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까미노를 걷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네요.
전쟁도 막지 못하는 까미노 열정이 여과 없이 느껴집니다.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순례길 루트는 없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프랑스 길>을 걷고 나서는 중세 유럽사를 다시 들춰보게 되었고 스페인사도 궁금해지더군요. 스페인사를 읽다 보니 얽히고설킨 유럽 왕실 씨족 찾다가 결국 다 콩가루 집안이라는 것도 새삼 확인하게 되고요. ㅎㅎ
<은의 길>과 <포르투갈길>은 고등학교 때 읽었던 세계사책을 다시 집어 들게 합니다. 그리스 로마 문명, 알렉산더 동방원정, 한니발 같은 주제들이 등장합니다.
왜 남자는 나이 들면 역사책을 가까이하게 되는 걸까요... 아저씨가 산에 가는 것처럼 저는 유익한 취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얘기 재미나잖아요. 까미노 걸으면서 이 길이 그 길이 구나 하고 생각해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요. 기원전 2, 3세기의 <이베리아 반도> 얘기입니다.
도시 국가로 시작한 <로마>가 야금야금 주변의 폴리스들을 장악하고 나아가서 동쪽으로는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먹고 서쪽을 쳐다봤을 때 <이베리아 반도>에는 <카르타고>가 진을 치고 있었지요.
카르타고는 지금으로 보면 아프리카 <튀니지>와 <리비아> 쯤 되는 지역의 꽤 잘 사는 나라였습니다. 해상무역으로 잘 나갔으니 언뜻 보면 그리스와 비슷한 측면이 있지요.
카르타고가 이렇게 지중해 서쪽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거기까지는 로마가 보아 넘길만했으나 이탈리아 반도와 바싹 붙어있는 <시칠리아>마저도 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으니 로마는 서쪽으로 나가기가 꽤나 어려웠습니다. 당시에 로마는 쑥쑥 성장세를 타고 무서운 기세로 세계의 중심으로 치고 나오는 때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카르타고는 로마의 가랑이를 붙들고 심기를 자주 불편하게 하였으니 카르타고에게는 <한니발>이라는 희대의 명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니발과 카르타고는 외국인 용병을 활용하여 전쟁을 했는데 카르타고의 주력군 중에는 북아프리카 동쪽의 <누미디아왕국>의 기병과 <이스빠니아(Hispania 지금의 스페인)>의 보병들이 있었습니다.
<피레네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당시의 스페인은 아무도 산맥을 넘나들 생각은 하지 못하고 대개는 지중해를 통하여 무역을 했습니다. 당시 스페인의 주요 무역 항구가 현재에도 남아있는 <카디스>와 신카르타고라고 번역되는 <카르타헤나>입니다.
한니발의 카르타고 인들은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스페인을 점령하면서 농산물을 거두고 광물을 채취했는데 카르타고의 농사 솜씨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라 기후가 좋은 스페인과 잘 맞아떨어져 수확량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역시 기후가 좋았던 카르타고 본국의 수확량을 능가할 정도였다니 대단한 수준이지요.
지금도 은의 길이나 프랑스길을 걸어보면 끝도 없이 펼쳐진 올리브 숲과 포도밭이 스페인의 생산성 좋은 토양과 기후를 입증해 주는 것 같습니다.
농산물과 더불어 이들은 스페인 북부 지방의 광산을 개발하여 막대한 양의 은과 철광석을 캐냈습니다. 지금의 프랑스길 북쪽 지역으로 까미노 <북쪽길>이 지나는 대부분의 구간입니다.
그렇게 캐낸 은과 철광석을 지중해 너머 카르타고 본국으로 수송하려면 <카디스> 항까지 옮겨야 하는데 그때 만들어진 도로가 바로 은의 길의 원조격인 <아스토르가-카디스> 구간 도로입니다. 이 도로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세비야에서 출발해서 아스토르가 지나 산티아고까지 걷는 <은의 길> 구간과 겹치는데 사실은 은을 비롯한 광물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할 목적으로 만든 산업도로인 것이지요.
이 구간을 로마가 스페인을 접수한 이후 보수하여 우리가 지금 걸을 수 있는 군사 용도의 은의 길 로마도로 구간으로 만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은의 길을 걷다 보면 로마와의 거리를 표시한 <밀리아리오>, 마일스톤이 자주 보이는데 2천 년도 넘은 이정표이고 그 길은 로마가 닦기 전 이미 카르타고 인들이 만든 도로인 것입니다.
