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 클라인바움, <죽은 시인의 사회>
학부 4학년 2학기에 첫 발을 디디기 하루 전 날, 대학생활의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긴장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그날따라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서점에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곳에서조차 맘 편히 읽고 싶은 책을 고르기 보다는, 코앞에 다가온 임용고시 관련 수험서들을 영혼없이 뒤적이고 있던 중이었다.
발길을 옮겨 계산대로 향할 때 즈음 우연히 지나친 소설 코너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책이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 구매가 조금 더 저렴하다는 이유로 항상 오프라인 서점에서의 구매를 망설이던 나였지만, 그 날 만큼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 책을 지금 당장 내 품 안에 안고 집으로 향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일었다. 항상 계획적인 지출만을 하던 나의 관성과 달리, 그 날의 나는 결코 저렴하지 않았던 책값을 지불하고 집에 돌아와 새벽에 이를 때까지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매년 졸업학년이 가을 학술제에서 연극을 무대에 올리는 전통이 있었다. 그 해 연극에서 나는 조연출을 맡았고, 가을 내내 모든 시간과 열정을 바쳐 준비했던 작품이 바로 이 <죽은 시인의 사회> 였다. 연극 대본을 읽던 열 여섯의 어린 나는 이 작품을 단순히 현대의 획일화된 교육에 일침을 던지는 흥미로운 책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로부터 7년이 흘러 어느 개강 전날 밤잠을 설치며 같은 작품을 읽어 내려가던 스물 셋의 나는 학교라는 사회 안에서 숨 막혀 죽어가는 학생들의 모습이 나와 꼭 닮아 마음이 아렸다. <죽은 시인의 사회> 는 당대의 학교사회가 요구하는 것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학생들 스스로의 생각과 꿈을 키워주고자 하는 존 키팅이라는 한 선생님의 교실에서 출발한다.
책을 읽으며 과연 나는 16년간의 학교교육을 받는 동안 이러한 수업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돌이켜보았다. 누군가 정해준 질문에 대한 답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고 사색하기를 멈추지 않는 교실. 안타깝게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교사가 던져 주는 것들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꼭꼭 씹어 소화시켜 나의 것으로 만들어내기에 분주한 학생이었다.
선생님이, 그리고 교과서가 가르치는 지식들에 의문을 던질 새도 없이 스펀지처럼 그것을 빨아들이기에 바빴다. 학교가 가르치는 것들이 진리가 아니고,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려 지난 날들을 돌아보니, 나는 이상하리만큼 학교라는 사회 안에서 순종적인 학생이었다. 학교가 제시하는 것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흡수해 왔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처럼.
대학생활 마지막 학기에 '교육의 사회적 기초' 라는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에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존재했다. 여느 평범한 수업들과는 다르게 교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떠한 자료도 나누어 주시지 않으셨고 단 한 번도 칠판에 필기해야 할 내용들을 적어 주시지 않으셨다. 3시간을 달려가야 하는 긴 수업인데 출석부 외에는 별 다른 자료를 손에 들고 오시지 않으신 교수님을 보며 의아했다. 보통 교수님들의 손에는 긴 수업을 꾸려나갈 자료들과 핸드아웃, 혹은 교실 앞 화면에 띄울 자료라도 담긴 usb가 들려있기 마련인데... 수업에 들어와 우리들의 이름을 차근차근 부르시고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교수님이 처음으로 건네신 질문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질문을 받는 순간 내 모든 사고체계가 블랙아웃 된 것 처럼 멍해졌다. 처음엔 왜 이리도 당연한 것을 물어보시는지 그저 당황스러웠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원하는 것들을 선택할 수 있고, 뜻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자유인이 아니라면, 사실상 무엇인가가 나를 구속하고 있다는 것일까. 그런데 시간을 두고 찬찬히 고민해 보니, 내가 자유라고 여기며 누리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사회가 정해준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했던 자유'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다른 학우들과 이런 저런 생각을 나누면서,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 파격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한 친구는 어쩌면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라는 개념 조차도 사회에 의해 학습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내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왔던 것들이 조금은 낯설고 이질적으로 다가오며 그날 토론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다면 수업을 마치고 책장을 덮는 동시에 우겨넣었던 지식들은 홀연히 날아가기 마련인데, 그날 만큼은 참 달랐다. 지난 16년간의 학교교육 속에서 처음으로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등장하는 키팅 선생의 수업을 만난 것만 같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읽으며, 키팅의 학생들이 동굴 속에 모여 밤마다 시를 낭독하고 탄성을 내지를 때 나도 그들과 동일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규율에만 갇혀 살았던 아이들이 몰래 학교의 담을 넘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통쾌했고, 연극을 하고 싶었던 아이가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자살을 선택했을 때 마음이 아픔과 동시에 내 안에 이유 모를 갈증이 해소되었다.
