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가 그려진 종이에 콕콕 찍힌 붉은 도장이 강렬한 빛을 띠었다. 벚꽃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니 꽤 ‘감성’을 지닌 사진 같아 보였다. 아름다운 사진에 의미까지 담겨있다니, 이건 작품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 아니야? 시시덕거리며 빨리 오라는 엄마아빠를 따라 길을 걸었다. 아침 7시의 일이었다.
내가 참여한 투표는 이번이 두 번째로, 첫 번째 투표는 대선이었다. 갓 20살이 되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새벽같이 엄마아빠와 함께 사전투표소를 찾아갔었다. 그리고는 가슴에 품은 주민등록증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밀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 투표도 그랬다. 대선 투표 때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투표를 처음 하는 사람인 양 어리바리하게 투표를 마치고 나왔다. 나와 비슷하게 투표소로 들어갔던 엄마 아빠는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경력자는 다르다는 건가... 아니, 나는 나중이 되어도 어리바리하게 헤멜 것이 분명했다. 연 단위의 행사라니, 진작 까먹고도 남을 기억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번 투표에서는 온 가족이 나와 새벽같이 사전투표를 마친 후 24시간 해장국집에서 국밥을 먹고 들어왔다.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이번에도 그렇게 하려나 싶었는데,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동생이 잠을 이겨내지 못하고 계속 자는 모습에 투표만 하고 들어왔다.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노리기 위해 새벽같이 눈을 떠 아침 일찍 사전 투표소에 다녀온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눈으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눈 후 너나 할 것 없이 바로 두 번째 잠에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수요일의 휴일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수요일은 제법 빨리 찾아왔다. 늦게까지 퍼질러 자려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주말 같다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그 주말은 이틀만 지나면 또 찾아온다는 생각을 하니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들이 괜히 주 4일제를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을 먹고 포털사이트에 들어가니 투표율 계산이 한창이었다. 나는 바로 메신저 앱을 켜 친구들이 함께 있는 단체 메시지 방에 들어갔다.
“투표했어?”
‘ㅇㅇ’
짧은 대답들이 날아왔다. 그 안에는 내가 투표를 꼭 해야 한다며 큰 소리를 냈던 친구도, 다 싫어서 아무나 뽑았다길래 화낸 친구도 있었다.
그렇게 6시가 지났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투표율 계산 페이지를 계속 새로고침했다. 사전투표율이 합산되어 집계된 수치는 꽤 높았다.
7시가 넘었다. 방송들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이번 개표방송이 기대되었다.
첫 투표 때도 그랬지만, 내가 참여한 한 표가 방송에 반영된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굴 뽑았는지를 떠나 누가 될지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혈압도 같이 오르지만 말이다.
내가 뽑은 사람이 된다면 참 좋은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참 씁쓸한 일이다. 그것도 근소한 차로 낙선한다면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한 표 한 표를 소중히 행사했고, 도장을 꾹 눌러 찍었던 것 같다.
부끄럽게도 사실 나는 정치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없다. 누군가 말했듯, 젊은 사람들에게는 정치 이외에 더 관심을 가질 만한 재밌는 것이 넘쳐나는 세상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한 표를 행사했고, 관심이 없어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위 사람에게 투표를 호소했다, 젊은 사람일수록 정치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투표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투표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비슷할 것이다. 내가 사는 세상을 조금 더 편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 나도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조금 더 편하고 따뜻해지길 바라는 염원을 담아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었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만연한 이 세상은 ‘나만’ 살아가는 데에 유리해지고, 그 방법이 세상을 조금 더 나쁘게 만든다고 해도 어떠한 사람들은 그것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표를 막기 위해 내 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설사 내 한 표가 다른 사람의 표를 막는 데에만 쓰일지라도, 세상의 상황이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은 너희를 사람으로 보지 않아. 표로만 보지.”
맞는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신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이에게 표를 주기 싫다고 투표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런 태도를 취하니 더욱 내 한 표의 무서움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나를, 우리를 인식하고 ‘우리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줄 테니까 말이다. 우리의 눈치를 보고,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과 복지를 내놓을 테니까.
나는 이번 선거로 인해 많이 화를 내고, 많이 웃었으며, 엄마 아빠와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또한 개표방송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기도 했다. 앞으로 내가 겪을 또 다른 선거들에 비하면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이기에 금세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의 한 표의 중요성은 내 안에서 계속 쌓여가 점점 더 소중함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