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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Jan 08. 2021

아무 키보드로나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아무튼 그런게 있다.

(김칫국 마시며 써본) 작가소개

기업의 연수원에서 일하고 있다. 짬짬이 시간을 내어 팟캐스트를 하고 글도 쓰고 있다. 본캐와 부캐를 넘나들며 어느 것 하나 똑바로 못할까 봐 불안에 전전긍긍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월급쟁이 삶이 어느덧 12년 차에 들어섰고 종국에 되고 싶은 것은 역시 작가다.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업무 때문에 터널증후군으로 고통받았고 고통을 덜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구입한 리얼포스 키보드가 문제였다. 그 길로 키보드 덕후가 되어버린 것이다. 키보드 덕후의 삶을 옆에서 보다 못한 아내가 "그렇게 키보드가 좋으면 글을 써서 키보드값을 벌어라"는 말에 책을 썼다.




가슴 저리도록 청명한 파란 가을 하늘이 견딜 수 없어 아내와 속초로 여행을 떠났다. 속초에는 유명한 독립서점이 두 곳 있다. 동아서점, 그리고 문우당서림이다. 그리고 나는 두 서점 중 한 곳에서 아주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다. 제목을 밝히자면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이다. 속초의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에 꽂히는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을 보고 있노라니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거울을 보면 내 머리 정수리 위로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보일 정도로 글쓰기 욕구가 솟아난 것이다. 



머리 위로 이글대는 아지랑이가 보인다면 당신은 착한 사람



그런데 아뿔싸. 내 가방에는 혹시 급한 업무가 있을까 봐 챙겨놨던 회사 노트북밖에 없었다. 아무렇게나 만든(죄송합니다) 노트북에 붙어있는 팬터그래프 키보드로는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두 가지 이유다. 첫 번째, 그 키보드로는 너무 일만 했다. 키보드에 담겨있는 영혼은 필시 나의 여러 가지 페르소나 중 회사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놈은 여러 가지 이유로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할 수 없다. 지독하게 열심히 하는 일개미인 데다가 업무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까칠하기 때문이다. 이 일개미로 인해 회사 키보드는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져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아주 거룩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회사원이 아닌 나, 본연에 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쉽게도 집에 두고 온 맥북 또는 리얼포스 무접점 키보드, 혹은 레오폴드 적축 저소음 정도는 되어야 타건이 가능하다. 타건할 때마다 경쾌하게 찰칵 찰칵거리는 커세어 키보드도 부적절하다. 너무 신나니까 글마저 가벼워질까 겁이 난다. 이런 나의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기가 차 하며(아무튼 키보드에는 아내가 자주 등장한다) 그 이야기도 쓰라고 나를 독려했다. 아내는 이렇게도 나를 잘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두 번째 이유를 까먹을 뻔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노트북의 키보드가 매우 구리다는 것이다. 여러 브랜드의 노트북이 있지만 나는 내가 다니는 회사의 특정 계열사에서 노트북을 만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선택권 없이 가벼운 무게를 최고 장점으로 자랑하는 노트북 모델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놈은(=노트북) 회사에서 일하는 수많은 연구원, 기획자, 설계자, 생산자들의 집단 지성이 똘똘 뭉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생산하여 효과적으로 팔아먹을 수 있을까만 고민하며 만든 제품이다(그러니까 잘 팔린다). 이런 제품의 키보드에 덕후의 철학 따위 있을 리가 없다(죄송합니다2). 적당한 소재의 적당한 키감으로 만들어 대량 생산되어 회사원과 사회 초년생, 대학생들의 손가락을 고통스럽게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 노트북 자체가 몹시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좋은 평가를 받는 베스트 셀러 제품에 속한다. 내가 지금 지적하는 것은 노트북이 아니라 키보드임을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아무 키보드로나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지만 나는 장인이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다는 핑계를 대보고 싶다. 결국 나는 여행을 모두 끝내고 돌아온 뒤 무결점의 마감을 자랑하는 맥북 키보드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아내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 뜨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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