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권 수령기

by Chan

미국으로 넘어온 지 3년 만에 영주권을 받았다. 비로소 드디어 정착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막상 받아보니 별 것 아닌 영주권이지만, 그동안 내 마음속 깊은 불안감을 증폭시켜 주는 것에 큰 역할을 해왔다. 아니, 사실 영주권을 받고 나서도 여전히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영주권을 받는 데에 3년이면 주변 사람들에 비해서는 살짝 오래 걸린 편에 속한다. 보통 영주권 신청 전 노동부의 PERM 허가를 받는 게 6개월, 영주권은 운에 따라 빠르면 2-3개월 만에 승인되기도 하고 평균적으로 6개월 정도면 승인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나는, PERM 처리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11개월이 걸려서 허가를 받고, 갑자기 영주권 문호가 닫혀서 또 몇 개월이 지연되더니, 영주권 승인도 1년이 걸렸다.


영주권 승인을 받는 과정도 상당히 찝찝했다. 영주권은 원래 문호라는 것이 열려야 승인을 받을 수 있는데, 문호가 열려있지 않은 상태에서 서류심사가 완료되면 상태가 "Case Remains Pending" (CRP)라는 것으로 바뀌고, 문호가 열리자마자 바로 승인이 된다는 루머가 있었다. 그런데, 문호가 열리기 딱 열흘 전, 내 영주권 신청의 상태가 CRP로 변경되었다. 환호했다. 아, 열흘뒤면 나도 드디어 영주권자가 되겠구나.


하지만, 열흘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내 영주권은 승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개월이 흘러 이민국이 영주권 쿼터를 다 소진했다며, 문호를 다시 닫아버렸다. 허탈했고 어이도 없었다. 문호가 닫히기 전, 혹시나 내 서류가 어느 서류더미에 묻혀서 심사관들이 못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연락도 많이 넣어보고, 영주권 신청에 연계되어 있는 여행허가와 근로허가신청에 대한 급행 신청도 해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다시 문호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영주권이 승인되었다. 문호가 닫혀있었음에도 승인되었다. 찾아보니, 나와 같은 케이스들이 정말 많았다. 다들 혼란이었다. 지금까지는 가끔 이런 일이 발생한 적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이민국의 실수여서 영주권을 다시 회수해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승인이 되었고, 대부분이 CRP상태였다가 문호가 열렸음에도 영주권 승인을 받지 못했던 나와 같은 케이스의 사람들이었다. 이민국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뻔하다. 그동안 해온 행적으로 볼 때는 정말로 잊혀진 서류들을 발견하고, 늦었지만 비자쿼터를 낭비하기 싫어서 부랴부랴 승인했겠지.


정말 애매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는 이런 경우 이민국에서 영주권을 회수해 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내 영주권을 언제 다시 뺏어가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얼마 후, 회사 변호사로부터도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이민국의 실수인 것 같으니, 영주권이 곧 취소될 확률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또, 얼마 지나서, 같은 케이스의 다른 직원들을 많이 발견해서, 이민국에 문의를 넣어보겠다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이민국으로부터 어떤 공식적인 답변을 받지 못했다. 지금은, "아직까지도 취소를 안 했으니 정상적인 승인이었겠지" 생각하며 그냥 살고 있다.




영주권을 기다리는 동안 한참 격변의 코로나 시기를 겪다 보니 조금 힘들었다. 뜬금없이 IT기업들의 호황으로 잡마켓이 활발해지던 시절에는, 연봉이 너무 적다며 투덜대던 동료들이 하나둘씩 연봉을 두 배씩 올려가며 다른 회사로 이직해 갔다. 어떤 친구는 영주권이 나오기도 전에 미리 다른 회사에 합격해 놓고, 영주권이 나오자마자 퇴사한 친구도 있었다. 나 혼자만 뒤쳐지는 느낌이 들어서 너무 불안하다가, 좀 더 하고 싶던 일로 팀을 변경해서 새로운 일들을 배우니 다시 좀 괜찮아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경제가 급속도로 얼어붙을 때는 모든 회사들이 정리해고를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 종속된 비자를 가진 나는, 정리해고는 곧 미국에서의 추방을 뜻했기 때문에 더욱 불안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그저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행히도 같은 팀 안에서 해고된 동료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나는 아니겠지 하며 무시하고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영주권을 받은 지금도 아직 불안하다. 물론, 언제 취소될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한 것도 있지만, 영주권이 있음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함 인 것 같다. 당장 이직하면 올릴 수 있는 연봉을 생각하면, 그리고 한국에서 입사했기 때문에 더욱 낮은 현재 연봉을 생각하면, 이곳에 남아있는 게 바보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도, 괜히 이직했는데 갑자기 영주권이 취소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 현재 하는 일이 내 평생 하고 싶었던 일이라는 아쉬움이 충돌하여 머뭇거리게 되고, 그렇게 영주권을 받았음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사실에 불안하다. 사실, 지금은 잡마켓이 그닥 좋지 않아서 옮기고 싶다고 옮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도 하다.


어쩌면 이 불안함 들은 애초에 영주권과 상관없었을 수도 있다. 내가 애초에 영주권자였다면, 아니면 한국에서 계속 살았으면, 잡마켓이 좋을 때 제때 이직해서 행복하게 살았을까. 아니면 잡마켓이 안 좋아 다들 정리해고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한국이었다면 좀 더 마음이 편했을까. 잘 모르겠다. 아마 나는 돈보다는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며 계속 머물렀다가 후회하고 있었겠지.


어찌 되었든 정착에 마침표를 찍었으니,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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