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적인 과로사회로 갈 것인가.”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려면 시간과의 싸움은 필수다.” 최근 탄력적 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비롯한 노동 현안을 둘러싸고 노동계와 경영계, 그리고 정치권이 치열하게 논쟁 중이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현행 탄력적 근로시간제(근로기준법 제51조)는 2주 단위와 3개월 단위의 2가지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2주 이내의 단위기간과 3개월 이내의 단위기간 모두 일정한 단위기간을 평균한 1주간의 근로시간이 40시간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에서 운영하되, 2주 이내의 경우 특정한 주의 근로시간은 48시간을 초과할 수 없으며, 3개월 이내의 경우 특정한 주의 근로시간은 52시간을, 특정한 날의 근로시간은 12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면 특정한 주, 특정한 날의 연장근로에 대해 별도의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주로 쟁점으로 부각된 부분은 3개월 이내의 단위기간으로 특정 주의 근로시간을 52시간까지 허용하는 단서조항(근로기준법 제51조 제2항)에 연장근로 12시간을 추가 근무하면 최대 주64시간까지 장시간 노동이 가능해지는 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위기간이 6개월 또는 그 이상 확대되면 장시간 노동 강도는 더욱 심화된다는 점이다.
기간 확대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현행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에 관한 고용노동부 고시에 비춰볼 때 ‘현행 3개월짜리 탄력적 근로시간제가 이미 과로사가 가능한 노동조건을 열어두고 있는 셈’이며, 이것이 6개월로 늘어나게 되면 ‘과로사의 조건을 정부가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된다고 주장한다. 즉 탄력적 근로시간제 기간 확대는 정부가 정한 과로사 기준인 ‘12주 동안 1주 평균 60시간의 근로’를 위반하게 되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
반면 경영계에서는 기업이 일감을 확보하고 적기에 최상의 품질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근로시간이 유연하게 운용돼야 하며, 글로벌 경쟁에서 선도적으로 시장 수요에 대응하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시간과의 싸움이 필수이므로 특정 기간의 근무 집중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근로시간을 단축하고 휴일을 증가시키는 등 근로자도 일과 생활의 조화를 꾀할 장점이 있는 만큼 현행 제도의 짧은 단위기간과 까다로운 도입 요건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3개월 단위기간의 출근일과 근로시간을 사전에 특정해야 하는 요건으로는 중간에 휴가, 휴직, 퇴사 등 결원이 발생하거나 신제품 출시 이후 갑자기 생산량을 늘려야 하는 경우를 대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근로시간 조정의 기본 계획만을 협의하는 수준으로 개선되어야 하며, 서면 합의 요건 역시 대상 근로자들의 의사가 왜곡되지 않도록 해당 근로자 대표와 협의를 거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경영계의 주장을 요약하면,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적극 활용하려면 단위기간(현행 3개월)을 보다 확대하고 까다로운 도입 요건(근로시간 사전 특정, 서면 합의)도 완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일면 시대의 흐름에 맞는 주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노동력 제공자인 사람에 대한 고려는 없고 노동법과 탄력적 근로시간제에 대한 이해도 부족해 보인다.
근로기준법이 법정 근로시간 한도를 1일 단위, 1주 단위로 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기계와 달리 인간은 하루 세끼 밥을 먹어야 하고 제때 잠자고 휴식도 취해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으며, 지속적으로 노동력도 제공할 수 있다. 기계처럼 마냥 돌려도 되고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몰아 쓰다가 폐기해도 되는 사물과 다르다. 따라서 노동으로 인한 피로도와 피로 회복 기간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를 고려한 단위기간이자 근로의 상한이 바로 1일, 1주이며, 그에 따라 노동 강도가 관리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문제는 계절적으로 업무의 번한(繁閑)이 있거나 IT 업종 개발 업무처럼 특정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경우다. 이런 사업의 특수성을 감안해 불가피하게 법 기준을 넘는 근무 형태를 인정한 것이 바로 탄력적 근무제라는 예외 조항이다. 예외를 인정한 조항이니 근로자의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단위기간과 허용 시간 등을 제한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어느 정도로 제한할 것인가’인데, 단위기간 등 기존의 기준에서 후퇴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만큼 노사 간의 대립도 치열하다.