처음에는 지나온 날들에 대하여 큰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왜 이러한 대리만족을 느끼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이유는 명확했다. 그동안 내가 당연히 가져왔던, 그리고 가졌어야만 했다고 여기던 자유는 언제나 나를 둘러싼 사회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만 속해있었고, 사회가 그려둔 자유의 테두리 안에 머무는 것에 대하여 이상하리만큼 순종적이었던 나는 그 틀을 넘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토록 순응적인 사고체계를 가지게 한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는 가정이었고, 두 번째는 학교였다. 가정에서는 하나뿐인 딸로서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품고 있었고, 보수적인 부모님의 시선에 어긋날 일을 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을 누리는 인정받는 학생이고 싶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고등학교 사회문화 시간에 가정과 학교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회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배웠던 것 같다.
따라서 가정과 학교는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고, 항상 나에게 좋은 것만을 공급해 줄 것이라는 무의식이 내 안에 자리했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가정에서 부모님이 나에게 제시하는 기준과,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지향하던 규율에 아무런 의심 없이 나를 맞춰갔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대체 불가능한 정답으로 여겨왔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나의 자유는 항상 그들이 허락해 준 선 안에 머물렀다.
하지만 사춘기의 나는 가슴이 답답해 미쳐 버릴 것 같은 나날들에 에워싸여 뒤돌아보지 않고 집을 뛰쳐나가 돌아오지 않고 싶었다.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언어로 그리고 몸짓으로 차오르는 분노를 마음껏 표현하고 싶었다. 때로는 수 십 번 망설이고 고민하기보다 그저 내가 좋은대로, 내 마음이 이끄는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정해준 선을 넘어가는 순간 밀려올 온갖 부정적인 반응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행동의 결과를 감수하며 주어진 선을 넘어갈 만큼의 용기가 없었던 나는 스스로에게 허락된 자유의 범주에 순응했다. 어린 날의 치기로만 생각하기에는 지금도 내 안에 그러한 갈망이 자리한다. 하지만 한결같이 이렇게 살아온 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보다 넓은 자유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이제까지 나의 삶을 붙들어 온 관성을 깨고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을까?
피터 버거는 그의 저서 <사회학으로의 초대>에서 '사회는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고, 경험을 정리하고, 우리들 자신의 존재를 해석하는 근본적인 상징적 장치를 우리에게 미리 정해놓는다' 고 말했다. 나를 둘러싼 가정, 학교, 그리고 직장이라는 사회는 내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 이상으로 나의 삶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크고 작은 선택들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궁극적으로는 현재의 정체성을 가지도록 이끌어 온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사실 나를 둘러싼 사회는 부정적인 요소들 보다는 유익하고 긍정적인 것들을 더 많이 공급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들로부터 흘러 온 것이 하나 둘 쌓이고 발전하여 지금의 내가 존재하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우연한 시점에 읽게 된 책과, 터닝포인트가 된 한 수업을 통하여 내가 속한 사회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이제까지 가져본 적 없는 새로운 시각을 품어보게 되었다. 사회가 나에게 가르치고 공급하는 것들이 늘 유익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내려놓고, 조금은 의심하고 고민하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직 이 사회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지난날의 관성을 거스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나의 이 자신 없는 문장 뒤에 'Why not?' 이라는 짧은 응원을 남기셨던 존경하는 교수님을 기억하며 질문하고 의심하는 사람으로 오늘도 살아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