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잡 뛰는 소프라노

by 고음가수

나의 직업은 웨이트리스였다. 작년 1월부터 7월까지, 인천공항 근처 카지노 호텔 내 고급 중식당이 나의 직장이었다. 취직 계기는 단순했다. 돈이 필요했다. 네덜란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통장에는 고작 20만 원이 남아있었다. 대책이 시급했다. 단 몇 달만이라도 고정 수입이 들어오는 일이 필요했다.


많은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다. 사무직을 원했지만, 경험도 없고 나이도 적지 않은 나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최종 합격한 곳은 영어학원과 호텔 레스토랑, 단 두 군데였다. 고민 끝에 레스토랑으로 결정했다. 숙소와 식사가 제공된다는 점이 큰 메리트였다.


2024년 12월 마지막 주, 바다를 끼고 있는 영종도는 시내보다 훨씬 추웠다. 바닷바람을 뚫고 호텔 옆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간단한 이사였다. 옷 몇 벌과 전기장판, 이불 한 채, 수저 한 세트, 세면도구가 짐의 전부였다. 이사를 도와주러 온 엄마는 현관문을 나서며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밥 공짜, 옷도 공짜, 숙소까지 저렴하게 제공되는데 뭐가 걱정이냐며 나는 되레 큰소리를 쳤다.


연말 성수기였던 근무 첫날, 종일 2만 보 넘게 레스토랑을 누비며 음식을 날랐다. 고급 중식당이라 트롤리 없이 종업원이 직접 서빙하는 시스템이었다. 치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힘들었다. 매일 온몸이 쑤셨다. 특히 구두 때문에 발과 다리 통증이 심했다. 일을 마치고 나면 땅에 디딜 수 없을 정도로 부어 있었다. 밤중에 화장실을 가려고 몸을 일으킬 때면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3월부터는 대학교 강의도 시작했다. 서울 정릉 근처의 학교였다. 주 이틀 휴가 중 하루는 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보냈다. 강의하는 날이면 아침 7시에 일어나 공항에서 8시 20분 버스를 탔다. 9시 40분쯤 학교에 도착하면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쉼 없이 다섯 학생을 가르쳤다. 대학 입시를 앞둔 제자도 있어 이후에는 인천터미널 근처로 이동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꼬박 두 시간을 달리는 루트였다. 모두 마치고 영종도 숙소로 돌아오면 시간은 이미 밤 10시를 향해 있었다. 씻을 힘도 없었다. 나는 곧바로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끝이 아니다. 그 와중에 공연도 했다. 처음 몇 차례 들어온 공연 제의는 모두 고사했다. 1월과 2월에는 레스토랑 업무를 소화하느라 벅찼고, 3월부터는 강의와 레슨까지 더해져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참 희한한 일이었다. 3월 말이 되자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몸은 말도 못 할 정도로 피곤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기졌다. 음악이 고픈 것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섰던 무대도 그리웠다. 마침 함께 공연해 보자는 연락이 왔고, 나는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했다.


5월 말, 서울 반포의 한 아트홀에서 남미와 스페인 바로크 음악 공연이 있었다. 성악의 비중이 큰 데다 칠레에서 온 기타리스트와 함께하는 무대였다. 대충 임할 수 없었다. 잘 해내고 싶었다. 연습이 필요했다.


네이버 지도를 샅샅이 뒤져 숙소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의 피아노 학원을 찾아냈다. 공연 한 달 전부터는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났다. 출근 시간에 맞춰 호텔로 돌아오려면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연습실로 향하는 길은 즐거웠다.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절박한 마음 덕분인지 공연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 영종도로 돌아오는 쏘카 안에서 나는 솟구치는 도파민과 엔도르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음악을 크게 틀었다. 올림픽대로를 달리자 오른뺨으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 계절은 완연한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강변 고층 빌딩 위 과시하듯 걸린 대기업 LED 전광판도, 맘껏 질투하라는 듯 쏟아지는 한강뷰 아파트의 불빛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배경이 되어 나를 받쳐주고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나뿐이었다. 내가 주인공이었다.


작년 가을, 웨이트리스 일은 그만두었다. 공연 일정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올해 역시 한국과 유럽을 오가며 바쁘게 활동할 예정이다. 나를 찾는 무대가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다. 그러나 이 행운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선택받는 프리랜서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한지, 이미 잘 알고 있다.

‘포기할 각오’ —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나의 대책이다. 나는 음악가라는 직업을 언제든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음악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음악을 위해서다. 계속할 수만 있다면, 다른 어떤 일도 감내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해 봤는데, 할 만했다.





* 덧붙이기

작년 남미와 스페인 바로크 음악 공연 덕분에 오는 5월 대만에도 가게 되었다. 아트홀 시즌 프로젝트에 함께 참여한 대만 고음악 앙상블의 초대를 받은 것이다. 아빠는 이러다 우리 딸 K-성악가 되는 것 아니냐며 막걸리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역시 음악을 하길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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