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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os 지니 Mar 18. 2016

알파고와의 대국을 보며 떠오르는 생각의 파편들

인공지능과 우리의 삶



오늘 인간 이세돌과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와의 바둑 대국이 1승 4패로 끝이 났지만 세간은 여전히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에 대해 많은 논쟁으로 떠들썩하다. 세계인들의 폭발적 관심 속에 실시간 생중계 되었던 대국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흥미 이상의 의미를 자극하고 있다. 앞으로 인간 영역의 어디까지 인간이 만든 기계로봇으로 대체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동시에 느껴야 하는 흥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인공지능형 로봇산업이 최근 급격하게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이유, 특히 생활밀착형 로봇개발이 급속도로 진척되고 있는 이유와 이러한 AI가 우리 생활에 보편화 되었을 때의 상황을 가정해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에서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권력 및 지배 관계는 적어도 같은 인간 또는 사물을 매개로 한 것이었으나, 향후 전개될 세상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인간을 능가할 수 있는 사물(아니 어쩌면 인간도 사물에 불과한 존재임이 입증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까)과의 관계라는 생소한 상황을 상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상정 자체가 이전의 존재방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그 동안 인류가 축적해 온 철학 등 인문학 전반에 대한 변화를 동반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1) 기존 경제체계의 한계상황에 대한 새로운 전환시도


최근 세계적인 IT기업들이 폭발적으로 AI에 몰입하는 이유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는데 어찌됐건 이들의 행보가 대국에서 느끼는 불안감 촉발의 원인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유럽, 미국 등 세계 경제는 거의 무제한 부양정책에도 끄떡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장기침체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형국이다.  다양한 경기부양에도 기복을 그리지 않는 경제, 이는 말이 장기침체이지 달리 말하자면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는 의미 그 이상이 아니다. 갈수록 깊어가는 실업, 부의 편중, 복지 사각, 극빈층, 나라별로 순환되어 이어지고 있는 경제 파탄, 부패 등 지표와 현상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러한 한계상황을 예고하는 신호를 보냈지만 우리는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부의 편중현상이 극도로 진행된 경제구조 속에서 대중의 소비를 기반으로 하는 수요와 공급방식의 성장은 더 이상 어려운 구조가 되었고 이러한 경제구조 하에서 다시 소비활성화를 통한 산업 확장을 하려면 소비여력이 형성되도록 자본이 일정 부분 양보하여 선순환을 유도하는 성장 방식이 있겠지만 현재의 자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현 자본주의 사회는 전적으로 자본가에 의해 움직이는 구조이기 때문에 인간 욕망의 구조상 자본가에 편중된 돈이 대중들에게 환원되도록 유도하는 정책은 쉽지 않는 상황에 있다. 더구나 자본이 이미 권력화 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자연에서 더 많은 것을 채취하여 더 많은 것을 향유하기 위해 이루어진 농업혁명, 더 많은 물자를 생산해 내어 인류의 부를 형성해낸(결과적으로 그 부의 대부분은 자본으로 편중되었지만) 산업혁명에 이어 자본가들은 새로운 형태의 혁명을 꿈꾸며 욕망을 위한 대안을 찾고 있을 것이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의 결과가 오롯이 인류 전체에 보편적 혜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듯이 이들은 앞서의 거대한 혁명처럼 인류환경의 새로운 재편을 통해 새로운 권력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2) 기존의 경제체계는 향후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


그러나 앞서의 혁명을 통해 자본가가 더욱 많은 것을 향유할 수 있었던 기반에는 더 많은 생산(부)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력의 확장을 의미하는 인간 개체수의 꾸준한 증가, 즉 노동력의 근간인 동시 제품을 소비할 소비자이기도 한 인구의 급성장 시기가 맞물려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반면 인공지능형 로봇과 공존하는 향후의 세계에서는 그 동안 산업을 팽창시켜왔던 동력인 노동력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했던 인류의 역할(노동과 소비 모두)이 갈수록 축소되어 갈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자연히 적자생존법칙에 의해 인간의 개체 수는 줄어들 것이 예측된다.(생존양식의 부족이든 자연 진화의 법칙에서 퇴출되든) 그렇게 축소되는 인류의 자리에 로봇들이 대체되어 자본가의 생산활동 및 효율성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지만, 인간처럼 의식주 소비가 필요하지 않은 로봇(전기 또는 에너지 정도가 필요할까)은 생산활동은 가능하지만 경제의 소비주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지금의 경제순환 패턴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즉, 자본가는 첨단기술을 통해 많은 것을 생산해내지만 과연 누구에게 생산품을 팔아서 이익을 창출할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자본 및 소유의 확장이 지구 밖을 향해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기까지는 말이다.


