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독감을 앓았다. 엄청난 고열과 오한으로 잠옷이 땀에 젖었다. 쏟아지는 기침은 횡격막을 제멋대로 쥐고 비틀었다. 후두에는 염증이 번져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너무나도 아팠다. 내가 독감에 걸리다니. 그런 건 나이 들고 체력 약한 사람만 걸리는 게 아니던가. 아니, 설마 나, “그런 사람”이 된 건가.
평소 체력에는 꽤 자신 있었다.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매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운동도 꽤 열심히 했다. 목 관리를 위해 담배나 폭음은 하지 않는다. 힘도 좋다. 해외 연주 여행을 가도 20kg 넘는 캐리어를 두 개씩 들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누볐다. 최근 영국을 다녀와서는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 잠을 설치긴 했지만 체력에 무리가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 왜 아프게 된 거지. 체력이 아니라면 설마 다른 이유인가. 나, 나이 든 건가? 아, 믿고 싶지 않지만 왠지 수긍이 간다. 올해 만 서른여덟. 이전 한국 나이로 본다면 서른아홉, 마흔을 목전에 둔 나이다. 아이패드에 모았던 눈의 초점을 슬쩍 떼어 본다. 화면 너머로 희미하게 나의 실루엣이 비친다. 그 실루엣에 나를 콜라주해 본다 — 최대한 객관적으로.
일단 싱글이다. 만나는 남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좀 복잡한 상황이다. 설명하려면 길어지니 이건 나중에 따로 적기로 한다. 직업은 성악가이자 강사다. 어렸을 때부터 성악가가 되겠다는 남다른 포부가 있던 건 아니다. 전공생으로 미적지근하게 10대와 20대 초반을 보내다가 유학을 나와서 열심히 하게 되었다. 음악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일단 열심히 해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하다 보니 정이 붙었다. 지금은 정 때문에 음악과 헤어지지 못하고 있다. 싱겁지만 사실이다. 찬바람 부는 예술계에서 여태 음악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러나 벌이는 신통치 않다. 저축 — 없다. 남들은 다 올랐다는 주식도 그저 그렇다. 유일한 재산이라고는 내 명의로 된 반지하 빌라가 있다. 3년 전, 캄보디아 가족에게 전세를 주었다. 그 전세금은 이제 없다. 유학하느라 다 날렸다. 캄보디아 가족은 올 4월에 이사 나간다고 한다. 돌려줄 전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곧 은행을 돌아야 한다. 그런데 내게 돈을 빌려줄 은행이 과연 있을까. 이러다 사채를 써야 하는 건 아닐까. 빚쟁이 예약이다.
몸이 아팠던 일주일 동안 넷플릭스를 구독했다. 인스타 피드를 돌려 보다가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왜 남들은 내가 힘들 때마다 더 잘되는 건지 모르겠다. 누구는 큰 무대에 서고, 누구는 결혼을 앞두고 있으며, 누구는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심지어 누구는 호텔 딸기 뷔페에 갔다 왔단다. 딸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성질이 났다. 영화를 볼 때는 다른 생각 없이 그 안에 빠져들었다. 연기, 연출, 미술, 소품, 쥐뿔도 모르지만 미장센도 눈에 들어왔다. 관심 가는 감독의 작품이 마침 오늘 개봉하기에 내일은 영화관에서 볼 영화도 한 편 예매했다. 혼자 개똥 품평을 하며 그래도 나는 예술가지, 자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병원에서 지어준 마지막 항생제를 털어 넣었다. 많이 잦아들긴 했지만 아직 기침에 시달리고 있다. 말하는 목소리는 많이 돌아왔으나 연습은 아직 무리다. 세상 무익한 존재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론 음악가로 무대에서 박수받을 때도 그렇게 쓸모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살아야 한다. 다음 달 월세를 내기 위해, 아침 식사로 요거트에 바나나와 뮤즐리를 사수하기 위해, 여전히 우리 딸이 최고라고 믿는 부모님을 위해 살아내야 한다. 대충 씻고 헬스장에나 가 보련다.
오늘은 2026년 2월 18일, 설 연휴 마지막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