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3. 십법계[十法界] 중 연각법계[緣覺法界]

선화 상인의"십법계불이일념심十法界不离一念心": 대승불교와 윤회

by 현안 XianAn 스님

불교가 처음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졌을 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바로 불교 문서들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에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었는데, 그중 한 분이 아주 유명한 인도 승려, ‘구마라집 (또는 쿠마라지바)’ 입니다. 그는 800명 이상의 인재들을 이끌고 10년 이상 번역 일을 하였습니다. 그의 훌륭한 번역서들은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업적으로 불교 성전인 삼장(Tripitaka) 즉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거의 대부분이 중국어로 남겨졌습니다.

위앙종의 마지막 조사였던 선화 상인(宣化 上人)도 또한 미국에 오셔서 하신 여러 큰 업적 중 하나가 바로 Buddhist Text Translation Society 즉 BTTS을 조직하여 대승 경전과 법문을 영문화한 것입니다. BTTS는 1970년 조직되었고, 대승 경전 번역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하여, 번역물은 초벌, 수정, 편집 그리고 인가의 번역 위원회의 검토를 4차례 거쳐야만 합니다.


BTTS 위원회는 평생 불법을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에 인생을 바친 비구와 비구니 스님들이 이끕니다. 그러한 이유로 BTTS의 모든 번역물은 불법의 지식적 해석이나 가정적 추측보다는 실제로 수행을 하는 데 있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초점을 둡니다. 그래서 그런지 선화 상인의 법문집을 영어로 읽으면 마치 스님이 옆에 오셔서 귀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의 법문을 읽으면,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즉시 행동과 말을 하기 앞서 한번 더 생각해 보게 해 줍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불광출판사를 통해 선화 상인의 법문집 및 불경 강설집이 한국어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화 상인의 불경 강설집으로 ‘법화경’ 및 ‘능엄경’이 한국어로 있습니다. 그리고 선화 상인의 참선 관련 법문집 ‘허공을 타파하여 마음을 밝히다’과 정토 관련 법문집인 ‘서방 극락이 그대의 집’이라는 책도 나와 있습니다. 사실 능엄경 강설 영문판은 8권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제6권에 능엄주에 대한 설명과 능엄주 전체가 나와 있습니다. 이 부분이 한국에서 ‘선화 상인 능엄신주 법문’으로 출판되어 있는데, 그 책 부록에 있는 능엄신주는 사실 선화 상인이 전수해 주신 버전이 아닌, 성철 스님이 한국 사람들에게 이미 널리 보급해 주셨던 버전의 능엄 신주로 보입니다.


이렇게 아직 한국어로 소개되지 못한 선화 상인의 불법이 많이 있기에 ‘십법계는 일념심을 넘지 않는다’를 선별하여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만불성萬佛城 선화상인宣化上人의 십법계十法界 중 연각법계緣覺法界

The Dharma Realm of those Enlightened to Conditions


연각법계 10realm_05.jpg

연각성현 고봉독면

緣覺聖賢 孤峰獨眠

춘화추사 십이연환

春花秋謝 十二連環


인연으로 깨달은 성현은 높은 산에서 홀로 잠들었다.

봄 꽃이 가을 동안 12개의 연환에서 말라죽는다.


The holy sages enlightened to conditions
Doze high on mountain peaks alone.
Springtime's flowers wither in the fall
In a cycle of twelve interconnecting links.


난(선화 상인) 왜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할까요? 연각 (벽지불)은 질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 근처에 있는 것을 싫어하는 은둔자입니다. 오늘날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살펴보고 있으니, 여러분은 벽지불처럼 행동하면 안 됩니다. 이 세계에 부처님이 계실 때, 이들을 연각(緣覺)이라고 부릅니다. 이 세상에 부처가 없을 때, 이를 독각(獨覺)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Why am I asking you all these questions? Those Enlightened to Conditions (Pratyekabuddhas) don't like questions. They are recluses who don't like to be around other people. Today we are looking into the question of everyone being together, so you should not act like Those Enlightened to Conditions. When there is a Buddha in the world, they are called Those Enlightened to Conditions. When there is no Buddha in the world, they are called Solitarily Enlightened Ones, because they are able to become enlightened by themselves.


이들이 하기 좋아하는건 뭘까요? 산 꼭대기에서 홀로 잠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연각성현 고봉독면 緣覺聖賢 孤峰獨眠 춘화추사 십이연환 春花秋謝 十二連環. 연각(연에 따라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리도 인연에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십이연기 즉 12가지의 인과를 수행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열두가지 인과에 의해 수행되야 합니다.

