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이든 금방 빠져들고, 쉽게 질리는 성향을 지녔다. 아마 ADHD의 영향이 아닌가 싶지만, 너무 오랫동안 이렇게 살아온 덕분에 그냥 내 성향이 이렇겠거니- 하고 받아들이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렇기에 구매 충동이 드는 물건을 한 번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1주일은 묵혀보자고 결심했는데, 대개는 3일도 안 가 그것을 구매하거나 1달이 넘게 장바구니에 묵혀 두는 것이 기본이다. 구매 충동이 들 때는 구매를 고민하는 것이 너무 괴롭고, 일정한 정도를 지나면 고민하는 것조차 질려버리기 때문이다. 나도 나의 이런 면이 참으로 어이없기도 하지만 때로는 쉽게 질려버리는 나의 특성이 가끔은 지갑을 수호해 주기도 하기에 나름 고마울 때도 있다.
그렇기에 나는 물건 하나를 고민할 때도 어색하게나마 꼼꼼히 살펴보고, 여러 번 고민한다. 고민하는 것이 괴로워질 정도로 말이다. 특히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리셀이 가능할 만한 물건인가?’인데, 후에 내가 질렸을 때 자리차지하는 물건을 쉽게 처분하기 위함이다. 한 때 애정을 지녔던 물건은 버리기는 아까울 때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굿즈의 경우 내 손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굿즈는 가치가 일정하지도 않거니와, 흥미를 잃었을 때 가장 처치가 곤란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굿즈는 실사용보다는 전시에 목적을 둔 것이 많기 때문에 자리 차지가 제일 큰 물건이기도 하다. 특히 가성비를 끔찍하게 따지는 나는 굿즈를 안 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인정한다. 지난 장르의 굿즈들은 결국 예쁜 쓰레기가 될 뿐이니까... 나의 경우 지나온 장르들을 청산하면 책장 한 칸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데도 이것들을 처치하지 못해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 덕후들이 굿즈를 사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그냥 팔길래’ 라는데, 아무래도 덕후들을 타깃으로 한 굿즈와 실용성과 가성비를 중시하는 나의 성향이 안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리보고 저리 봐도 안 맞는다. 어쩌면 덕질이라는 것이 나와 잘 맞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덕후판에만 10년 이상 몸 담은 자로서 내 인생과 덕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미지근할지언정 절대로 차가워지지는 않는 것이다. 어떨 때는 사람, 어떨 때는 애니메이션, 어떨 때는 게임... 여러 장르를 거치고 거쳐 결국 정착하게 된 곳이 이곳이다. ADHD를 치료하기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이를 찾기 위해 SNS 계정을 만들고, 인터넷 친구를 사귀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관심사를 기반으로 만난 친구들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더라도 내적으로 친밀감이 생기게 된다. 덕후는 ‘좋아하는 마음을 기반으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좋아하는 마음을 곁들여 인터넷 친구에게 선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 내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다.
‘나눔 이벤트’라는 것이 있다. 내가 만들거나 구매한 것을 조건 없이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는 인터넷 친구가 대상일 때도 있고, 불특정 다수가 대상일 때도 있다. 특히 이런 이벤트의 경우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행해진다. 나의 경우, 이번에 처음으로 이벤트를 열어보았는데 이벤트를 열기 위한 명분은 충분했다. 우리가 모이게 된 계기, A군의 데뷔 N주년이라는 것이다.
A군을 향한 나의 일방적 사랑이야기는 조금 긴 편이니 넘어가더라도, 내가 그의 N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는 말할 수 있다. 바로 ‘자작 굿즈 나눔’! 평소 무언가를 꼼지락거리며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드디어 내가 만든 결과물을 타인에게 나눔 했다. 멀리서 봐도 조잡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한 땀 한 땀 손을 움직여 만들어낸 나의 굿즈들을 보면 괜스레 뿌듯해진다.
놀라야 할 포인트는 이곳에 있다. 아니, 가성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가 ‘굿즈’라는 것을 직접 만들었다고? 심지어 이것을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들였고, 배송비까지 전부 내가 부담했다! 이전의 나라면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일이다.
작은 것이라도 흔적을 남기기 싫어했던 내가, 이렇게 무언가를 만들어 남기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왜 이렇게까지 하나?라고 묻는다면 그저 ‘좋아하기 때문에’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그렇다. 이외에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대상 때문에 삶이 바뀌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 변화가 있었음은 확실하다. 좋아하는 것 덕분에 삶에 활력이 생기고 생산적인 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삶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면, 아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인해 삶이 달라진 것일 테다. 이런 변화가 어색하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에 달갑기도 하다. 돈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그리고 내가 뿌듯함을 얻는 정도만. 그런 소소한 것으로 내 삶을 채워나갈 수 있다면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괜찮다. 내 삶이 조금씩이라도 긍정적으로 바뀌게 된다면 정말 그걸로 된 것이 아닐까? ‘덕후’를 향한 시선이 어떻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