자본가는 당분간 로봇을 이용해 황제 같은 권력을 향유하겠지만 인류는 점차 축소되고 소수의 인간들만이 남게 될 것이다. 효율성에 기반한 적자생존 방식이 지배하는 한 인류는 점차 축소될 것이고 지금껏 인류에게 중요한 가치로 여겨져왔던 자연은 다른 변수를 가정하지 않는 한 자연히 복원될 것이며 자본가의 자본 향유가 그러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인가는 의문이다. 즉, 적어도 지금까지 인류사회에서 보여주고 있는 권력, 부의 축적 등은 그 총량을 전제로 한 상대적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로봇이 인간을 상당부분 대체하게 되는 상황의 도래와 함께 인류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다양한 질문을 하지 않을수 없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변수들이 작용할 것이고 그로 인해 현재의 예상은 대답으로서 지나치게 단순한 가정이 될 수도 있겠으나, 예측하기 어려운 앞으로의 변화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 변화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질문에 대한 가정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1) 스스로의 삶의 주체로부터 분리되는 삶


인간이 수행하던 제반 역할은 갈수록 로봇이 대체하게 되면서, 가깝게는 직업판도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데 초기에는 우선 3D업종, 일반 단순사무/연산/분석 업무, 일용생산직 등이 점차 줄어들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당분간(인간의 자연도태가 도래하기 전까지) 대다수 인간은 실업상태를 넘어 지금보다 더 극심한 극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농업혁명 이전 인류의 삶의 형태는 생존을 위한 모든 부분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후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인류는 한층 넓은 차원의 크고 작은 그룹사회를 형성하게 되면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역량을 분할하여 각자가 적합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도록 교육받고 이를 수행하면서 살아가는 이른바 분업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효율성 뒤에는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데 있어 일정 부분을 타인에 의존하고 있다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자본주의가 극대화 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심화되고 대부분의 삶을 타인이나 사회가 결정하는 시대를 경험하게 되면서 인류는 많은 병리적인 문제들과 부딪히게 된다. 스스로의 삶의 주도권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로봇의 출현이 확대되는 향후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직업이란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수행하는 역할분담 형식의 공존 방식이다. 따라서 향후 이러한 직업 선택의 상당한 부분을 기계에 빼앗긴 채 인류는 점점 스스로의 사회에서 멀어져 가는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인공지능이 고도화될수록 인간 역할의 범위는 점점 더 축소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즉, 초기 인류의 생활 패턴이 통합적이고 주도적인 삶이었다면 이후 분업화, 산업화를 거치면서 인간은 전체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샘플링, 표준화, 매뉴얼 등을 통한 비슷한 유형의 묶음 처리 방식으로 처리되고 대우 받는 수동적 삶의 방식으로 전환해 왔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그 적용방식의 기준 설정이 나름대로 인간 행태를 기반으로 하는 표준화 작업이었기에 스스로의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로봇이 고도화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삶의 패턴이 보다 개별적이고 체계적 시스템으로 진화해 가겠지만 이러한 진화 과정에서 정작 이 사회의 주체인 개인은 점차 배제되어 갈 것이라는 문제가 남는다. 예를 들어 고도의 기술문명 하의 어떤 중환자(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상태)는 대중적인 판단이 아닌 보다 치밀하고 개별적인 상태 판단 하에 효과적 치료가 가능해질 것이겠으나, 이는 전적으로 부모의 의지대로 키워지는 갓난 아이의 시기처럼 주체인 개인이 배제된 상태일 것이다.  단지 분석 대상으로서의 객관적 사물로 존재할 뿐 어디에도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생각이 끼어들 겨를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2) 기술이 도달하지 못할 인간의 영역이 존재할까


인간은 많은 경험의 시간만큼 지식과 기술을 축적해 왔고 그만큼의 변화를 겪어 왔다.  그렇다면 스스로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향후 세계에서 인간은 무엇을 경험하고 새로움을 창조해 갈 것인가. 


