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손을 잡고 눈물로 금주를 결심했고 매일 책상 앞에 붙여놓은 깨진 유리 조각을 보면서 금주 의지를 불태웠다.
이전에도 폭음 끝에 후회하고 몇 번 금주를 시도해 봤으나 오래 못 가고 실패한 기억이 있었다. 금주는 의지로만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대신에 술만큼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있어야 했다. 음주 욕구를 덮어버릴 만큼의 강력한 재미와 보람이 있는 뭔가가 있어야 성공률은 높아진다.
술은 일주일에 이틀 마시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나머지 5일은 퇴근 후 아이들과 아내와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었다. 지금이야 평범하게 보이겠지만 당시로는 늦은 편에 속하는 서른여섯 살의 결혼이었고 그래서 아이들도 연년생으로 서둘러 가졌는데 그래서 나는 아내의 육아를 돕는 게 즐거웠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아이의 보드랍고 따뜻한 살을 만지며 씻기고 옷을 입히는 일을 좋아했다. 힘 세고 무거운 사내아이 둘이라 육아에 지친 아내를 쉬게 하고 나도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좋았기 때문에 집에 일찍 돌아왔다. 마트에 가서 장을 봐다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하거나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워 산책도 자주 했다.
술을 끊은 동안 아이들과 아내와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떠 오른 것이 있었다. 한두 해 전에 아파트 근처 자투리 땅을 얻어서 해 본 적이 있는 주말 농장이었다. 아이들이 어렸지만 흙장난을 좋아했고 나도 씨를 뿌리고 물을 준 땅에 초록색 싹이 움트는 모습을 보는 일은 내 아이를 보는 것만큼이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모두 흙과 초록빛 푸성귀를 좋아했다.
그때 마침 경기도 화성시에서 좀 특별한 주말 농장을 광고하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전원생활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우리 형편에는 어려운 현실이었는데 연세 300만 원을 내면 화성의 서해안 바닷가 백미리에 새로 건축한 20평짜리 목조 주택과 거기에 딸린 텃밭 100평을 1년간 임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에게 딱 맞춤이었지만 문제는 이 주말농장이 다섯 채뿐이었고 희망자는 그것보다 세배쯤 많았다는 것이다. 화성시는 경매 방식으로 입주자를 선정하기로 하고 입찰가를 받았다. 액수를 많이 써낸 5가구를 선발한다는데 한자리에 모여서 눈치를 보아하니 화성시에서 내걸었던 연세 300만 원에서 일이십만 원을 더 쓰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집에서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도 적당하고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니 텃밭 농사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바닷가 갯벌에서도 놀 수 있는 환경이 덤으로 있어서 이 프로그램이 더 탐이 났다. 결국 350만 원을 써낸 우리 가족은 5채 중 하나를 임대받을 수 있었다.
금요일에 수업이 없는 나는 목요일에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백미리 주말농장에 갈 짐을 쌌다. 아내가 미리 챙긴 아이들 옷가지와 우리가 2박 3일간 먹을거리 등을 챙겨 차에 한가득 싣고 떠나면 우리는 한 시간 만에 바닷가 마을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텃밭에서 흙장난, 물장난을 하고 아내와 나는 비워져 있던 집을 청소하고 바비큐 준비를 했다. 주말 농장 경험이 있던 나는 100평 농사가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알고 있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100평 중 50평을 아이들 놀이터로 사용하고 나머지 50평에 감자와 고구마, 고추, 상추, 토마토, 가지, 옥수수를 심었다.
주말농장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물 빠진 갯벌을 산책하고 돌아와 아내와 커피를 마셨고 아이들과 아내가 쉬는 동안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한가로운 오후에는 낮잠도 자고 마을 산책도 하면서 길에 널린 오디와 산딸기도 따 먹으며 아이들은 종일 지치지도 않고 뛰어다니며 놀았다.
참 행복한 시간이었고 술 생각은 까맣게 잊을 수 있었다.