What do they like to do? They like to sleep in solitude on the mountain peaks. The holy sages enlightened to conditions. / Doze high on mountain peaks alone. / Springtime's flowers wither in the fall. / In a cycle of twelve interconnecting links. Speaking of Those Enlightened to Conditions, we should also become enlightened to causes and conditions. They cultivate the twelve causes and conditions. We, however, are cultivated by the twelve causes and conditions.


열 두 개의 인과 중 첫째가 “무명(無明)”입니다. 이들은 무명을 관합니다. “이것이 어디서 왔는가? 이상하다! 어떻게 무명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면 이들은 무명이 행(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The first of the twelve causes and conditions is ignorance. They contemplate ignorance. "Where does it comes from? Strange! How can there be ignorance?" Then they see that ignorance leads to activity.


‘행(行)’이 발현함으로써, 식(識)이 나타납니다. ‘식(識)’은 분별과 연관됩니다. 무명이 연에 따르기도 하고, 연(緣)에 따르지 않기도 하는 반면 행(行)은 유위법(有爲法)입니다; 이는 두 가지 중간에 있습니다.

With the manifestation of activity, consciousness appears. Consciousness involves discrimination. Activity is a conditioned dharma while ignorance is neither conditioned nor unconditioned; it is between the two.


그렇다면 왜 분별이 생길까요? 왜냐하면 유위법(有爲法)들에 인해서입니다. 분별심은 유위법(有爲法)들에 의한 결과물입니다. 분별심으로 인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명(名)과 색(色)이 곤란을 일으키죠. 명(이름)이 이름의 문제를 가져오고, ‘색’이 물질의 문제를 가져옵니다. 만약 내가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냥 이들을 언급하는 것이 바로 화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이름과 물질이 문제가 될 수 있어?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추가되었어요. 내가 입을 열기 전 여러분은 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말을 시작하면서부터,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이로부터 알고 싶은 욕구가 왔습니다.

Why are discriminations made? Because of conditioned dharmas. The discriminating mind is a result of conditioned dharmas. With a discriminating mind, the trouble starts. Name and form are the trouble. Name" brings the trouble of name, and "form" brings the trouble of form. If I didn't talk about them, there wouldn't be any problems. Just mentioning them is asking for trouble, because you're bound to say, "How are name and form troublesome? I don't understand." Now you have the added trouble of "not understanding." Before I said anything, you didn't have that problem. Once I began talking, the problem of your not understanding arose and with it came the desire to know.


이 지식을 위한 퀘스트는 육처(六處)을 이용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해되나요? 이해하고자 하는 갈망 때문에 육처(六處)이 중생에게 온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설명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아무도 예전에 이렇게 설명한 적이 없었습니다.

This quest for knowledge results in the use of the six sense faculties. See? The six sense faculties come into being because of the wish to understand. Have you ever heard such an explanation? No one has explained it this way before.


여러분이 알고 싶다고 결심하면, 안(眼) 즉 눈, 이(耳) 즉 귀, 비(鼻) 즉 코, 설(舌) 즉 혀, 신(身) 즉 몸, 의(意) 즉 마음 또는 의식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이들을 통하여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여러분이 더 알고자 할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더욱 혼란스러워질수록, 이해도 덜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When you decide you want to know, the eyes, ears, nose, tongue, body, and mind appear. You think you can gain understanding through them without realizing that the more you want to understand, the more confused you become, and the more confused you are, the less you understand.


여러분이 이해하지 못하니, 촉(觸)을 구합니다. 여러분은 동, 서, 남, 북, 위 그리고 아래로 무작위 접촉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파리가 벽에 미친 듯이 막 부딪히듯이 말이죠. 왜 벽에 막 부딪힐까요? 왜냐하면 이해하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Since you do not understand, you seek contact. You go around making contact at random: east, west, south, north, above, below; like a fly madly bouncing off the walls. Why does it bounce off the walls? Because it wants to understand.


