담을 듣고 있었는데 이젠 새로운 다크호스가 들어온 것이다. 나는 학과 회식에서, 단과대 회식에서, 학교사업단 회식에서, 학생들과의 회식에서, 임용 동기 회식에서 발군의 음주 기량을 선 보이고 모두의 경탄과 찬사를 받았다. 심지어 학생들과의 회식에서도 나는 20대 청년들을 쓰러뜨리고 끝까지 살아남아 ‘약해 빠진 놈들이 무슨 영화를 한다고…’하며 멋있게 계산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이렇게 퍼 마시고 다닌 교수들의 술자리가 늘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대부분 1차, 2차까지는 점잖은 교수의 품격을 유지하고 선비의 풍류 인양 체면을 지켰지만 3차가 되면 정상인 범주에 드는 사람들은 다 떠난다. 중독자 수준의 ‘선수들’만이 남게 되는데 이쯤 되면 모두들 힘겹게 뒤집어쓰고 있던 교수의 탈을 벗어버리고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특히 고명하신 학자로 알려진 인문대 노땅 교수들의 술주정이 고약했는데 불문과 모 교수는 술이 취하면 후배 교수들에게 반말과 악담을 했다.

“야, 이 새꺄, 네가 쓴 게 그게 책이냐, 라면 냄비 받침으로나 써야겠다.”

“영화 찍다 안되니까 학교 와서 좋으냐?” 같은 말도 서슴지 않았는데 같은 학교 선배 교수에 심지어 보직도 하고 있는 교수여서 그가 이렇게 술주정을 시작하면 젊은 교수들은 그를 버려두고 나와버렸다. 돌아다보면 늙은 인문대 교수 몇이 남아 한심한 주정을 주고받으며 남은 술을 홀짝이고 늙은 술집 여주인을 두고 희롱질이나 주고받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학교에서 다시 그를 만나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먼저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별일 없지요?” 그에게 목례하며 지나치면서 나는 속으로 말한다. ‘너나 나나 똑같은 놈이다, 이 화상아!’


교수는 영화진흥위원회나 문화부 등 국가 연구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미국에서 금방 돌아온 따끈따끈한 젊은 교수에 속하는 나에게 학회에서는 독립영화 제작 지원이나 영화교육 사업 등 공동 연구 사업을 하자는 제안도 여러 번 있었다. 매번 시나리오를 지원만 하다가 이제는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다른 이들을 평가하고 떨어뜨리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부산이나 전주 등 유명 국제 영화제에서 학술 게스트로 초청을 해주고 발언 기회를 주었다. 어느덧 나는 감독으로 간택되기를 기다리던 프리랜서에서, 감독과 프로듀서들을 평가하고 세미나나 포럼에서 공개적으로 그들을 비평해도 되는 아카데미아의 위치로 드라마틱한 자리바꿈을 한 것이다.


부산영화제에서의 일이다. 교수가 되기 전 감독과 프로그래머로 만났던 모씨를 만났다. 도시는 달랐지만 나와 같은 캘리포니아에서 공부한 인연으로 밤새 오지게 술을 퍼 마시며 나름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멀리서 보더니 인사만 하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 나를 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 보니 그는 나와 술을 마시며 자신이 미국에서 대마초를 즐겨했다는 얘기를 거리낌 없이 했었던 것이다. 나에게 자신의 지난날들을 다 털어 보이던 그들은 이제 허물없이 다가오지 않았다. 영화학 박사학위 소지자들인 프로그래머들 대부분은 교수가 되고 싶어 했다. 어느 학교에서든 교수 초빙 공고가 나면 아마도 모두 지원을 할 것이고 나는 우리 학교의 경우 내부 심사위원으로, 타 대학이라면 외부 심사위원이 될 확률이 매우 높은 사람인 것이다. 나에게 약점을 잡혀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들이 합석을 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술을 마시던 상대들을 바꿔서 이제는 타 대학의 교수들이나 박사과정 연구원들, 석사 과정 학생들, 그리고 조교들과 술을 마셨다. 나를 부르는 호칭이 ‘감독님’에서 ‘교수님’으로 바뀐 게 좀 아쉽긴 했지만 술에 취해서 들으면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나는 좌장이었고 리더였으며 학자였고 그걸 인정하는지 그들은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체면 술값을 내느라 돈이 좀 깨지긴 했지만 한두 번 내고 나서 적당히 취한 척하면 지들끼리 갹출해서 내는 눈치는 있는 그룹들이어서 견딜만했다. 무엇보다도 매월 25일이 되면 꼬박꼬박 입금되는 월급은 아름다웠다.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소개해준 여성과 결혼을 한 나는 안정된 인생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술은 그전보다 달고도 달았다.


