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렘가의 어둠에 우리의 희망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머물고 싶지 않던 우범지대 할렘가,
그곳이 우리 부부의 첫 신혼집이었다.
나는 꿈을 안고 막 신혼인 와이프를 데리고 캐나다로 왔다.
내 바램처럼 아름다운 소도시에 정착했고, 그동안 꿈꿔왔던 헬조선 탈출은 완벽해보였다.
이젠 한국에서 이주공사를 통해 돈을 주고 들어온 가짜 이력서로 얻은 직장에 잘 적응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맞다.
굉장히 부도덕한 일이었지만, 이 일 이전까지는 굉장히 착하게 살아왔던 나 아니었는가
남들도 다 하고 잘 살고 있는 것이었기에,
하늘이 이번에도 '눈치 있게' 내게도 눈을 감아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거짓으로 시작된 취업은 하루 만에 끝났다.
하루만에 해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하늘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결심했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정직하게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하루만에 직장에서 해고 당한 후, 밤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캐나다에서 재취업을 알아봤다.
다행히 무경력자도 채용하고 비자를 지원해주는 직장이 몇 군데 있었다.
그곳들은 모두 한인 인구가 많은 토론토에 있었다.
우리는 가진 돈이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기에, 그 기회 하나만 믿고 옷가방 몇 개를 들고 토론토행 기차에 올랐다. 여러 군데 면접을 봤고 다행히 취업을 할 수 있는 직장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토론토에 도착해서 10일 동안 임시 숙소에서 지내며
나는 일을 시작했고,
아내는 부지런히 우리가 살 집을 찾아다녔다.
여러 집을 알아봤지만 우린 워낙 돈이 없었기에 반지하만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에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도시에서 깨끗한 시작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던 중, 아내가 한 집을 보여줬다.
약간은 도시 구석진 곳이었지만, 쇼핑몰과 가까웠고
나와 아내만 쓸 수 있는 공간이었다.
나는 더 고민하지 않았다.
이제 삶을 ‘즐기러’ 온 게 아니라 ‘꾸리러’ 왔으니까.
집주인과 계약서를 쓰고 나니,
그제야 '후..'하며 안도감이 들었다.
그날 밤, 허름한 반지하방에 처음 누웠을 때
아내와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우리 둘만의 집이잖아.”
그 웃음이 참 따뜻했다.
하지만 며칠 뒤,
그 따뜻함은 서서히 식어갔다.
하지만 10일 안에 집을 렌트해야 했던 우리는
동네 사정을 자세히 알 여유가 없었다.
이사 후 처음으로 집 근처 쇼핑몰에 갔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몰에는 흑인용 가발 가게와 아프리카 의상이 가득했고,
거리에서는 힙합과 전통 북소리가 뒤섞인 음악이 울려 퍼졌다.
토론토에 한국인이 10만 명이라는데, 이 동네에서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양한 인종이 몰려사는 캐나다인데 대부분 흑인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직장에서 내가 정착한 동네를 같이 일하는 형에게 말했더니,형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나 거기서 일해봤었는데, 거기 완전 할렘이야.
총기사고도 나서 사람도 죽고, 절도도 많아. 당장나와!”
그제야 모든 게 한번에 이해됐다.
집값이 유난히 싸던 이유,
가게마다 달린 쇠창살,
쇼핑몰을 지키는 거대한 몸집의 보디가드들,
횡설수설하며 웃통을 까고 거리를 떠도는 사람들까지.
우리가 발을 들인 곳은,
바로 '할렘가'였다.
그래도 방법은 없었다.
반지하는 최소 1년 계약이었고, 이미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그 계약을 지켜야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수중에 있는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도망치는 게 불가능했기에,
오히려 그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먼저 교회를 찾았다.
한인교회 대신, 흑인들만 다니는 블랙 처치(Black Church)를 검색해 찾아갔다.
처음엔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경계했다.
한국인은 커녕 아시아인도 없는 흑인교회에 누가 제발로 찾아오겠는가?
"누가 너희들을 초대한거야?”
교회 입구에서 사람들이 물었다.
"인터넷 소개를 보고 왔어요"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안으로 들어가게 허락해주었고, 정말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우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흑인 분들이었다.
