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도 치매가 찾아왔다

기둥이 무너진 날

by 채널김

"아빠 치매 맞대"

동생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진행한 검사 결과가 이제야 나왔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확인하듯 듣고 나니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치매라는 병은 오래전부터 ‘노망이 났다’ 거나 ‘벽에 똥칠을 한다’는 식의 부정적인 말과 함께 이야기되곤 했다. 뚜렷한 치료법도 없고, 정확한 원인도 모른다는 점이 더 두려웠다.


엄마는 암으로 무려 10년을 버텼다. 그 긴 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견딘 사람은 아빠였다. 나이만 먹고 철없는 자식 놈들은 제 인생 살기 바빴다. 엄마가 걱정이 됐지만 막연히 곧 좋아지겠지, 생각했다.


병원에서 엄마에게 시한부 판정이 내려졌을 즈음, 그제야 아빠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아 엉뚱한 표현을 쓰고, 어제 들은 이야기를 금세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엄마였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준비하느라, 아빠의 이상 신호는 자꾸만 뒤로 밀려났다.


엄마가 떠나고 장례와 정리를 마친 뒤에야 우리는 아빠의 치매 검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결과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그렇구나'라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잘 걷고, 잘 먹고, 대화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냥 조금 깜빡하는 정도겠지, 요즘은 약도 잘 나온다니까 진행이 느리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가족 중 누군가 아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마음이 너무 지쳐 있었다. 걱정보다는 원망이 앞섰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다니더니 결국 이렇게 됐네.’

내 생각 속에서 모든 잘못은 아빠에게로 향했다.




난 당신이 싫어요

돌이켜보면, 내 어린 시절의 아빠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그 시절에는 아빠가 밖에서 돈을 벌고 엄마가 집안을 돌보는 가정이 흔했다. 그렇다 해도 아빠는 유난히 가정에 무심했다. 나에게 칭찬보다는 조금만 잘못해도 크게 혼을 냈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모습도 자주 봤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아빠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엄마는 가정을 위해 애썼지만, 아빠는 그런 엄마를 존중하지 않는 듯 보였다. 능력은 부족하면서 욕심과 허영심은 컸고, 여기저기 일을 벌여놓고는 수습을 엄마에게 맡겼다. 엄마의 한숨은 늘 길었고, 나는 그 한숨을 들으며 자랐다.


나와 동생이 커서 독립한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렵게 잡은 가족 모임 자리에도 “약속이 있다”며 빠지기 일쑤였다. 가족보다 남이 우선인 사람처럼 보였다. 엄마와 동생, 셋이 밥을 먹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빠가 미웠다. 왜 우리에게는 늘 뒷순위였을까.


그렇게 제멋대로 살던 사람이 이제 치매라니. 마음대로 살 거면 적어도 건강하기라도 하지.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언젠가는 보호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치매에 대해 찾아볼수록 희망적인 이야기는 드물었다. 대부분은 점점 무너져 가는 과정과 남겨진 가족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점점 냉정하게 만들었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

더 큰 충격은 반년 뒤에 찾아왔다. 치매 진단을 받았지만 아빠는 아직 혼자 생활이 가능했다. 당분간은 시골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같은 동네에 사는 고모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큰일이 났다고 했다.

퇴근하자마자 급히 내려가 보니 친척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고모는 말없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토지 매매계약서]


아래에는 분명 아빠의 이름과 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전세 계약서 말고는 부동산 계약서를 본 적이 없었다. 집도 아닌 토지 매매라니. 글자를 읽고는 있었지만, 무엇이 잘못된 건지 한 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고모는 이 계약이 사기라고 했다. 아빠가 속아서 집과 땅을 모두 잃을 상황이라는 것이다. 사기꾼에게 제대로 걸린 셈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엄마의 죽음, 아빠의 치매, 그리고 이제는 사기까지. 악재가 겹치자 머리가 멍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무엇부터 해결해야 하지? 생각은 많았지만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자신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닫고 벌벌 떨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은 내가 알던 아빠와는 전혀 달랐다. 늘 고집 세고 자기주장이 강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작고 초라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또 다른 감정을 느꼈다. 분노도 원망도 아닌, 막연한 두려움이었다. 약해진 아빠가 무서웠고, 언제든 우리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 종이 한 장이 무서웠다. 아마도 그 해는 내가 살면서 가장 많은 충격을 겪은 해였을 것이다.


그 이후로 우리 집의 평화는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짐이 집 안 공기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무도 쉽게 웃지 못했고, 각자의 걱정을 속으로만 삼켰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빠를 미워하는 것과, 아빠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