먼저 근로일정을 특정하는 대신 ‘근로시간 조정의 기본 계획만을 협의’하는 수준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경영계 주장을 보자.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기본적으로 근로시간이 고르게 배분되지 못하는 특성을 가진 불안정한 근로 형태다. 게다가 근로일정조차 특정되지 못한 채 ‘기본 계획만을 협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면 일과 생활의 균형이 어렵고 사업주에 대한 노동의 예속은 더욱 강화되어 노동법 취지에도 반하게 된다.
한편 근로자도 일과 생활의 조화를 꾀할 수 있다며 ‘단위기간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노동’은 저축했다가 어느 날 일시에 목돈으로 빼서 쓸 수 있는 적금이 될 수 없다. 노동법 제53조(연장근로의 제한)와 제56조(연장·야간 및 휴일 근로)에서도 연장·야간 및 휴일 근로에 대해 추가 50%의 가산율을 지급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1일 2시간, 주 12시간을 초과하지 못하게 제한하고 있다. 바로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해서다. 단위기간을 늘려 총량만 넘지 않게 노동을 모았다가 필요할 때 집중적으로 쓰면 노동자도 좋은 것 아니냐는 주장은 인간의 생체 리듬을 무시한 발상이다.
다음은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서면 합의’ 사항이다. 경영계의 주장처럼 과연 개별 근로자(또는 대상 근로자)가 회사와 개별적으로 합의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전체 근로자 대표와 서면 합의를 하도록 한 것은 자본에 대항할 수 없는 개별 노동자에게 주어진 일종의 단결권적 성격이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1천 명인 사업장에서 일반 노동자와 다른 불리한 근로조건을 적용하게 될 대상자가 5명뿐이라면, 그 5명이 자유로이 사업주와 합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자신들에 대한 해고권, 업무배치권 등 인사권을 가진 사용자를 상대로 이들 노동자들이 제대로 주장하고 합의를 도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런 저런 논의가 과열되자 정부는 부랴부랴 다른 나라의 운영 사례를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신중하고 이성적인 접근인 듯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작은 제도 하나만을 검토해서 지금의 대립적인 노동 현안의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것 아닌가. 검토를 하려거든 노동조건 전반, 노동자들의 삶과 연결된 분배구조와 경제구조 전반을 검토해야 한다. 노동자는 필연적으로 기업에 노동을 제공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즉 노동은 독립변수가 아니고 자본이나 생산과 맞물려 돌아가는 종속변수인 것이다. 당연히 노동 이슈들도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불거져 나오기 마련이지만, 그 해법을 말할 때는 항상 노동자의 노동조건만을 가지고 갑론을박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생산 활동 결과인 국민총소득(GNI)의 분배 추이를 보면, 기업이 가져가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상승한(10.6%p 상승) 반면, 가계소득 비중은 11.4%p 수직 하락해 왔다(1998년 대비 2017년, 2018 국회 예산정책처). 이런 불평등 구조를 외면한 채, 노동 현장만 들여다본들 돌려막기 식 해법 이상의 것이 나올 리 없다. 최저임금과 주 52시간제를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싶다면 반드시 노동조건들과 맞물려 돌아가는 연관된 조건들부터 살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제도를 운영하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살피기보다 제도의 근본 가치부터 흔들어대는 습성이 있다. 법률에 명시돼 있음에도 관행상 지키지 못해왔던 주 52시간 노동제(법정근로 40시간 + 연장근로 상한 12시간)를 이제 제대로 지켜보자는데, 불쑥 탄력적 근로시간제를 손 보자거나 고용률 저하를 들먹이며 최저임금 인상율과 산입범위까지 흔들어댄다.
