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에서의 출가자의 삶에는 꽤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다고 해서 특별한 의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한번은 로스앤젤레스 도심으로 선명상 수업을 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때가 11월이었는데, 어떤 백인이 승복 차림의 저를 보더니 할로윈 의상이 훌륭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들어 보였습니다.
반면 출가 후 한국에 왔을 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저에게도, 단지 스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이 윗사람 대하듯 공손히 대했습니다. 사실 그런 대우를 받을 때 마음속에서 오만함이 올라오는지 살펴보고 점검하는 것 역시 수행입니다.
환경은 다르지만, 그만큼 수행의 어려움도 각기 다릅니다. 미국에서는 출가자라고 해서 더 아는 척하거나 특별한 존재인 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의견은 자유롭게 오가고,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바로 드러납니다. 스님의 말이라고 해서 싫은 말을 참고 듣지 않으며, 동의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위앙종 도량에서는 스님과 재가인이 함께 수행합니다. 재가자들이 더 정진할 수 있도록 스님들이 청소하고 밥을 준비하는 일도 흔합니다. 재가인이 열심히 정진하면, 그 모습에 자극을 받아 스님들도 더 치열하게 수행하게 됩니다. 스님들은 하루 스물네 시간, 일 년 삼백육십오 일 동안 재가인의 눈과 귀에 노출되어 있어 숨을 곳이 없습니다. 추한 모습이나 못난 마음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재가인이 스님에게 지적하거나 모욕처럼 느껴지는 말을 던질 때도 있는데, 그것을 참고 견디는 일 자체가 수행이 됩니다.
어떤 환경이든 바른 스승을 만나 수행하면 더 빠른 진전이 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출가하면 무조건 재가자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출가는 분명 수행에서 더 빠른 진전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체계입니다. 그러나 출가만이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재가 수행자가 깨닫는 경우도 불교 역사에는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방거사(龐居士)입니다.
하지만 출가 수행은 분명한 이점을 지닙니다. 깨달음으로 나아갈 기회가 많기 때문입니다. 재가인의 삶은 본래 자신의 즐거움과 욕망을 중심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반면 출가인의 삶은 번뇌를 여의고 반야지혜를 열 수 있도록 설계된 삶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는 단계는 문자반야(文字般若)라 합니다. 이는 씨앗을 뿌려둔 것과 같아 아직은 열매를 맺지 못한 상태입니다. 올바른 씨앗을 심는 일은 중요하지만, 문자반야만 붙잡고 이해했다고 믿는다면 착각입니다. 그것은 아직 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화상인과 영화 스님 모두 참된 지혜가 없다면 법을 설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수행, 곧 관(觀)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관조반야(觀照般若)입니다. 좌선, 절, 염불, 진언 수행은 모두 관조반야의 모습입니다. 예컨대 진언을 외우다 보면 갑자기 ‘만두가 먹고 싶다’거나 ‘쉬고 싶다’는 잡념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그때 왜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지 스스로에게 묻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관입니다.
자신의 탐욕과 분노, 교만과 우울을 직면하고 잘라내야 합니다. 타인의 허물을 들여다보는 것은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혜는 자기 안의 탐·진·치를 보는 데서 비롯됩니다. 누구나 자신의 추한 모습을 직면하기를 두려워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만 정화가 일어나고 관조지혜가 싹트게 됩니다.
각 단계의 선정마다 끊어내야 할 번뇌는 다르며, 그것을 해결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는 여러 층위가 있고, 수행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수행법은 우리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남겨준 자비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