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보이는 남자
그들의 생각, 아니 글자가 보이기 시작한 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그 만화책을 본 이후로 사람들의 머리 위에 말풍선이 보인다.
난 지난달 이곳으로 이사 왔다.
혼자 사는 남자의 살림살이는 너무 간소하다.
이삿짐센터도 부담스러워 용달차를 부르고 기사님과 짐을 같이 옮기며 이사를 마쳤다. 기사님을 보내고 며칠간 혼자 짐을 정리했다.
옷을 정리하는데 두꺼운 겨울옷 사이에서 그 만화책이 나왔다. 내 것이 아니었다. 제목조차 없고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도 몰랐다. 많은 사람이 본 탓일까. 책 안쪽의 색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만화책의 내용은 시시하고 재미없었다.
어떤 사람의 일대기를 따라가듯 장면이 이어졌지만 밋밋했고, 웃기지도 감동스럽지도 않았다.
지루함을 못 이기고 절반만 보고 덮었다.
이직을 앞두고 이사까지 겹쳐 피곤한 하루하루였는데 그날도 이삿짐을 다 정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다음 날, 여느 때와 다르게 상쾌한 기분으로 눈이 떠졌다. 늘 피곤했는데 오랜만에 잘 잔 것 같았다. 바람도 쐴 겸 커피나 마실까 하고 집 앞을 나섰다.
“어서 오세요.”
아르바이트생이 인사를 하고 곧장 다른 일로 사라졌다. 아이스커피를 받아 창가에 앉았다. 유리창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여자의 머리 위에 하얀 말풍선 같은 것이 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 귀찮아... 빨리 집에 좀 가자, 보리야... 오늘은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글자는 실시간으로 미세하게 형태를 바꾸며 흘러갔다.
“저게 뭐야...?”
나는 커피를 뿜을 뻔했다.
혹시 요즘 유행하는 증강현실 같은 건가 싶어 눈을 비볐다. 그러나 건너편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머리 위에도, 뛰노는 아이들의 머리 위에도 하얀 말풍선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꿈이겠지.’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고 눈을 감았다 떴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왔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잠그고 벽에 등을 붙인 채 한참을 서 있었다.
‘내 정신이 이상해졌나?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슬그머니 거울 앞에 서 보았다.
이상하게도 내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건 정말 꿈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빨리 잠들고 다음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음날 눈을 뜨고 다시 창밖을 내다봤을 때 또 한 번 서늘한 기분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볼 수 있었다.
회사로 가는 길, 엘리베이터 안, 지하철 플랫폼, 회의실. 사람의 수만큼 하얀 말풍선이 떠다녔다. 누군가는 욕을, 누군가는 불안을, 누군가는 비밀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숨소리처럼 자연스럽게 흘렀다.
견디기 어려웠다. 특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사람의 얼굴보다 말풍선을 먼저 보게 되었다. 그들의 표정은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 위에 떠 있는 글자가 진짜였다. 나는 그 글자에 빠르게 중독되었다. 타인의 가장 내밀한 독백이 투명하게 보였다.
지겨움, 혐오, 애정, 절망. 어느 것도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모두가 종이 위에 그려진 잉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날, 거울 앞에 선 나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말풍선이 내 머리 위에도 떠 있었다.
‘내 생각이 보이잖아?’
그 한 문장을 나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생각하기도 전에 글자는 먼저 떠오르고, 생각이 따라갔다. 나 또한 만화의 한 장면처럼 말풍선이 계속 떠 있었다.
'만화... 그래! 만화!'
한동안 잊고 있었던 만화책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날 밤, 나는 다시 그 만화책을 펼쳤다. 절반만 읽고 덮었던 그 책. 남은 부분을 확인해야 한다는 강박이 들었다. 어디선가 반드시 답이 이어질 것 같았다.
책장을 넘겼다.
익숙한 장면이 나왔다.
낯선 도시로 이사 온 남자.
혼자 사는 간소한 살림.
옷장 속에서 발견된 제목 없는 오래된 만화책.
절반쯤 읽고 잠든 남자.
그리고 다음 장면.
[그는 다음 날부터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말풍선을 보기 시작했다.]
손이 굳어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숨이 막혔다. 그 만화 속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나를 닮아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계속해서 장면을 넘겼다.
카페, 강아지 산책, 담배 피우는 남자, 아이들.
그리고 “꿈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까지, 모두가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두고 책장은 공백처럼 비어 있었다. 연필로 그려지다 만 듯한 희미한 선과, 시작하다 지워진 말풍선의 흔적들.
그때, 방 안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아니, 조용해진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의 소리가, 누군가의 시선이, 내 쪽으로 수렴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 순간 내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등이 투명해졌다. 스케치 위의 지우개 자국처럼 내 몸의 윤곽이 희미해졌다.
“잠깐만.. 난... 나는 진짜잖아.”
그러나 생각보다 먼저 말풍선이 떠올랐다.
‘나는 진짜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살아 있다.’
글자는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삐뚤어진 선으로 긁히며 천천히 지워졌다.
누군가가 나를 지우고 있었다.
아니, ‘작가’가.
나는 마지막 힘으로 책을 내려다보았다. 빈 페이지 위에 연필로 적힌 작은 문장이 하나 남아 있었다.
[오류 발견. 주인공이 자각함. 삭제 진행.]
발밑이 사라졌다. 방의 모서리가 직선에서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책도, 바닥도, 커피잔도, 모두 종이처럼 얇아졌다. 세계가 한 장의 만화책 속 칸으로 접혀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소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내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말풍선만이 떠올랐다.
‘지우지 마.’
그 마지막 한 문장은, 끝까지 지워지지 않으려고 버텼다. 번져서 얼룩이 되었고, 마침내 한 줄기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주인공이라고 믿어왔던 모든 것이, 이미 누군가의 펜 끝에서 한 번 정해진 이야기였다는 것을. 내가 느낀 상쾌한 아침도, 우연히 발견한 만화책도, 이 깨달음조차도.
모든 것은 이미 그려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사라졌다. 선이 지워지고, 색이 걷히고, 말풍선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만화의 빈칸이었다.
그리고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의 펜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사라지는 나의 의식 끝에서, 한 줄의 문장이 새로 적혀 들어왔다.
[ 다음 주인공, 설정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