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가 고장 났을 때

by 고음가수

나는 실패자다. 참담하다. 뭐가 문제지. 술도 안 마셔, 담배도 안 피워,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왜 독감에 걸린 걸까. 한 달이 지났는데도 깨끗이 낫지를 않는다. 이러다 영영 회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곧 비행기도 타야 하는데. 유럽에서 정말 중요한 공연이 있다. 첫 리허설에서도 목소리가 이렇게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눈에 선하다 — 무언의 레이저를 쏘며 나를 압박하는 지휘자, 말없이 악보만 내려다보는 동료들. 가라앉은 리허설 공기 속에서 모두 숨이 막히고 사람들은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것이다. 최악은 리허설이 끝난 뒤다. 나는 그들이 건네는 의례적인 위로에 일일이 화답해야 한다. 지구를 떠나고 싶어도 애써 웃어야 한다. 그리고 말해야 한다 — 빠 드 수시! 빠 드 프로블렘!


안동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KTX 안, 나는 구멍 난 기차 천장에서 쏟아지는 절망을 맨몸으로 맞았다. 신경이 곤두섰다. 좋은 생각은 하나만으로 충만한데, 나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갑자기 옆자리에서 잔기침이 터졌다. 자동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마스크를 고쳐 쓰고 목도리 안으로 코를 더 깊이 파묻었다. 나한테 바이러스 옮기지 마, 보란 듯 창문 쪽으로 상체를 돌렸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러나 마포자루처럼 축축해진 마음은 적당히 할 줄을 몰랐다.


지난 공연, 목소리는 끝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사실 결과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한 달 넘게 지속된 독감과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래도 기침은 많이 멈췄고, 연습 과정도 나쁘지 않았다. 기관지에 특효라는 동료의 말을 듣고 곰보배추즙도 주문했다. 이렇게 맛없는 걸 3만 원이나 줘야 하다니, 자존심이 상했지만 꾹 참고 마셨다.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웬걸. 전날 리허설 때부터 갈라지기 시작하던 목소리는 다음 날 아침에도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가래로 목이 꽉 막혀 노래를 시작하려고 해도 성대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온 신경을 ‘성악가다운’ 소리를 내는 데에만 쏟아야 했다. 눈앞이 컴컴했다. 주마등처럼 스쳤다 — 밤 12시까지 장식음 관련 원서를 붙들고 연습실에서 씨름하던 나, 호흡 유지를 위해 두통을 참고 트레드밀 위를 달리던 나. 노래를 하면 할수록, 내가 쏟아부은 시간은 시커먼 재가 되어 관객들 발밑으로 흩어졌다.


그날 밤, 나는 목소리가 사라지는 악몽을 꿨다. 목이 아픈 것도 아니요, 목소리가 나빠질 기미를 보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사라진 것이었다. 아무리 목에 힘을 줘도 허공을 긁는 바람소리만 나왔다. 헤엑. 켁켁. 끔찍했다.


아침 일찍 이비인후과에 다녀왔다. 다행히 성대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독감 후유증이 길어지는 것뿐이라며 걱정 말라고 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 저는 목소리로 먹고사는 사람이라 당장 나아야 한다고요. 저는 아프면 안 된다고요.


호흡기 치료 후 소염제와 기침 시럽을 처방받았다. 조제를 기다리며 생각해 보니 설 연휴 전 주부터 약을 먹고 있는 셈이다. 나쁜 생각이 또 꼬리 잡기를 시작한다. 약에 찌든 몸 때문에 사후 부패가 안되면 어떡하지. 뉴스에서 얼핏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다. 나는 흙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아, 요새는 다 화장하나. 그럼 공기 오염을 걱정해야 하는 건가. 과학을 안 배웠으니 알 턱이 있나. 과학을 배웠다면 좀 더 편안한 삶을 누렸을지 모른다. 이공계를 졸업한 내 대학 지인들은 모두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약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두 손에 다 쥘 수도 없을 만큼 약이 한가득이다. 아니, 도대체가 말이야. 한국은 약을 너무 많이 먹는 나라다. 별로 아픈 것도 아닌데 알약 한 사발에 시럽 부케까지 주다니. 이 정도면 ‘남용’이다.


아, 나쁜 생각은 이제 그만. 여기서 멈춰야 한다. 2주 뒤 공연만 생각하자. 점심 약을 한 입에 털어 넣고 정수기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쪽 발목이 시큰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부쩍 발목이 자주 아팠다. 다음은 정형외과인가. 눈이 질끈 감긴다. 일단 오늘은 후퇴다. 나는 파스 한 팩을 사 들고 약국을 빠져나왔다.







* 덧붙이기

좌절은 금물이다.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영혼이여,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질 멘탈이여. 연습하자. 이럴 때일수록 연습만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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