그렇게 달게 마시는 술자리에서 자주 취하던 나는 심심찮게 말실수를 했다. 맨 정신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얘기를 술에 취해 긴장이 풀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다.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상대를 무시하거나 얕보는 말투, 내가 갖고 있는 특권과 기득권을 드러내는 말들이었다. 정말로 재수 없고 밥맛 떨어지는 주정을 하고 다닌 것이다.


“아직 야스지로 오즈를 모르고 있단 말이야, 기본기가 전혀 안되어있군”

“아, 그런 게 필요해? 교순데 그냥 가면 안 되는 거야? 다시 잘 말해봐.”

“요즘 학생들 정말 책들 안 읽어. 얘들이 헉슬리를 알겠어, 오슨 웰즈를 이해하겠어?

“내가 심사하게 되면 잘 봐줄게, 그러니까 나한테 좀 잘해라, 니가 맨날 이러고 있으니까 안 풀리는 거야.”

DSCF0059.JPG
UNADJUSTEDNONRAW_thumb_3539.jpg

나에게 주어진 이런 환경과 신분의 변화가 안락함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술에 취했을 때일 경우였고 대개의 경우 나는 불안했다. 임용 초기 학교에 연구실이 부족해서 나는 임시로 인문대 건물의 연구실을 배정받아 사용했는데 예술대가 있는 학과로 오가다가 복도나 교정에서 마주치는 교수들과도 낯이 익어서 가볍게 목례도 하고 인사도 나누는데 아직 같은 학교 교수들의 얼굴을 다 익히지 못한 나는 무조건 학생으로 보기엔 나이가 좀 있다 싶은 이에게는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교수와 강사, 직원을 알아보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직원들은 별로 교정에서 마주칠 일이 없었고 자기 방이 있는 교수들은 출퇴근 때가 아니면 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수업을 가는 길이라면 교재와 출석부 정도, 하지만 강사들은 달랐다. 교강사 휴게실이 있기는 하지만 수업을 마치고 빨리 다른 대학으로 이동하거나 하루에 수업을 여러 개 해야 하는 강사들은 늘 묵직한 가방을 들고 다녔다. 머리가 희끗한 그들 중 상당수는 시간강사였다. 당시 30대 중반의 나는 아직 청년으로 보일 정도로 젊었고 갑자기 나에게 주어진 이런 환경과 신분의 변화는 ‘마침내 주어진 안락함’ 이라기보다는 ‘언젠가 빼앗길지도 모르는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영화판과 영화과 교수를 혼돈하고 있었고 그 확연한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흥행에 성공해야 신분이 유지되는 영화감독은 계속해서 책과 논문을 발표해야 하는 교수로 바뀌었을 뿐 늘 투자자와 학교 이사진에 만족할만한 실적을 보여줘야 하는 것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교수업적 평가 규정이 여러 차례 바뀌어서 내 임용 초기 때와는 많이 다르겠지만 당시의 나는 매년 200%의 연구업적을 제출하고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연구업적 200%라 함은 국제 저명 학술지 게재 논문 1편이나 국내 저명 학술지 게재 눈문 2편에 해당하는 것으로 예술계인 나에게는 작품 활동으로도 업적 제출이 가능했지만 개봉한 장편 상업 영화 1편이나 저명한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한 독립영화 1편이 필요했다. 학교 생활을 하면서 영화를 개봉하거나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논문을 쓰고 책을 쓰는 일밖에 없었다. 글 쓰는 일을 즐기는 편이었지만 생업의 운명을 두고 써야 하는 학술 논문과 전공 서적은 내 영혼을 갉아먹고 불안을 키워갔다.

그 와중에 수업 중에는 심심치 않게 학생들과 갈등이 일어났다 나는 여전히 카랑카랑하고 타협하지 않는 젊은 교수였고 학생들은 각개로 대들었다가 먹히지 않으면 연합으로 전선을 구축해 나를 공격했다. 후배들에게 영을 세우고 졸업 작품을 자신의 뜻대로 가오 잡으며 찍고 싶은 고참 학생의 촬영 계획을 승인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장기전, 국지전, 회유전 등으로 저항했고 나는 그냥 잘 찍으라고 허락해 줬더라면 서로 편하고 좋았을 것을 끝까지 수정본을 요구하면서 학생들과 힘겹게 싸우며 수업을 운영했다.


