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 2. 여자가 너무 좋은 그 사람

그럴 거면 여자로 태어나지 그랬어요

by 채널김

이성에게 호감을 갖는 일은 아주 자연스럽다.

상대방의 외모나 성격, 재력 등 매력적으로 보이는 요소는 아주 다양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번에 여러 이성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을 그다지 좋게 볼 수 없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이 결혼까지 했을 경우에는 말이다.




프리랜서로 전향하게 되면서 여기저기 전전긍긍하다 처음으로 괜찮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규모가 꽤 큰 프로젝트였기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간도 10개월이나 되었다.(그전까지는 보통 3개월 단위로 일했다) 프리랜서에 발을 들이면서 여기에서 가장 많은 인연들을 만났고, 지금까지도 그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힘든 프로젝트였지만 좋은 사람들이 많았기에 즐겁게 다닐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프로젝트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얼굴이나 이름을 다 알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디에서든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내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사람도 그런 위치에 있던 인물이다.


그는 전체 상황을 관리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다.

40대 후반의 그는 싹싹한 성격으로 본인보다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잘 챙기면서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갔다. 겉으로만 보면 꽤나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본성은 오래가지 않아 드러났다. 좋지 않은 소문은 정말 순식간에 퍼지는 법. 어느 순간 여직원들 사이에서 불쾌한 기류가 흐르는 날이 많이 졌다.



"어제 매니저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옆에 딱 붙어서 설명하더라니까? 꼭 그렇게 가까이 와서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난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 건 줄 알았어"


"은근슬쩍 손이나 어깨 터치하는데, 난 처음엔 그냥 실수인 줄 알았어"


"사람 부를 때 이름으로 부르면 되지 왜 자꾸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는 거야? 참내!"


하나의 제보가 터지자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 경험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공통적으로 겪는 느낌은 '불쾌감'이었다. 반복되는 그 행동들이 우연이 아니라 '노린 것'이라는 걸 알게 된 직원들은 조금씩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점심을 먹을 때도 항상 여자직원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다. 회식 때도 늘 '여직원' 옆자리에 앉아있는 그를 본 건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남자 직원들과는 술자리에서 음담패설을 스스럼없이 해 점점 불편해하고 있었다. 뭐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을지 모른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어디선가 봤던, 피하고 싶은 그런 사람인 것이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나와 가까이에 있었다는 점이다.




프로젝트가 중간쯤 지났을 때,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여직원이 새로 들어왔을 때였다. 그 여직원은 막내답게 여기저기서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스무 살의 그 느낌처럼 싱그러운 에너지를 발산하며 주변을 환화게 했다. 일은 조금 서툴렀지만 이제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했으니 다들 그러려니 하면서 어느 정도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같은 팀원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삼겹살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2차로 가볍게 맥주나 한 잔 하려고 자리를 이동했다. 회사 근처의 식당들은 늘 직장인들로 북적였다. 이야기 꽃을 피워볼까 해서 번잡한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골라 찾아갔다.


그리 크지 않은 맥주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들어올 땐 눈치채지 못했지만 우리의 눈에 익은 두 사람이 보였다. 매니저와 그 막내직원이었다. 무슨 회식인가 싶었지만 테이블엔 단 둘만 자리 잡고 있었다. 매니저는 무슨 이야길 신나게 하는지 말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막내는 공손히 두 손을 모은채 얌전히 앉아 경청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가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매니저가 우리 테이블로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니, 다들 어떻게 모였대?"

"저희끼리 그냥 한 잔 하려고요. OO님(막내직원)이랑 같이 오셨나 봐요?"

"어~ 아 막내가 여기에 너무 적응을 못 하는 거 같아서~ 좀 알려주고 밥도 사줄 겸 왔지"


그걸 왜 매니저님이 알려주지?

나와 일행들은 얼토당토 않은 그의 핑계에 할 말을 잃었다.

'그냥 어린 여자랑 밥 먹고 싶은 거잖아..'

다들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매니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막내가 너무 가엾었다.



그때 함께 온 팀장님이 말을 꺼냈다.

"이렇게 만났는데 같이 모여서 마실까요?"

갑자기 치고 들어 온 제안에 매니저는 잠깐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오케이를 외쳤다. 매니저와 함께 먹는 건 싫지만 막내를 구하려고 팀장님이 나선 걸 알기에 우리 모두 조용히 동의했다.


어색한 대화를 오갔지만 매니저는 의도적으로 막내에 대한 이야기만 꺼냈다.

'일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다 나한테 물어봐라'

'먹고 싶은 거 있을 때마다 나한테 말해라'

'OO이는 이런 치마 잘 어울리네?'

많이 취한 걸까? 우리가 같이 있는 건 잊은 모양이다. 막내는 눈치를 보며 쩔쩔맸고, 우리는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까 했지만 매니저의 집착은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러다 팀님이 이제 정리하는 말을 던졌다.

"이제 늦었는데 집에 갈까요?"

매니저가 곧장 받았다.

"아 그러네?OO이는 택시 타는 데까지 데려다줘야겠지?"

끈적한 눈빛의 매니저는 '님'자도 안 붙이고 막내를 자기 애인인 양 계속 이름으로만 불러댔다.


"매니저님 어서 집에 가셔야겠네요. 사모님이 걱정하시겠어요."

그 말에 매니저는 가늘게 한숨을 쉬더니 못마땅한 말투로 말했다.

"뭘 걱정해! 알아서 집에 잘 들어가는 성실한 남편이야 나는."

그래, 성실하게 여자 꽁무니만 쫒는 건 알겠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팀장님이 또 나섰다.

"OO님 나가요. 내가 택시 타는 데까지 같이 가줄게. 다들 내일 봐요!"

막내도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어쩐지 나쁜 용이 사는 성에 갇힌 공주를 구출한 기분으로 자리를 정리했다.


다음날 매니저가 거의 딸 뻘이나 되는 여직원과 둘이 밥을 먹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다들 저 뻔뻔하고 변태 같은 양반이 고개를 못 들고 다니길 바랐다. 그렇지만 얼마 뒤 회사를 그만둔 건 그 막내였다.


그녀가 한 일은 그저 밥을 사주겠다 하니 거절하기 어려워 따라간 것뿐이었는데 사람들의 화살은 그 막내에게만 향했다.

"걔가 꼬리 쳐서 매니저한테 밥 얻어먹은 거라며?"

"나는 처음부터 조금 영악한 거 같았어"

"아니 밥 먹자고 거길 덜컥 따라가냐?"


그때서야 알았다.
우리가 한 일은 ‘구출’이 아니라, 구경꾼의 '자기 위안'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매니저의 집요한 시선을 한 번쯤 막아냈다고 믿었고,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이 업계를 떠난 건 집착하던 그 남자가 아니라, 집착받던 그 막내였다.


그 자리에 있던 우리도 불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정의 실현 한답시고 했던 행동이 그 막내를 더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서 말이다. 그 매니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남아 있었다. 여전히 여자들에게 불쾌한 집착을 날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이 업계 어딘가에서 ‘능력 있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살아가고 있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