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에서 울던 '똥손'이 '넘버원'이 되기까지의 1000일의 시간
야 임마, 이게 그렇게 어렵냐?
너만 보면 깝깝해 미치겠다... 넌 그냥 나가 있어!
실장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쏘아붙었다.
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가게 뒷문을 밀고 나갔다.
가게 뒷편의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니
정말 그 안에 같이 버려졌여야 했을 것 같은, ‘인간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똥손'이었다.
나보다 열살 어린 스무 살짜리 막내보다도 느렸고, 음식 퀄리티는 엉망이었고,
주문으로 들어온 음식은 하루에 몇 번씩이나 빠뜨려서 손님이 기다려야 했다.
평생 사무직만 하던 내가
캐나다에 한인 스시 레스토랑에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바로 '비자'와 '영주권'.
거짓 경력으로 취직했던 첫 직장에서
하루 만에 잘려버린 나는
다시 비자를 스폰해줄 직장을 찾아야 했고,
그렇게 나를 받아준 유일한 곳이 주방일이었다.
주방일이 험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현실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50배 이상이었다.
요리사로 일을 시작했지만, 음식에 대한 ‘즐거움’ 같은 건
단 1도 없었다.
기름은 뜨겁고, 칼날은 무섭고,
12시간 동안 서 있는 것조차 내 몸이 버텨주지 않았다.
실장님은 연신 소리쳤다.
“야! 정신 안 차릴래?”
“너가 방금 만든거 이건 못 써. 버려.”
내가 힘겹게 만든 음식은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꽂쳤다.
자존심이 바스라졌다.
어느 날, 내 앞치마를 빨래하려던 와이프가
주머니에서 새우를 발견하고는 크게 놀라며 물었다.
"왜 새우가 여기 주머니에서 나와?"
나는 부끄럽게 작게 말했다.
"내가 만들다가 망친 음식인데, 걸리면 혼날 것 같아서 거기에 몰래 숨겼어.."
매일 출근길이 두려웠다,
가게에 30분 전에 도착해도 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또 혼날 생각에,또 차가운 눈빛을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그것들을 미리 예상하고 마음을 굳게 다부지게 먹고
숨을 고르고 나서야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사무직의 몸으로 처음 하는 육체노동.
내 동작은 항상 느렸고, 칼질은 좀처럼 손에 붙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주방 사람들은 모두 나 때문에 힘들어했다.
말은 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다 드러났다.
나는 그 가게의 X맨이었기에, 모두가 나를 가르쳤다.
어떤 사람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어떤 사람은 차가운 말투로.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원망할 수 있었겠는가?
무능력이 곧 죄인걸..
겨우 죽을똥 말똥 막내 포지션에 적응했다고 느낄 때쯤
완전히 새로운 포지션으로 이동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세상에..
그 포지션에선 더 빠르게 움직여야 했고,
아침에는 재료 준비를 하고, 저녁에는 본격적으로
10가지 이상의 재료 손질부터 재료 주문하기, 스시 밥짓기,
손님에게 나가는 기본 롤까지 책임져야 했다.
물론 동료들은 당연하게 하는 일이었지만
나는 오버페이스로 달려도 턱없이 모자랐다. 그리고 금방 지쳤다.
나도 내가 답답하고 싫었다.
그리고 왜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함부로 도전하면 안되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당연히 모두가 예상한대로 또 크게 한 소리를 들었다.
또 주방 뒤에서 면담을 시작했다.
그날, 나는 결국 울어버렸다.
참았던 울음이 한 번 터지자
멈출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당황하며 위로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30살 건장한 남자에게서, 어린 아이처럼 전혀 제어할 수 없는 폭포수같은 눈물이 터지고 있었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걸.
이대로는 버틸 수 없었다.
‘준비’가 필요했다.
이대로 계속 혼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또 도망치지 않을거라면, 이제는 뭔가 준비가 필요했다.
'내가 경험과 실력이 없지, 성실함이 없나?'
면담 때 선배님이 했던 한마디가 자꾸 떠올랐다.
“이 바닥은 연차가 아니라, 얼마나 실력을 빨리 늘리는 데 집중하는 게 중요해."
"절대 경력이 오래되었다고 다 잘하는 게 아니더라.”
이상하게 이 말이 내 머리에 꽂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배운 것, 혼난 것, 반복됐던 모든 실수와 동작을
하나씩 타이핑하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출근하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주문 들어오면 어떤 손을 먼저 뻗어야 할까.'
'이 소스는 어떤 음식에 뿌려야 할까.'
