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태어나 처음으로 대출 상담을 받았다. 나름 단단히 준비했다. 기본 증명서들은 물론 지난 공연 계약서, 출강하는 학교의 재직 증명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덜란드 왕립음악원 졸업장까지 챙겨 갔다. 보시다시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어 재작년 수입은 형편없습니다, 좀 봐주세요. 긴급 상황에 대비한 핑계용이자 호소용이었다.
대출을 받기로 결심한 후, 하루도 푹 자지 못했다. 새벽 세 시면 눈이 떠졌다. 이내 온갖 걱정이 한데 모여 강강술래를 추기 시작했다. ChatGPT와 함께 갖가지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어느새 아침 기상 알람이 울리곤 했다.
결전의 날인 오늘, 나는 비장한 각오로 샤워를 시작했다. 대출 상담하러 갈 때 차림새도 중요하다는 친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박박 씻었다.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향수도 뿌렸다. 용기를 내어 역으로 향했다. 그런데 개찰구 앞에서 갑자기 발걸음이 멈췄다. 순간, 시간이 멈추고 장소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어느새 나는 다른 장면 속에 들어와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더 이상 지하철역이 아니었다 — 채무 월드로 향하는 특급열차의 승강장으로 변해있었다.
앞이 캄캄해지고 어지러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아시스처럼 개찰구 뒤편에 빵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럴 땐 설탕이다. 황급히 들어가 메론빵 두 개와 아이스 카페라테를 단숨에 해치웠다. 당 스파이크를 맞고 나니 깡이 다시 샘솟는 것 같았다.
역에서 은행까지 걸어가는 동안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경음악만 없었지, 나는 이미 거리 위의 록키였다. 은행 안은 인산인해였다. 록키에게 대기 번호표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데 말이야. 안내 직원에게 물어보니 대출 창구는 따로 있다고 했다. 앗, 그렇군. 마침 비어 있었다.
창구 앞 의자에 앉았다. 은행 직원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기서 지면 안 된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힘주어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 대출 상담받고 싶은데요. (지면 안 돼.) 눈에는 괜한 결기까지 담았다. 그러나 기세는 서류를 건넨 지 1분도 안 돼 꺾였다 — “반지하는 대출 안 됩니다.”
이후 방문한 다른 은행 세 곳에서도 답변은 같았다. 불안한 내 직업은 논외였다. 보잘것없는 재산 때문에 나는 은행 빚조차 못 지는 신세였다. 잔뜩 준비해 간 가방 속 서류 파일이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인도는 하늘로 솟구치고, 하늘은 신발 밑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오장육부가 함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말 어떡하지.
연습실로 갔다. 연습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당장 다음 주 솔로 공연을 앞두고 있어 연습은 해야 했다. 오케스트라 리허설도 다녀왔다. 리허설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지구를 떠나고 싶었지만, 당장 내일이 공연이라 빠질 수 없었다.
내일은 종일 여기저기 대출 상담 전화를 돌려야 한다. 저녁에는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도 있다. 사순절을 맞아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며 바흐의 수난곡을 부를 예정이다. 그런데 예수님, 저 돈이 필요한데 어쩌죠. 돈을 마련할 수만 있다면 장기라도 떼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쓸데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니 벌써 새벽 두 시다. 이렇게 또 하루가 갔다. 어제의 내일은 이제 오늘이 되었다. 쉽지 않다.
일단 오늘 아침에는 로또부터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