수업에도 지치고, 논문을 쓰다가 곁가지로 새거나 갑자기 내 논리에 스스로 자신이 없어지면 힘들고 외로웠다. 아내는 결혼 후 얼마 안 지나서 생긴 첫 아이 육아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고 내 사정을 털어놓을 대상이나 들어줄 이는 없었다.

술은 그렇게 지치고 외로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였다. 술이 나를 위로해 주거나 내 아쉬움을 들어주지는 못했지만 가깝고 편리했다. 손만 뻗으면 술은 있었고 두세 시간이면 나는 머리를 옥죄던 논제와 선을 넘나들며 대들던 학생들을 잊게 해 주었다. 쓰던 논문이 아무리 씨름을 해도 풀리지 않고 학생들이 외부로 촬영을 나가서 사고를 내거나 문제를 일으켜서 학교에 골치 아픈 민원이 들어왔을 때, 나는 대취해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다음 날 오후에 멍하게 기대어 앉아 술이 깨면 나는 다시 느릿느릿 책상에 앉아 해결 방안을 찾아야했다.


생활이 안정되면 당연히 가라앉아야 하는 불안감은 신기하게도 그대로였고 늘 그러려니 하고 안고 살았던 내 특유의 예민함은 오히려 쑥쑥 자랐다. 주말을 보내고 수업이 시작되는 주초를 맞을 무렵에는 잠을 못 이루고 마음도 불안해져서 일요일 밤에는 늘 술을 마셨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주일 예배를 드리고 한주 동안 지은 죄를 회개했던 나는 신실한 다른 이들이 주일 저녁예배를 드리러 가는 시간 저녁 밥상에서 와인을 땄다.

누가 봐도 식사와 함께 간단한 반주를 즐기는 평범한 모습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생활이 지속돼 왔기 때문에 아내가 준비하는 밥 반찬은 안주의 역할에 더 적절하도록 간을 약하게 하고 한 가지 안주가 떨어지면 추가로 새로운 안주를 내왔다.


아이들은 아빠가 술을 마시는 날이면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아내는 내 앞에 앉아서 안주 시중과 이런저런 내 넋두리를 들어주며 때로는 위로를 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도 했는데 나는 그런 아내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왜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서 아내가 수긍해주기를 바랄 때가 더 많았다. 그러다 보면 술에 취한 내 언성은 높아지게 되는데 아내는 그럴 때 기껏 설명한 내 말은 듣지 않고 아이들이 잠들었으니 언성을 좀 낮추라고 해서 열띤 주장을 펼치던 나를 김새게 했다. 재미가 없어진 나는 말없이 마무리 술을 마시고 아내는 일어나 식탁을 치운다. 보통 두 시간이 넘어가는 저녁 식사를 이렇게 마치는 것이다. 나는 입가심 캔맥주 하나를 들고 서재로 들어가서 음악을 들으며 졸다가 침실로 가서 누워버리지만 아내는 그때부터 잔뜩 쌓인 주방 정리를 마치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야 쉴 수 있었을 것이다. 일요일 밤마다 벌어지는 이 술판은 20년 동안의 결혼 생활 내내 이어졌다.


아무리 안 그러려고 애를 쓰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교수 자리에 있는 것이 늘 좋지는 않았다. 나보다 하수라고 여기던 감독이나, 내 조감독 출신의 후배가 입봉하고, 그리고 놀랍게도 그 영화가 대박을 쳤다는 소식이 들리면 나는 사무치게 내 촬영장, 내 현장이 그리웠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지만 속 좁은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원통하고 배가 아픈 것이 남의 영화가 대박 나는 것이었다. 특히 그것이 내가 각색에 참여했던 시나리오이거나 심지어 내 손을 거쳤다가 다른 회사로 팔려간 시나리오였을 경우에는 몇 달 동안 미칠 지경으로 아쉽고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가장 듣기 싫은 뉴스가 남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거나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소식인데 그런 뉴스와 기사는 어쩌다 켠 TV에, 미용실에서 기다리다 지쳐 펼쳐 든 잡지에 약 올리듯이 튀어나와 나를 괴롭혔다.

그런 날은 속을 태우며 술을 퍼 마시면서 교수라는 현실에 안주한 자신을 원망해야 했다.

keyword
이전 08화8. 술과 영화와 불면이 만났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