새로운 걸 배우는 날이면
가르쳐주시는 걸 동영상을 찍어 와서
다시 쉬는 날 문서로 정리하고, 나만의 순서를 만들어 머릿속에 새겼다.
출근하는 길에 핸드폰으로 열어서, 내가 정리해둔 문서를 열어서
머릿 속으로 상상하며 하루 일을 통째로 시뮬레이션했다.
그러자 신기하게 조금씩 손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조금씩 칭찬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빠른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1인분을 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나는 그저 폐급을 탈출한 것만으로도 기뻤다.
돌이켜보면 실력이 가장 많이 늘기 시작한 시기가
항상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던 바로 이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가게에서 새 사람을 뽑아서 출근하기로 했다.
가게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경력이 있는 분이 오시기로 했다.
그런데 실장님이 말씀하셨다
“너보다 못할 거야.”
그 말이 처음엔 농담 같았지만
곧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오래 요리했던 사람들조차
왠일인지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말로는 그 동안의 경력을 자신감 넘치게 말하지만
그 말 뒤에 숨겨진 뭔가 엉성함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 동안 사장님과 실장님은 '똥손'인 나를 두고
절대 기준치를 낮추지 않고, 높은 커트라인을 통과하기까지
매일매일 혼내고 달래며 실력을 끌어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없이 혼나던 내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람들을 혼내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열 살이 많은 40살 형님을 실력으로 들이받고 있었다.
누구도 뭐라할 수 없었다.
주방의 세계는 나이 순도 아니거니와 기가 약하면 얕보이는 세계였다.
더 이상 기가 눌린 채로 일하고 싶지 않아서,
한국 문화가 어떻든 나이가 많은 분들하고도 위 아래를 확실히 그었다.
그제야 음식이 재미있어졌다.
똥손에서 벗어나자 음식의 각과 모양, 맛이 잡혔다.
손님 리뷰에 내 요리가 칭찬받는 걸 확인하기 시작했다.
재료를 구입해서 잘 조리해 손님에게 대접하고
매출이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이 배움의 현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직원들과 노가리를 까면서 빈 시간을 떼우는 것보다
일에 몰입하며 세상 근심을 잊은 채, 나의 모든 힘을 소진하는 데 재미가 생겼다.
그리고 어느 날, 실장님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스시 셰프 자리… 해볼래? 급여도 올려줄게.”
처음엔 단번에 거절했다.
그 동안 심신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답변이 많이 의아하셨을 것이다.
급여도 올려주신다고 했고, 사실 일식을 하는 사람들이면 '스시 쉐프'는 모두가 꿈꾸는 자리이다.
나중에는 본인의 가게까지 열 수 있는 기술들을 다 익힐 수 있는 포지션이었다.
하짐나 나는 거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었다.
가게에 들어온 순간부터 항상 배워야했고, 쉬는 날에도 공부했어야 했다.
사장님이나 실장님이 안계실 때는, 가게 매니저로서 역할을 했어야 했는데, 그 부분도 부담이었다.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자리이고, 손님과 소통하며 고객 관리까지 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재차 권유를 해주셨고, 받아들이고 해보기로 했다.
또 쉬는날에 연습해오면 될 것 아닌가?
과거의 성공 공식대로 한 번 더 해보기로 했다.
사장님도 이번에는 내가 압박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주셧다.
생선 기초에 대해서 알려주시고, 맛있는 모양으로 생선들을 자르는 법,
좋은 퀄리티로 생선을 보관하는 법 등 알려주셧다.
나는 그 모든 것을 촬영해서, 기록했다.
나는 쉬는 날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다시 영상으로 배우고, 다시 정리하고, 다시 이미지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쉬는 날이 지나면, 그 전주에 배웠던 것들을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내며 따라갔지만
여전히 사장님의 높은 기준은 맞출 수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나도 최대한 쫓아갔다.
결승점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것들이 빠르게 숙지하고 가자
좀 더 다양한 생선들을 알려주시기 시작했고,
고급 스킬들을 알려주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스시 셰프가 되어갔다.
덕분에 캐나다 이민 생활도 꽤 안정이 되어갔다.
이민자로서는 꽤 여유로운 생활이었다.
손님들을 상대할 때는, 역으로 사무직 배경이 도움이 되었다.
손님이 스시바까지 와서 스몰톡을 할 때는 부드럽게 말을 받아주었고,
나를 찾고 개인 팁을 주고 가시는 단골 아주머니도 생겼다.
"Your sushi is perfect today.”
그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일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내 분야가 전혀 아닌 곳에서 시작해서 인정받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재밌어졌다.
