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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Jul 24. 2022

왁스와 닥터마틴

발등의 통증이 내 것이 아니라면 여전히 닥터마틴을 신고 싶다.

왁스와 닥터마틴에 관하여 이야기해보자.


소위 '되도 않게 멋을 부리기 시작한 시점'인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 중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두 가지 아이템은 '왁스'과 '닥터마틴'이다. 왁스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은 대중적인 헤어제품이 되었지만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01년 전에는 그렇게 크게 유행하지 않았다. 그 즈음에는 남자들이 머리를 고정시킬 때 대개의 경우 젤이나 스프레이(특히 젤은 참 촌스러운 동네 미용실 냄새가 났던 걸로 기억한다.)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헤어 젤은 대개 이런 느낌이다. 목욕탕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일본 문화와 펑크에 심취해있던 친구가 육각형 모양의 까만색 갸스비(GATSBY) 왁스를 가지고 오자 '꾸미기'에 관심 많던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왁스라는 새로운 제품은 젤이나 스프레이와 다르게 냄새도 별로 안 나고 광택도 별로 없는 것이 머리를 뾰족뾰죡하게 세워주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컬을 만드는 데도 아주 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선생님의 지적도 쉽게 피해 갈 수 있었다. 젤과 스프레이는 광택과 냄새로 선생님의 눈-코 레이더에 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잘못 걸리면 화장실 세면대에서 즉시 머리를 감아야만 했다. 학교에서는 겨울에도 온수가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추운 겨울이면 곤욕을 치러야 했다. 게다가 수건도 없으니 축축한 머리를 손으로 탈탈 털어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추한 꼴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왁스는 달랐다. 다소 파격적인 헤어 스타일을 만들어도 선생님은 '머리나 좀 감아라 이 녀석아' 정도의 잔소리로 넘어갔다. 선생님의 머릿속에는 '뭔가 발랐다면 반짝반짝 광택이 난다.'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모양이다. 왁스의 아주 사소한 단점이라면 어떤 제품은 지나치게 꾸덕꾸덕해서 머리에서 완전히 씻어내려면 많은 양의 물과 샴푸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머리를 좀 만진다 하는 녀석들은 모두 다 왁스를 들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기도 하고 쥐기도 하며 기무라 타쿠야(당시 갸스비 왁스 모델)의 헤어스타일을 흉내 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가장 유행하던 헤어 스타일은 샤기컷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기무라 타쿠야의 GATSBY  광고컷


이제 닥터마틴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요즘 표현으로 당시의 '힙'함을 설명하자면 음악을 빼놓을 수 없고, 뭐니 뭐니 해도 힙한 장르의 쌍두마차는 힙합과 펑크였다. 우리 옆 반은 힙합에 심취해서 CB Mass(다이나믹 듀오의 전신)의 노래를 모두가 따라 불렀고, 우리 반은 펑크에 빠져 크라잉넛의 앨범을 돌려 들었다. 크라잉넛과 펑크의 상징 중 하나인 닥터마틴이 대세 중 대세 아이템이었다.


닥터마틴 대표 모델 1461


나는 닥터마틴을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신발이 '너무너무 예뻤기 때문'이었다. 닥터마틴을 처음 학교에 신고 온 친구는 영국의 펑크 밴드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를 닮았었는데, 특히 혀를 내밀고 양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는 펑크 포즈가 꽤나 잘 어울리던 녀석이었다.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의 시드 비셔스(Sid Vicious) 


무심한 듯한 까만색의 색상과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된 신발의 곡선, 밑창 실밥의 개성 있는 색상까지. 나는 처음으로 신발이라는 제품에서 '완벽하다'라는 문장을 떠올렸던 것이다. 한창 유행이었던 아디다스 슈퍼스타가 '애들 신발'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이거지. 하는 생각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닥터 마틴을 따라 샀다.


닥터마틴을 처음 신었을 때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신발이 '정말 너무너무너무 발이 아팠기 때문'이다. 나는 3홀(신발끈 구멍이 3개 뚫린 것, 좌우 합쳐서 총 6개의 구멍이 있다.)로 된 1461 모델을 신었는데, 유광과 무광을 고민하다가 유광을 선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유광이고 무광이고 간에 이놈의 신발은 어떻게 신어도 아팠고 어떤 양말을 신어도 편하지 않았다. 반나절도 채 지나기 전에 발등 쪽에 피가 맺히고 얼얼해져서 결국 길을 걷다가도 신을 벗고 쉴 수밖에 없었다. 걸을 때마다 온 신경이 아픈 발에 신경 쓰이는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참을 길들이기(신발 길들이기가 아니라 ‘내 발'을)를 시도하다가 결국 닥터마틴은 신발장 어딘가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것은 나와 맞지 않는 신발이었다. 나중에 찾아본 바로는 발의 모양에 따라 ‘어떤 수를 써도 아플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여 년이 지는 요즘도 나는 가끔 괜스레 닥터마틴을 찾아본다. 여전히 닥터마틴은 ‘힙'하고 무심한 듯한 까만색의 색상과 세련된 신발의 곡선, 밑창 실밥의 개성도 그대로다. 매력적인 모델도 더 많아졌다. 그래서 난 발등의 통증이 내 것이 아니라면 여전히 닥터마틴을 신고 싶다.


그러나 이제 등하굣길만 신발을 신고 다니는 학생 신분이 아닌 나는, 12시간이 넘는 시간을 신발 또는 구두를 신어야 하기에 멋보다는 편안함을 더 추구한다. 결국 나는 발등이 높고 발폭이 넓은 내 발 모양에 잘 맞는 운동화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내 신발장에는 편안함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락포트 스니커즈가 신발장에 색깔별로 나란히 놓여 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나는 인터넷에 '안아프게 닥터마틴 신발 신는 법'까지 상세하게 나와있는 이 브랜드를 여전히 동경하고 있다. 언젠가는 발등의 고통을 참고 5분 거리의 편의점이라도 다녀올 그 날을 꿈꾸며.



작가의 짧은 글이 궁금하다면

https://twitter.com/chanrran




image source

-메인: https://therake.com/stories/style/how-dr-martens-became-iconic/

-미장센 헤어젤: 아모레 퍼시픽 홈페이지

-기무라 타쿠야: https://kimuraday.livejournal.com/18554.html

-닥터마틴: https://www.drmartens.co.kr/product/shoes-1461-bex-black-smooth

-시드 비셔스: https://discogs.com/ko/artist/309283-Sid-Vic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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