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맞이한 두 번째 '처음'

서울 자가아닌, 대기업 다녔던 박 과장 이야기 #8

by 기록하는 상사맨

서울 자가 아닌,

대기업 다녔던

박 과장 이야기 #8


40대, 대기업 퇴직 후 특장차 기술자가 된 이야기


제목: 마흔에 맞이한 두번 째 '처음'


늘 옆에서 보조 역할만 하던 나에게

처음으로 직접 혼자 해보라는 작업 지시가 내려졌다.

1톤 냉동탑차의 온도기록계를 설치하는 작업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내가 어깨너머로

얼마나 제대로 보고 배웠는지 공장장님이

나를 테스트를 해보려 하셨던 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작업 시간은 1시간 반.

공장장님으로부터 온도기록계를 받아 들고,

몇 가지 주의사항을 숙지한 뒤 설치를 시작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롯이 나 혼자 책임져야 하는 첫 작업이었다.


그동안 선배 작업자들이 하는 것을 옆에서 수없이 지켜봤다.

눈으로는 이미 수십 번도 더 달아본 장치였다.

그러나 막상 직접 혼자 해보려니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설치를 위해 차량 글로브 박스 아랫부분 커버를 탈거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선 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배터리에서 오는 메인 전원선이 뭐였더라…’


자칫 엉뚱한 선을 건드려 쇼트라도 나면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이 되었다.

이 선 저 선을 한참 뒤적거리다가 드디어 메인선을 찾아냈다.


이제 내가 머리로 알고 있는 이론대로라면,

전선의 피복을 벗기고 온도기록계의 전원선을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의 서툰 손기술이 말썽을 부렸다.

선배들은 작업 가위로 전선 피복을 툭툭 쉽게도 벗겨내던데,

내 손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너무 세게 당기면 자칫 내부 전선까지 끊어질 수 있고,

그렇다고 너무 살살 힘을 주면 질긴 피복이 벗겨지지 않았다.

그 두꺼운 전선의 피복과 씨름하느라 한창 시간을 허비했다.


한낮의 가을 날씨.

서늘하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였는데,

너무 긴장을 한 탓에 등줄기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원선을 연결하고

절연 테이프로 꼼꼼하게 마무리를 했다.

마이너스 접지선도 차체에 연결했다.


이제 온도기록계의 전원 버튼을 켜면

정상적으로 불이 들어와야 한다.

긴장된 마음으로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 아무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을 다시 눌러봐도 기계는 묵묵부답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내가 엉뚱한 선을 건드린 걸까?'


요즘 차들은 전자 장치가 예민해서

선 하나 잘못 건드리면 괜히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냥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선배들에게 SOS를 칠까?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심호흡을 하고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살펴보기로 했다.

메인선, 절연 테이프, 그리고 접지선…

아! 마이너스 접지가 차체에 제대로 단단히 붙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급한 마음에 다시 볼트를 꽉 조여 차체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다시 버튼을 켰다.


삑-


경쾌한 소리와 함께 온도기록계 액정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아…….’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별거 아닌 단순 작업인데,

불이 들어오던 그 순간 느꼈던 쾌감과 안도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문득 종합상사 신입사원 시절이 떠올랐다.

해외 고객사에게 첫 영어 이메일을 보낼 때, 왜 그리 긴장을 했는지.


내용은 제대로 썼는지, 단가 숫자 하나 틀린 건 없는지

몇 번이고 마우스를 쥔 채 모니터를 뚫어져라 다시 읽어보지 않았던가.


무사히 온도 센서 선을 냉동탑 안쪽까지 연결하고 모든 마무리를 지었다.

시간을 보니 꼬박 두 시간 반이 걸려 있었다.


공장장님이 다가와 온도기록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전선 마감은 깔끔하게 되었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나의 첫 독립 작업은 최종 합격 판정을 받았다.


지금은 어렵지 않게 해내는 작업이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눈앞이 깜깜하고 손이 덜덜 떨렸는지.


지금도 가끔 온도기록계를 달 때면,

그때 흘렸던 식은땀이 생각나 괜히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그러나 마흔이 다 되고 나서야 맞이하는 또 다른 처음...

그것은 꽤나 서툴고 진땀 나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내 심장을 다시 거세게 뛰게 만들었다.


훗날 더 넓은 세상에서 온전히 내 기술만으로

우뚝 서게 될 그날을 떠올려 본다.


전선 가닥을 쥐고 쩔쩔맸던 오늘의 이 시간은,

그 묵직한 꿈을 향해 내디딘 가장 확실하고

정직한 첫걸음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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