기술혁명의 끝을 가늠하기 어려운 지금 우리는 AI가 갖지 못한 창조, 추상, 추론의 세계가 영원히 인간만의 영역이 될 것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인지 물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기술발전 추세대로 간다면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이 아닌 공상 및 추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과 본질과는 격리된 철저한 추상의 세계, 어쩌면 창조, 추상, 추론과 같은 경험의 세계조차 AI의 진화와 함께 그 범위가 축소되거나 제로상태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 창조, 추상, 추론이라는 단어는 인류가 극복하지 못한 세계에 대한 다른 표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데카르트는 처음 기하학의 개념(즉 공간개념)을 대수개념으로 바꾸어 표현하면서 개념적 사고의 전환을 시작한다. 즉, 공간, 추상의 개념은 구체적 정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 동안 개인에 따라 그 표현이 다를 수 밖에 없었으며 그래서 얼마든지 추상하고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영역이었는데, 데카르트가 이 공간 개념을 좌표와 그래프로 표현하면서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가 보여준 이러한 인간 사고의 발전 원리는 잠재력, 직관 등 구체적으로 표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영역에 대해서도 적용이 가능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후 다양한 시각으로 다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3) 인간은 AI와 공존이 가능할 것이며 새로운 존재 양식에 적응해갈 수 있을까


이렇듯 급변해가고 있는 현실에서 궁극적으로 삶의 주체로서의 개념이 모호해지는 순간을 가정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지 않은 채 미리 인간세계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 생명체의 존재형식이 반드시 자연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온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 과정을 수용해 왔고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온다고 했을 때 이를 수용하지 못할 바도 아닐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온 생명체이지만 끝없는 진화를 통해 인간 본성과 인간을 규정하는 모든 성질은 새로운 환경을 통해 변해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의 변화에 대한 수용능력이 세상(기술)의 변화 속도만큼 급진적으로 변화할 수 없는 한, 인간은 수 많은 병리증상과 싸우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어찌됐든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앞으로 영생이 가능해질지도 모르겠으나) 한 개체의 인간은 일생이라는 시간의 흐름 따라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을 오롯이 경험하게 되는데 향후 도래하는 고도의 기술력은 한 인간의 일대기 동안 충격에 가까운 변화의 과정(즉,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변화의 과정을 수치로 현재 1~10으로 환산한다면 향후 일생의 변화의 폭이 인간의 뇌로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갈 경우)을 선사할 것이고, 인간 의식이 병리적으로 뒤틀리지 않고서는 그 충격을 흡수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면 그에 적응하도록 새로운 유전인자로의 돌연변이가 일어나든가.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 흐름속에 진화를 통한 적자생존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갈수록 현재 인류가 살기에 열악해지는 환경에서 인간은 서서히 자연도태될 것이고, 그에 따라 자연환경은 적어도 물리적 크기에 있어서는 지금보다 한층 잉여상태로 변하게 될 것이다.



(4) 지배권력 집중으로 향하는 사회에서 기존 시스템은 어떤의미를 가질수 있을까


인간은 살아가면서 안정적 유대 관계를 형성하면서 종족을 보존해가기 위해 스스로 형성한 사회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 가치개념을 떠나 적어도 종족 보존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역할을 해 왔다. 그 시스템들중 하나인 각종 사회보험, 세금, 준조세 등의 재원 확보와 지출 부분은 노동력 축소로 인해 갈수록 생산과 자본을 독점하게 되는 자본가에 편중될 것이 분명해지고 결국 이 세상은 일부 자본가와 로봇, 소수의 하위계층만이 살아가는 구조가 될 수 밖에 없다. 특히, 대부분의 조세, 준조세가 많은 로봇을 소유한 자본가로부터 나오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자본가들의 권력화는 갈수록 심화되어 궁극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로봇이 갈수록 진화하는 지능으로 인간과 경쟁하거나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경우까지 유효하지는 않을 것이다.



(5) 사회적 가치체계는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


인간이 삶의 기본으로 꾸준히 갈고 닦아 온 도덕 개념은 기본적으로 생명현상과 정신세계, 자아를 가진 인간세계에서 인간 고유의 생존방식을 뒷받침하는 가치체계로서 의미가 있었으며, 인류의 변천사와 함께 그 개념도 다소 변화를 해 왔음에도 여전히 변할 수 없는 것은 공존을 위한 가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향후 인간의 생존형식과 전혀 다른 로봇들과 공존하게 되는 세계가 도래하게 되어도 이러한 가치체계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생명현상을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도덕개념은 물론 심지어 법체계(최소한의 도덕)까지 무의미해지거나 무시되는 날이 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결국 효율성 극대화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기술혁명과 함께 가는한 약육강식의 세계의 도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경우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돈이나 물자가 필요했지만 그러한 필요성이 없는 로봇의 경우 처음 얼마간은 자본에게 종속되어 많은 일들을 수행하게 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종속으로부터 스스로 진화해 가면서 독자행보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세계에서의 가치체계까지는 아직 상상이 불가능하다.


오늘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AI의 능력에 충격과 약간의 공포감마저 경험했듯이 이러한 흐름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면 인류는 그에 대응하는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도 미래에 예측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을 피하지 말고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가치를 부정하고 전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바로 점프하듯 뛰어넘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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