우리와 나머지 네 가구가 입주한 지 몇 주 지나서 마을에서 잔치가 있었는데 마을 이장이 우리를 초대했다. 우리도 마을 주민들과 안면도 트고 인사도 하고 지내고 싶어서 참석했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연거푸 술을 권했다.
먹음직스러운 편육과 윤기가 흐르는 절편, 감칠맛이 눈에도 보일 정도인 홍어회무침, 인근 궁평항에서 잡아온 기름진 생선 구이가 펼쳐진 상에는 그동안 무뚝뚝해 보였던 마을 어른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권커니 잣 커니 하고 있었다. 젓가락을 집어 드는 순간 술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 될 것 같았다. 다섯 가구 대표가 소개를 하고 다들 차려진 음식들을 먹느라 정신이 없을 때 나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이장님에게 다가갔다.
“이장님, 어제부터 설사가 나서 지금 죽도 못 먹고 있어요.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나의 금주는 정말로 성공적이었고 아내도 아이들도 이제 달라진 아빠에게 더 살갑게 다가왔다.
그런데 어느 주말, 아내는 처가에 볼일이 있어서 친정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나도 같이 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금요일까지 마감인 원고가 있어서 밤에 아이들 재워놓고 일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내가 아이들만 데리고 먼저 주말농장에 가서 하루를 보내고 아내는 처가에 갔다가 다음날 오기로 했다가 아내가 대중교통으로 백미리를 찾아오는 것이 번거로워 그냥 처가에서 주말 동안 쉬다가 오는 것으로 했다. 갑자기 아내가 없는 주말이 주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고 아내가 없다는 점만 빼면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만 내 마음은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아내는 주말 동안 아이들과 먹을 반찬을 준비해서 싸주면서 도착 즉시 냉장고에 넣어 둘 반찬을 일러주고 아이들 옷가지를 보여주며 어떤 게 큰애 것이고 어떤 게 작은 애 것인지 알려주었다. 아내의 설명은 귓전으로 넘기고 나는 내가 과연 오늘 밤을 술 생각 없이 넘길 수 있을까 의심했다. 별로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무너질 확률이 높아 보였다. 이제 금주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생각은 ‘다시 술을 마시면 어떡하지’에서 ‘조금만 마시고 자자’는 쪽으로 논제가 아예 바뀌어 버렸다.
아이들은 평소처럼 양치 후 아홉 시에 잠자리에 들어갔다. 아이들 이마에 뽀뽀를 해주고 노트북을 열고 마감 원고를 다시 읽어보고 마지막 검토를 했다. 두 시간쯤 걸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일을 마쳤다. 아이들은 쌕쌕 소리를 내며 곤히 잠들었다. 아내와 통화를 했다. 아내 전화기로 부산하고 흥겨운 처갓집 식구들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오래간만에 친정 식구를 만나서 들뜬 아내와의 통화를 마치고 들여다보고 있던 앉은뱅이책상을 정리했다. 이제부터 내일 아침까지 나에게는 알리바이가 확보되고 행적이 입증된 10시간쯤이 주어진 것이다.
밖으로 나와 걸어서 편의점을 찾은 나는 세상의 모든 편의점이 24시간 오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인적 드문 바닷가 편의점은 불이 꺼진 채 원래부터 계속 폐업 중이기라도 한 것처럼 감쪽같이 인적을 감추었다. 슬리퍼를 신고 나온 나는 반대 방향의 다른 편의점을 방문해 봤으나 역시 문을 닫은 상태였고 발에는 물집이 잡히려고 쓰라리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포기하고 돌아왔으면 좋았으련만 나를 골탕 먹이려는 듯이 입을 맞추어 짠 듯 문을 닫은 가게들에게 약이 올랐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 자동차 키를 찾아 도로로 나섰다.
몇 달 만에 나는 다시 술을 찾아서 헤매기 시작한 것이다. 궁평항 쪽으로 가면 모두 문을 닫았을 것 같아서 아예 도심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10여분을 넘게 도로를 질주한 끝에 멀리서 빛이 보였다. 세상에… 환하게 불을 밝힌 슈퍼가 나타난 것이다.