흑인교회 출석은 당연히 우리 부부에게도 엄청난 도전이었다.
사실 첫 교회 문턱을 넘기까지 한 달이 넘는 시간동안 고민하고 이 결정이 맞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편하게 살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지 않는가?
'내 동네'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섞이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딜 가서 적응하겠단 말인가.
물론 엄청 뻘쭘하고 익숙지 않은 분위기여서 불편했지만
매주 얼굴을 들이대고 빠짐없이 흑인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몇 주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자
흑인 친구들도 경계심을 풀고 우리를 진심으로 받아주기 시작했다.
우리를 크리스마스때 집에 초대하고,
근처 근사한 식당에 데려가 밥을 사주고 대접해주는게 아닌가.
흑인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와이프의 친구들은 집에서 음악을 틀고
큰 소리로 웃으면서 웨이브를 추기도 했다.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같이 저녁을 먹어주고,
본인들이 캐나다에 정착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친구들이 아니면 평생에 못 먹어봤을
자메이카 저크 치킨을 먹어보기도 하고,
나는 흑인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튀김 요리를 해서 대접해주었다.
이후에는 친구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북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같이 보냈던 모든 시간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시간이 있다.
바로 교회에서의 찬양시간이다.
와 정말 괜히 '흑인 소울'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었다.
찬양시간에는 모든 사람들이 가수였다.
누구 하나 제대로 음악을 공부한 친구들도 아니었을텐데,
악보없이 완벽한 조화로운 화음을 즉석에서 만들어냈다.
친구들의 성량은 큰 스피커 소리를 찢고 나왔다.
도무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지기 싫어하는 자존심 쎈 한국인이었지만
흑인 DNA에 각인된 노래실력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 새 흑인 사회에 자연스럽게 눈 녹듯이 녹아들고 있었다.
한국에서처럼 목례 대신에 포옹을 하며 인사를 하고,
악수 대신에 Fist Bump(주먹인사)를 하고 있었다.
분명 할렘가였지만 여기에도 '사랑'이 있었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섬겨주었고 품어주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흑인 친구들이 한 가지 질문을 했다.
"한국에도 인종 차별이 있어?한국 사람들이 흑인들을 차별하고 그래?"
교회 모임이었지만, 진실을 도저히 말해줄 수 없었다.
마음 속으로 눈을 질끈 감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
물론 그곳에서 모든 순간이 행복한 건 아니었다.
아내가 혼자 장을 보러 갔을 때
거리를 지나다니는 낯선 남자들의 끈적거리는 눈빛과 이상한 휘파람 소리,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모텔 앞에서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멍하니 앉아있는 모습들
마약으로 뇌가 망가진 사람들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괴상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가끔 들리는 폭죽 소리에
이게 폭죽 소리인지 총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면
순식간에 등골에 땀이 맺히고 집에 있는 불을 다 끄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버텼다.
작지만 소소한 순간에 웃으며, 함께 말이다.
작고 차가운 집이었지만
아내가 붙여놓은 1~2달러짜리 장식 덕에
집 안엔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크리스마스엔 작은 트리를 세우고,
주말엔 멀리 나가 우리가 꿈꾸던 캐나다 풍경을 보며
다시 힘을 얻고 서로를 응원했다.
그렇게 3년의 캐나다 생활 중 2년을 그곳, 할렘가에서 보냈다.
한인 사회 바깥에서,
낯선 세계 속에 파묻혀 살았던 그 시간은
내 인생의 가장 치열한 훈련이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우리 부부에게 ‘버티는 법’을 가르쳐줬다.
이제 우리 부부는 웬만큼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불편도, 어떤 고단함도 그때를 생각하며
"그 반지하의 겨울보단 견딜 만하다."말하며
감사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나 혼자였다면 그곳에 절대 오래 있지 못했을 것이다.
흑인 친구들의 따뜻한 '정'
10,000km을 날아온 장모님의 택배 선물들
안전하게 집에 들어가라고 차로 매번 데려다 주었던 사장님, 직장 동료들...
홀로 차디찬 골방 반지하를 아담한 러브하우스로 꾸미고
내게 끊임없는 용기와 사랑을 부어준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