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씹은 정신 건강에 좋다

by 고음가수

2년 조금 넘게 만난 남자친구가 있었다. 지난 여름 어느 월요일 아침, 그가 바람피우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거리 연애 중이던 우리는 그 주 토요일에 만날 계획이었다. 8개월 만이었다. 그동안 나는 벌이를 위해 음악 외의 일을 하고 있었다. 몸을 쓰는 일이라 매일이 고단했고, 그 역시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직장을 다니느라 지쳐있었다. 사이가 소원해지고 날 선 말이 오간 건 그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바람을 알게 된 이후의 이야기는 자세히 쓰고 싶지 않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점이 있다면, 나는 퍽 우아하고 지적으로 그 사실을 마주했다는 것이다. 후일 또한 꽤 잘 소화해 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시간을 통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 나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며, 앞으로 스스로의 평화를 위한 선택을 하리라는 것. 그날 아침 통화를 마지막으로, 그와는 연락을 끊었다.

그러다 작년 12월, 그에게서 갑자기 이메일이 왔다. 연락이 올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연애 및 이별 관련 인스타 릴스로 정신을 무장한 덕분이었다. 그런데 심장은 왜 제멋대로인지, 단전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분노에 압도되어 전자레인지 속 유리그릇처럼 터질 것 같았다. 스와이프 하던 엄지손가락은 불에 그을려 폰 스크린에 눌어붙은 듯했다. 울렁거렸다. 리허설 때도,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씻고 데스크톱 앞에 앉았다. 큰 화면으로 찬찬히 편지를 다시 읽어봤다. 감정이 여전히 복잡한 파도를 그리며 요동쳤다. 메일 내용을 복사해 워드로 옮겼다. 다시 한번 읽었다. 또 읽었다. 계속 읽었다. 그러자 글 속에 나르시시스트적인 그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이기적이고 뒤틀린 심성이 단어들 사이로 끈적하게 배어 나왔다. 보인다, 보여! 진실이 보이는구나. 나는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그리고 신께 감사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역시 제 곁에 계시는군요.


그다음에 내가 한 일은 답장을 쓰는 것이었다. 물론, 수신인은 없다. 워드로 복사한 편지 위 문장마다 느낀 감정을 두드려 적었다. 내용이 매우 적나라하고 수위가 높아 나의 치부 컬렉션에 추가됨이 마땅했다. 마지막 구절까지 휘갈긴 후, 나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그는 이후로 몇 차례 더 문자와 메일을 보내왔다. 당연히 답장하지 않았다. 며칠 전엔 그와 바람난 여자에게도 메시지가 왔다(그녀는 이 모든 사실을 내게 알린 장본인이다). 내용은 의외였다. 나의 지혜를 존경한다고 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인간이다. 지난 여름 이후, 자신의 뜻처럼 풀리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죄책감도 조금 느꼈을 것이다.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그녀에게 나는 최대한 타이르듯 현명한 선택을 하며 살자고 했다. 또한 앞으로 우리가 연락을 주고받는 일은 없을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그녀는 나 같은 사람을 알게 되어 정말 기쁘다며 계속 연락하고 싶어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인간이다.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난제로다. 그냥 어른이 되기에도 이렇게 험난한데, 참된 어른이 되는 여정은 얼마나 고되겠느냔 말이다. 나를 비우고 평화를 구하는 과정은 결코 평화롭지 못하다. 그래도 노력해 보련다. 애쓰는 내 모습은 안쓰러우나, 영 싫지는 않으니 말이다.









* 덧붙이기

아래의 사진들은 지난 여름 유럽 일정 중 찍은 것이다. 지나면 다 추억이라고 했던가 — 정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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