같이 일했던 필리핀, 네팔, 베트남에서 온 친구들과도
국경을 넘는 우정이 쌓이기 시작했다.
눈이 오는 날이면 먼저 퇴근시키고, 집이 가까운 나 혼자 1시간씩 뒷정리를 하고 갈 때도 여럿 있었다.
우리 가게에서 1시간 이상씩 떨어져 사는 어린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캐나다에서 눈이 쌓이면 대중교통이 마비되는 일도 흔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게에서 시프티가 적어서 고민을 하는 네팔 친구에게는
다른 한인 가게 일자리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 소식이 네팔 친구들 사이에 퍼져서,
내가 일을 그만두는 날까지 내 곁을 든든히 지켜주었다.
그럼, 원래 일하는 목적이었던 비자와 영주권은 어떻게 되었냐고?
우리 지역에서 캐나다 영주권은
불가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점점 받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매주 쉬는 날마다 도서관에 가서 영어공부를 하고 영어 점수를 올리고,
비자를 연장해가면서 다른 지역에 가야하나 노심초사했다.
결국 다른 지역에가서 영주권을 신청할 수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이유로 한국에 돌아오는 길을 선택했다.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사장님과 실장님 모두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나의 쓰레기 똥손시절, 내 어려운 시절부터 다 옆에서 봐우신 분들이시기 때문에
감회가 남다르셨을 것이다.
영주권을 따지 않고 돌아가는 것을 굉장히 아쉬워하셨다.
마지막 날에는 정말 상상할수도 없는 선물과 마음을 전달해주셨다.
감사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전적으로 이 두 분의 공이 컸다.
그냥 막내처럼 간단한 일만 하면서 3년을 보낼 수 있었는데, 젊음을 허비할 수 있었는데
정말 알차게 가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사실, 가게 밖에서는 그 누구보다 따뜻하게 보듬어주셨던 분들이다.
사장님은 내가 입사했을 때, 한국 음식으로 한 트럭 장을 봐서 우리 집에 두고 가셨다
내가 한번도 월급을 올려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지만,
사장님은 항상 부족함 없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실장님은 매일 밤 매번 안전하게 차로 데려다주시고,
좋은 생선부위가 나오면 가져가게 끔 나눠주시고,
가끔 음식을 주문해서 갈 때면, 용기가 터질 듯이 음식을 담아주셨다.
지금도 좋은 리더를 떠올리라고 하면 이 두 분을 회상하곤 한다.
그렇기에, 추운 캐나다 겨울을 세 번을 겪는 동안
넘어져도 계속 일어설 수 있었다.
지금 나는 한국에서 해외 영업 업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있다.
“그 고생했던, 지금과는 너무 다른 일을 했었던 캐나다 시간... 결국 버린 시간 아니었어요?”
나는 단 한 번도 망설인 적이 없다.
“아니요. 오히려 거의 하버드 MBA를 따는 것만큼 엄청난 시간이었어요."
사실 나는 같은 시기에 입사한 동료들, 그 이후로 들어온 후배들보다
나는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좋은 성과를 낸다.
“아직 회사 1년차 밖에 안되셨다고요? 진짜 초기 멤버이신 줄 알았어요”
모든 사람이 내 연차를 듣고 놀란다.
그때마다 속으로 조용히 웃는다.
유일한 비결은 쏟아지는 프레셔를 견뎌내면서 뚫고 가는 길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겪었다.
그것도 머나먼 타지에서,
내 적성도 아니었던 요리사 일을 하면서,
칼과 기름 앞에서 매일같이 실수하고 다그침을 받으면서.
그 3년이 내게 준 건 단순히 ‘열심히 일하는 법’이 아니었다.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직접 보고, 그것을 넘어가는 경험' 자체였다.
셰프의 세계는 효율이 생명이다.
음식 오더지가 내 앞에 쫙 깔리는 순간
1초도 허투루 쓰면 안 되고, 내 손을 어디에 뻗고 재료를 어디에 내려 놓을지까지
모든 행동이 디자인되어야 한다.
그게 몸에 깊숙이 새겨지자
사무직에서의 업무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라졌다.
요리사 시절에 각인된 셰프 DNA 때문이었다.
내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졌던 그 똥손의 시간.
손가락이 얼얼하고, 욕을 먹고,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을 고르며 버티던 시간.
그 밑바닥에서 결국 가게의 최고 셰프 자리까지 올랐던 경험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훈장이자,
지금의 나를 만든 정체성이다.
그 시간을 지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속도, 집중력, 멘탈, 책임감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지켜본 모두가 보았다.
스시 레스토랑에서의 3년의 시간은
내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깎아 만든 시간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