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야 아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도중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듣고 앉아 있어야 하는 걸까?'라고 생각한 적 있나요? 사실 우리의 아상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재잘거리길 좋아합니다. 그렇게 듣는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고,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댑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의 시간뿐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시간도 낭비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쓸모없고, 이익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상대방을 만나면,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봅니다. 무의미한 대화는 계속 오고 갑니다. 아무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아상은 무의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할까요? 어째서 사람들은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싶어 하고, 달콤한 말을 하려고 노력할까요? 어떤 때에는 그냥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냥 말하고 또 합니다.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무의미한 이야기인데도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은 늘 일어납니다. "오! 날씨가 어떤가요?", "이번 겨울에 눈이 많이 오나 봐요", "환경이 오염되는데 정말 큰 일이에요". 그냥 말만 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와 만나서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가벼운 대화를 하거나, 농담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많은 경우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말하길 좋아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아상입니다. 때로는 그것을 "에고"라고 부르고, 그것이 우리의 자아이기도 합니다.
탁자 저쪽 맞은편에 누군가가 앉아 있습니다. 그럴 때 침묵은 서로를 매우 불편하게 합니다. 특히 서양 문화에서는 공공장소에서 전혀 모르는 누군가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도 침묵을 참지 못합니다. 스스로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합니다. 우리 아상의 일부는 고요함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아주 많은 생각들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고요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입니다. 고요하게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듭니다.
아상은 망상이 너무 많아서 고요한 걸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입을 열고 그냥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무의미하고, 중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상의 본성은 "움직임"입니다. 계속 움직입니다. 그리고 의미 없는 말들이 그 움직임의 한 부분입니다. 그것을 영어로 "거북한 침묵(Awkward Silence)"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사람과 있으면 매우 불편해서, 아상은 거북한 침묵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움직여야 합니다. 아상이 늘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그냥 이런 겁니다. 계속 움직입니다. 그뿐입니다. 계속 꼼지락거려야만 합니다. 무언가를 계속해야만 합니다. 근육을 써야만 하고, 얼굴을 써야만 합니다. 이야기하고, 일어서서 걸어야만 합니다. 무언가를 계속해야만 합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바로 우리에게 명상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명상은 몸을 사용해서, 예를 들어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아상이 움직이는 걸 볼 수 있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명상, 특히 불교의 선명상은 아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용하지 못한 생각과 활동은 줄어듭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이 더 차분해지고, 명료해지면, "왜 내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라는 언짢은 기분으로 상대를 거부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서로 혼란 속에서 내 기분과 상대의 기분만을 걱정하며, 안절부절하는게 아니라,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양해를 구하고, 나만의 건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과정은 생각하는 마음으로 아상을 분석하려 하거나, 머리를 써서 아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려 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혼자 여러가지 방법으로 아상을 상대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이미 성공한 사람이 곁에서 가르쳐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아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지하고, 아상을 죽일 기회도 생깁니다. 그것이 명상의 궁극적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