촉(觸)이라는 것은 벽에 부딪혀 튕기면서 사방으로 사물들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모든 곳에 다 가지만, 그러나 이러한 필사적인 시도의 결과는 멍이 많이 드는 것이지요. 이해하고자 하는 결심이 굳어지고, 이런 접촉들이 생기면, 수(受) 즉 느낌이 있다. “아, 아프다!” 또는 “아~ 매우 편안하다. 당장 여기저기 부딪치지 않으니, 기분이 매우 좋다.” 그러나 또다시 여러분이 어떤 것에 부딪히게 되면, 기분이 절대로 좋을 수가 없다. 여러분이 멋지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누군가가 여러분을 비판할 때는 매우 화를 냅니다. 바로 이것이 수(受) 즉 느낌이 있는 곳입니다. 이는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Contact is just bumping up against things, going everywhere bouncing off the walls. You go everywhere hoping to understand, but all that results from this desperate attempt is a lot of bruises. After the determination to understand sets in and encounters occur, there is feeling. "Ow, that hurts!" Or, "Ah, I'm so comfortable. Right now I'm not bumping into things, and I feel really good." But when you bump against something, you don't feel good at all. You feel happy if no one is telling you that you're not nice. But you get upset when you hear someone criticize you. This is where feeling lies; it cannot be found outside.


느낌이 있으면, 갈망과 집착 즉 애착(愛着)이 올라옵니다. 여러분은 즐거운 상태에 대한 갈망과 집착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불쾌한 환경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느낍니다. 행복과 불행은 갈망과 혐오에서 옵니다. 그래서 매일 문제는 자라납니다.

Once there is feeling, craving and attachment arise. You give rise to craving and attachment for pleasant situations, but you feel aversion for unpleasant environments. Happiness and unhappiness come from craving and aversion, and so every day the trouble grows.


인연으로 깨달은 성현은 높은 산에서 홀로 잠들었다. 봄 꽃이 가을 동안 12개의 연환에서 말라죽는다. 봄이 오면 무궁무진한 것들이 자라고 번창합니다. 그래서 벽지불 성자는 모든 것은 생사의 자연스러운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관을 하여 깨닫습니다. 이들은 봄의 수 백 송이의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관하고, 가을에 낙엽이 말라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이들은 12개의 연환을 관합니다.

The holy sages enlightened to conditions. Doze high on mountain peaks alone. Springtime's flowers wither in the fall. In a cycle of twelve interconnecting links. The myriad things grow and prosper in the springtime, so the Pratyekabuddha sages contemplate and realize that everything undergoes the natural process of birth and death. They contemplate the hundreds of flowers blossoming in the springtime, and watch the dry leaves falling in the autumn." They contemplate the twelve causes and conditions.


이제 우리는 갈망 부분 즉 애(愛)에 이르렀습니다. 사람들이 불안정하게 느끼는 것은 갈망 때문입니다. 애착(愛着)이 있을 때, 혐오가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갈망하는 것을 움켜잡습니다. 움켜잡는다 즉 취(取)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뜻은 어떤 것에 꼭 쥐기를 원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망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욕망을 이루기 위해 이러한 대상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렇기에 움켜잡는 것 즉 취(取)는 존재하는 것 즉 유(有)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이런 것들을 갖게 되면 그때 바로 태어남 즉 생(生) 그리고 노사(老死)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러한 연각들이 수행하는 십이연기[十二緣起]법 입니다.

Now we come to craving. The reason people feel unsettled is because of craving. Once there is craving, there is also aversion. You grasp at those things that you crave. What is meant by grasping? It means wanting to get hold of something. Because you have craving, you then want to obtain those objects in order to fulfill your desires. Thus grasping leads to becoming. Once you have these things for your own, there is further birth, which leads to old age and death. These are the twelve causes and conditions cultivated by Those Enlightened to Conditions.




* 오타나 오역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바로 댓글로 달아주세요. 수정해서 글이 좋아지면 앞으로 읽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 선화 상인의 법문을 계속 읽고 싶으시면,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주세요.


선화상인(宣化 上人)

선화 상인

법명은 안자(安慈), 자는 도륜(度輪)이다. 중국 위앙종의 제9대 조사이며, 사호(賜號)는 선화(宣化)이다. 29세 되던 1947년 보타산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949년 홍콩으로 건너가 선종, 교종, 율종, 밀종, 정토종의 다섯 종파를 고루 선양하며 문호파벌을 타파하였고, 서낙원사, 불교강당, 자흥선사 등을 건립하였다. 허운선사(虛雲禪師)가 1956년 운거산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승하신 법의 제46대, 중국 위앙종의 제9대 사법인(賜法人)으로 임명하고 ‘선화(宣化)’라는 호를 내렸다. 1962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샌프란시스코에 불교학당을 설립하여 불법을 전했다. 1973년 국제역경원을 설립하여 역경의 인재를 배양하였고, 1974년 캘리포니아주 유키아에 만불성성(萬佛聖城)을 건립한 후 미국 등 세계 각지에 27개의 도량을 건립하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