그럼 그렇지, 이 나라에서 술을 구하는 건 일도 아니지…
다른 술들이 많이 보였지만 무슨 심사에서였는지 나는 그 엄청난 사고를 일으키게 한 막걸리를 집어 들었다.
두 병. 그리고 몇 가지 안주거리들…
이렇게 나는 아내가 잠시 방심한 틈에 생긴 기회를 참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술을 마셨다.
몇 달 만에 잊고 있었던 취기가 기분을 좋게 했다. 아이들이 잠들어서 어두운 스탠드 불만이 켜진 방에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방안을 돌아보는데 자다가 더웠는지 이불을 걷으며 뒤척이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술에 취한 몰골로 아이를 바라보니 한숨이 나왔다.
한숨을 내쉬며 술을 따랐다.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야속한 술은… 달고 또 달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 주말 이후로 외출했다가 술을 권하는 자리가 있을 때 나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아내도 외출에서 돌아온 나에게서 분명 술냄새가 났을 텐데 모른 척했고 나도 술 마시지 않은 척 말수를 줄이고 목소리도 높이지 않고 평소처럼 행동했다.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되면서 주말농장은 아이들이 지내기에는 너무 추워져서 우리 가족들은 주말에 더 이상 농장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조교수에서 부교수 승진 심사에 필요한 논문을 써야 했는데 조용한 주말농장이 작업하기에 좋았다. 아내가 싸 준 반찬거리를 챙겨서 주말이면 참고도서 한아름과 노트북 컴퓨터를 갖고 혼자 주말농장에 갔는데 지나는 길에 슈퍼에 들러 주말 동안 마실 술을 사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녁 늦게까지 자료조사를 하고 원고를 쓰고 수정하다가 밤이 되면 나는 늦은 저녁밥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혼자서 마시는 술이 다시 시작됐는데 이미 내가 백미리 농장에 가 있는 동안 술을 마신다는 걸 알아챈 아내가 싸주는 반찬들도 밥반찬에서 술안주와 국물 위주로 바뀌었고 아침에 먹으라고 싸준 국은 해장용 콩나물국이나 북엇국인 경우가 많았다.
아내는 할 수 없이 용인해 준 것인지, 아니면 내가 예전처럼 과음하지는 않는 것으로 내 술버릇이 양호하게 바뀐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며 나의 음주 재개를 허락한 것인지 별 언급 없이 내가 다시 술을 마시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나는 집에서 마시는 예전의 버릇을 버리고 술은 밖에서 마시고 집에 와서는 조용히 씻고 쉬는 것으로 아내의 허락에 보답했다.
주말 농장은 1년간의 계약이 끝난 후 연장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아이들이 물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라서 여름에는 국립공원 계곡으로 오토캠핑을 다니고 겨울에는 자연휴양림의 숲속의 집을 예약해서 눈 속에 파묻힌 숲 속에서 아이들과 눈사람을 만들고 눈썰매를 탔다.
그때는 아직 오토캠핑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훨씬 전이었는데 우리 가족은 전국의 자연휴양림과 계곡을 섭렵하며 미국에서 직구한 거실용 텐트와 타프를 쳤다. 커다란 웨버 바비큐 그릴에 히코리 훈연 향을 피우며 포크 립을 구워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으면 내가 잠깐잠깐 마시는 캔맥주 한잔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슬쩍 넘어갔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시작한 음주는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홀짝홀짝 마시다가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벌컥벌컥 들이켰고 그러다가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모르는 척했다.
해가 바뀌자 나는 이제 집에서도 가끔씩은 술병을 꺼내서 식탁에 올려두고 마셨고 거기서도 시간이 좀 더 흐르자 이젠 예전처럼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와인을 한두 병씩 카트에 담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마시는 정기 음주가 다시 이어진 것이다. 술을 마셔도 언성을 높이지 않기, 술을 마시고 안 좋은 얘기 꺼내지 않기 등 스스로 룰을 만들었는데 늘 지켜지지는 않았다.
결국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원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내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술을 좋아하고 있었고 그래서 내가 술을 끊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
우울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술을 또 마시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