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가 아닌, 대기업 다녔던 박 과장 이야기

[공포에 대한 에세이] 상사맨 박 과장의 공장 적응기

by 기록의 상사맨



대기업 명함 대신 스패너 든 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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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 아저씨들처럼 저런 일 해야 돼


"공사장 가서 벽돌 나르고 길거리 청소할 거야?

공부하기 싫으면 공장 가서 일해. 더울 때 더운데 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데 서 일해야 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들어왔던 말이다. 물론 부모님도 아들이 누구보다 안정되고 편안한 삶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신 말씀이었지만, 이 말들은 경쟁에서 뒤처진 인생은 암울하고 희망이 없는, 실패한 인생이 될 것이라는 공포감을 내 마음속에 심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뭐든지 열심히 했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경쟁에서 뒤처지는 게 싫고 실패한 결과가 만들어낸 나의 세상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에 못 가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대기업에 가지 못해 연봉이 낮으면 경제적으로 얼마나 힘들까? 능력 없는 남자로 보이면 어떡할까?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실적이 안 좋아서 승진하지 못하면 어쩌지? 내가 경쟁에서 뒤처지면 회사에 오래 다닐 수 있을까?

이런 공포감은 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반대로 그런 공포감은 나에게 사람들을 바라볼 때 선입견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저 사람들의 인생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까? 하는 필요 없는 걱정과 오만함까지.


어렸을 때부터 그런 공포감에서 도망치기 위해 피나는 노력으로 하나둘씩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그러면 그 공포감이 이제는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다 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 공포감은 계속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걸까.


그런데 그 공포감이 하나 둘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실적이 안 좋았던 해도 있었고, 승진이 누락되던 해도 있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경쟁이 심해져 회사에서 내 자리가 조금씩 좁아지는 느낌이 들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는데 점점 내 미래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그 불안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경쟁에서 뒤처져 도태되는 것이 아닌,

남들의 속도에 맞추어 버티는데 익숙해지다가,

결국 내가 누구인지 나 자신을 영영 잃어버리는 삶이었다는 것을.


이대로 버티면서 시간만 흐르면 껍데기만 남은 채 늙어 갈 것 같다는 자각이 들었다.


결국에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회사를 스스로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던 ‘안정적’인 길에서 비켜나 갓길로 나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음 날 해는 똑같이 떴다. 출근하는 곳은 강남의 높은 빌딩이 아닌,

시끄럽고 먼지 나는 공장으로 달라졌지만,


아침에 마시는 커피는 늘 향긋했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반겨주는 아내와 딸도 그대로 있다.


새로운 일과 환경에 적응하고 이곳에서 나름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공포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연봉이 절반이상 줄어들어 월급날이 되면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내가 잘 선택한 것일까, 이게 맞나, 하는 질문이 아직도 고개를 들 때가 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이 내가 두려워했던 그렇게 어두운 인생은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나는 괜찮다.

서울 자가가 아니어도,

지금 대기업 과장이 아니어도 괜찮다.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곳에서 일하고 있어도 나는 괜찮다.


나의 세상이 무너지지 않았다.

어릴 때 내가 두려워했던 인생은 생각보다 살만하다.

시험 점수가 낮아도, 좋은 간판이 아니어도,

대기업 명함을 내려놓아도 인생은 쉽게 어두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너질 줄 알았던 인생은 그 안에서 나름 웃고, 나름 사랑하고, 나름 잘 살아가고 있다.

두려움이 만든 미래보다, 지금 내가 선택한 현재가 더 단단하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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