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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안 XianAn 스님 Jan 16. 2022

보시 바라밀 Giving Paramita

미주현대불교 2022년 1월 호

2022년 1월 호 [현안 스님의 아메리칸 육바라밀] 제1편

보시 바라밀 Giving Paramita

출가 전 『미주현대불교』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벌써 3년 전 일입니다. 그동안 주로 참선과 수행 경험담에 관한 글을 썼는데, 올해는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 육바라밀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분이 불교 공부를 하셨다면 육바라밀이 무엇인지 잘 아실겁니다. 그리고 당연히 육바라밀에 대한 설명은 이미 많이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저는 굳이 왜 육바라밀에 대한 글을 쓰려는 걸까요? 

저는 지금까지 해왔던 전통적인 동양적 방식에서 벗어나 서양 문화와 교육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해서 글을 쓰고자 합니다. 제 스승인 영화 선사는 지난 15여년간 미국인과 서양문화에 익숙한 현대인을 위한 법문을 하고 계십니다. 저는 스승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토대로 한국인을 위하여 『아메리칸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연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대승의 뿌리가 깊은 한국인들에게 이 연재물이 수행과 일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바라밀은 산스크리트어로 “파라미타(Paramita)”라고 부르며, 이는 “피안에 도달하다”라는 뜻입니다. 그건 하는 일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완전히 끝내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부처가 되겠다라고 결심했다면, 성불이 바라밀입니다. 박사학위를 얻을 것이라 결심했다면, 그 학위를 얻는 것도 바라밀입니다. 이 단어 파라미타 또는 바라밀은 중국어로 “보루미”라고 부르며, 중국어로 “보루”는 파인애플이고, “미”는 꿀입니다. 그래서 바라밀의 과실은 파인애플보다 달콤합니다. 

여섯개의 바라밀 수행 중 첫번째가 바로 “보시바라밀 Giving paramita”입니다. 보시바라밀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재시(財施) 즉 재물을 주는 것, 법시(法施) 즉 법을 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외시(無畏施) 즉 두려움이 없음을 주는 것입니다.

참고: 육바라밀(Six paramitas, 六波羅蜜)은 보시 giving; 지계 moral precepts; 인욕 patience; 정진 vigor; 선정 dhyana concentration; 반야 prajna입니다. 

간혹 보시바라밀을 영어로 “generosity(너그러움 또는 베풀다)”라고 잘못 번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시행은 존중(또는 공경)을 수행하는 것이지 너그러움을 수행하는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뭘 주면서 자신이 너그럽다고 느낀다면, 그건 보시행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줘야할까요? 재물이나 돈을 주는 것도 보시바라밀입니다. 그렇다면 일단 돈을 많이 벌고, 자선사업을 하면서 현명하게 돈을 쓴다면, 돈 버는데 일생을 바치는 게 정당할까요? 저도 한때 그런걸 좋은 생각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야 충분하다고 느낄까요? 게다가 사람들은 돈에 대한 탐심이 있어서, 돈을 놓아버리는 걸 어려워합니다. 돈을 한번 갖게 되면, 돈을 놓아버리기 어렵습니다. 예로 '아! 이 좋은 사람에게 돈을 주고 싶어'라고 첫 생각을 일으키지만, 그러는 즉시 돈을 주지 말아야하는 두번째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돈을 주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이게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대승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게 바로 보시를 행하는 것입니다. 

일단 누군가에게 돈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부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일으키려면 복이 많아야 합니다. '돈을 줘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첫 생각을 일으킨다고 해도, 두번째 생각이 일어나서 '돈을 주면 안된다'는 핑계가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보시행(布施行)”의 본질(the nature of practice of giving)입니다.

보시행은 우리 내면의 인색함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인색함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보살도의 첫 번째 수행입니다. 우리가 보시바라밀을 행할 때, 뭘 가졌던 줘버려야 합니다. 가진 것을 계속 붙잡고 있으면, 탐심이 자라납니다. 보시 바라밀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는 탐심을 다루기 위한 법(Dharma)이며, 보살도의 첫번째 수행법이기도 합니다. 이건 수행자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특히 출가자나 진지한 수행자라면 무언가 붙잡고 있으면 안됩니다. 반면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힘든때를 대비해 아껴놓아야 합니다. 갖고 있는 물건을 몽땅 다 줘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보시바라밀을 행할 때에 적당하게, 조절해야 합니다. 그게 상식입니다. 가진걸 몽땅 다 줘버리면 우린 그걸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가진 모든걸 다 줄 수는 없습니다. 예로 한 가정의 가장이라면 지키고 부양해야할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 사람마다 보시바라밀을 수행하는데 각기 다른 다르마 즉 법이 있습니다. 즉 보시바라밀은 균형을 갖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뭔가를 주면서 되돌아 올 것을 기대합니다.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더라도 감정적, 정신적 보상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만일 보시 바라밀을 행하면서 돌아올 것을 기대한다면, 수많이 많은 절을 지어서 보시해도, 큰 복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단돈 1만원을 내더라도 아무런 기대없이 마음속에 공경심을 느낀다면, 그 복이 훨씬 더 큽니다. 

이건 금강경에 근거한 이야기입니다. 불경엔 얼마의 액수를 보시해야 하는지, 어떤 절에 보시해야하는지, 어떤 스님에게 보시해야하는지 나와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보시할 때, 세 가지가 전부 공(空)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큰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세가지는 주는 사람(the giver), 받는 사람(the receiver) 그리고 주는 것(the gift)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복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큽니다. 

보시란 너그러움이나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보시는 자비를 수행하는게 아닙니다. 대승에서 보시란 근본적으로 손해를 감수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를 들면 돈으로 보시하는 것도 좋지만 반드시 돈으로 해야만 하는건 아닙니다. 우리가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고자 한다면 그 지점이 바로 보시를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을 하면 아픕니다. 그런데도 계속 앉아서 명상합니다. 그것도 보시행입니다. 다리가 아픈데도 움직이지 않고 견디면, 아프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을 지을 수 있습니다. 손해를 감수하기 때문입니다. 

청주 보산사에 오는 참선 학생이 있습니다. 제가 무척 아끼는 학생입니다. 그녀는 좋은 음식이나 공양물을 꼭 제일 높은 큰 스님에게 올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더 좋은걸 먼저 올릴까봐 항상 신경이 곤두서있습니다. 또는 잘 모르는 방문객이 와서 그걸 먼저 먹기라도 하면 큰 복을 짓는데 방해가 됐다면서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걸 보면서 예전에 영화 스님이 저에게 해주신 말이 기억났습니다. “사람들은 제일 좋은 음식은 나한테 가져다 주려고 하지만, 사실 더 큰 복을 지으려면 여기 수행하러 온 사람들(대중)에게 공양물을 주는게 좋다.”

최고로 좋은 음식을 마스터(큰 스님)에게 올리는 건 보시 수행이 아닙니다.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출가자에게 영양가 높은 음식을 공양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닙니다. 복이 모자른 사람이 먼저 큰 스님께 공양물을 올릴 수 있도록 양보해 보십시오. 대신 처음 참선 배우러 온 학생들에게 음식을 나눠보십시오. 그게 바로 보시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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