<카르타헤나>는 아직도 그 이름으로 도시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서쪽 해안 <알메리아>와 <알리칸테> 사이에 있는데 카르타고의 스페인 사령부격인 이 요새를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27세의 나이에 한 방에 함락시켜 버립니다.
이때부터 스키피오와 한니발의 대결은 시작되어 <1, 2, 3차 포에니 전쟁>으로 이어지는데 스페인에는 한니발의 동생들이 장군으로 파견 나와 있었습니다. 한니발은 스키피오와 온 로마가 수십 년간 쩔쩔매는 상대였지만 한니발의 동생쯤은 스키피오에게는 적수가 못 되는 껌이지요.
약관의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가 점령하고 있던 스페인 항구 카르타헤나를 사전에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순식간에 뺐어버립니다.
요즘 대학의 단과대로 기원전 지중해 시대 국가를 나누어 본다면 그리스는 <예술대와 인문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고 로마는 <공대와 육사> 쯤이 될 것 같습니다.
로마가 공대인 이유는 도로와 항만, 상하수도 등 어마어마한 토목공사 프로젝트와 대형 극장과 경기장 등 도시 인프라 건설에 일가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잘 만들었으면 2,500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 도로와 극장 경기장을 원래의 용도대로 사용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중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로마는 식민지가 생기면 로마로 이어지는 군사용 도로를 건설했는데 <은의 길>과 <포르투갈길>을 걷다 보면 당시 로마가 건설한 길과 겹치는 부분이 꽤 됩니다.
로마의 도로는 사실 유럽 전역과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로마가 지배한 지역 전역에서 접할 수 있고 상당수의 도로는 아직까지도 상태가 꽤 좋습니다.
은의 길을 시작하면 <세비야>를 벗어나자마자 나오는 <산티폰세>에는 <이딸리까>Italica 유적이 있습니다. 명장 스키피오는 한니발 일족이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헤나를 쳐부순 뒤 본토 수호를 위해 본국 이탈리아로 귀환해야 했습니다. 이베리아를 떠나면서 스페인 속주를 통치할 로마 장교들을 남겨두어야 했는데 그들을 위해 만든 로마군 신도시가 바로 이딸리까 입니다.
가 보시면 알겠지만 꽤 큰 규모의 극장과 경기장, 목욕탕을 비롯한 도심터가 남아있습니다. 한때 로마가 점령했던 유럽 전역에는 대규모 경기장과 극장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던 경기는 <글레디에이터> 즉 검투사들이 벌이는 경기였습니다.
귀족들은 이런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에 지정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시즌 패스>나 <평생 회원권>을 나라에서 준 것이지요. 검투사들의 경기는 지금으로 보면 UFC 경기와 견주어볼 수 있는데 영화에서는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승패가 죽음으로 나뉘는 것처럼 그리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선수들인 검투사들도 다 노예들이 아니라 재능 있는 일반 로마시민도 직업으로써 글래디에이터를 자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스페인을 접수한 젊은 스키피오는 로마 본국으로 돌아가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오는 한니발을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때 한니발은 스키피오와 <1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면서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빼앗기고 스페인마저 뻈겼는데 전쟁을 외곽에서 할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본토에서 치르자는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니발이 감행한 역사적인 군사작전이 바로 <피레네>와 <알프스>를 넘어 육상으로 이탈리아를 쳐들어간 사건입니다.
당시 전쟁에서 <코끼리>는 현대전의 탱크와 같은 역할을 했는데 한니발은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수십 마리의 전투용 코끼리를 끌고 십만 대군과 함께 피레네를 넘고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이쯤 되면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고 외치던 나폴레옹의 피레네 넘기는 한니발에 비할 때 훨씬 수월했다고 볼 수 있지요. 피레네와 알프스가 워낙 방대해서 한니발 군단이 과연 어느 코스로 넘었을지 학자들이 찾아봤는데 아직 밝혀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전문 산악인도 넘기 어려운 두 개의 산맥을 연거푸 넘으며 아프리카에서 온 군사들 중 상당수가 죽고 코끼리도 많이 죽었습니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쪽에서 무서운 기세로 로마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연전연승을 올리며 로마 코앞까지 다가옵니다.
하지만 결과는 역사책에 나오는 대로 스키피오의 승리로 2차 포에니 전쟁은 끝이 납니다. 한니발은 이제 노쇠하고 군대도 일으키기 어려워져서 소아시아로 피신하기에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