법이 실현하려는 취지를 매번 원칙 없이 이리저리 흔들고 나면 남는 것은 이해당사자들의 싸움판이고 지켜야할 중심은 늘 휘둘릴 수밖에 없다. ‘원칙’이란 현실에서 발생할 다양한 문제들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더 넓은 그릇으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라면 원칙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운영상의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일이고 수정할 부분은 문제를 유발한 잘못된 환경과 관행이지 ‘원칙’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산업기반을 닦기 시작한 것은 60・70년대부터다. 도시 노동자가 막 생겨나기 시작했고 산업 현장에서의 노동 수급의 불균형은 노동자를 살인적인 노동으로 내몰았다. 회사는 그들을 먹여 살리는 주인이었고 모든 삶이 회사의 사정에 맞추어졌던 시절이다. 지금은 주 5일제가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실시되고 있지만, 산업화 이후 상당한 기간까지 노동자들에게 휴일 개념도 없었다. 물론 ‘주 휴일’의 법 조항은 있었으되 권리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1970년 11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외쳤던 전태일 분신 사건도 그런 암울했던 상황에서 일어났다.
이제 산업사회가 안정 궤도에 진입한 지도 오래되었다. 그러나 자본의 축적이 기형적일 정도로 심화된 지금도 노동자는 여전히 이 산업사회(실은 자본가)가 마음대로 부려도 되는, 언제라도 희생할 준비를 해야 하는 대상처럼 여기고 있다. 그 동안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평균적인 작업 환경도 개선되었지만 기업이나 노동자 스스로도 노동 의식에 있어서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60・70년대나 일어날법한 김용균 사건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고 반복적으로 예측되는 사고에도 서로 묵인하고 방치하고 있다.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우리도 해마다 노동권을 개선하는 쪽으로 법 개정을 거듭하고 있지만 노동의식은 왜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까. 이유는 노동 교육의 부재에 있다. 그저 지켜야할 번거로운 ‘룰’ 정도로만 인식할 뿐 왜 이런 법 조항들이 필요한 것인지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도는 끝없는 보완 속에서 운영되기 마련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역시 어떻게 어떤 수준으로 바꿔나갈지 논의가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을 위한 제도 개선에 인간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논의는 무의미하다.
최저임금 등 정책 리스크가 조선업의 생태계를 무너뜨리고 있어 관련 기업들이 줄줄이 폐업하거나 위기를 맞고 있다며 보수 언론들이 연일 협박 수준의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당장 60・70년대 노동 환경으로 돌아가야 우리 경제가 회복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부채질한다. 노동자들이 이 경제위기를 부른 죄인인 듯, 노동은 시대를 초월해 고무줄이라도 되어야 할 것 같다. 여기 안 좋으면 여기서 희생하고 저기 안 좋으면 저기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주고 모든 상황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죽어가는 인간의 목숨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현행 법 내에서 최대한 방안을 찾아보고 불가피한 상황이면 노동자들의 희생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다. 그 동안은 심하게 기울어진 분배 구조는 무시한 채 어떻게든 평균적인 근로 환경을 끌어내리고 보자는 식이었다. 주 52시간, 유연근무 등 노동 현안에 대한 전방위적 저항에 항상 갖다 쓰는 위협이 경제위기, 기업의 생존 위기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진짜 위기의 근원인 소득 불균형, 왜곡된 분배 수치에 대한 해명부터 해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인간이 먹고 살아갈 상품을 생산하려면 토지와 자본에 자본주의 운영 주체인 인간의 노동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인간을 위한 제도가 인간을 부정하고 도구로 이용하려 한다면 그 제도가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OECD 산재사고 1위인 열악한 작업 환경에서 아직도 더 많이 노동하도록 노동자를 내몰아야 하고 기계 다루듯이 아무 때나 필요할 때 자유롭게 쓰다가 해고해도 된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보수 언론들이 말하는 위기에 대한 처방은 잘못된 산업구조의 문제(비민주적 경제구조, 불공정 경제의 틀)에서 찾아야지 노동 환경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경기가 좋지 않다. 자영업자들이 문 닫고 있다.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 끝없이 이슈들을 재생산하면서 귀결시키는 지점은 최저임금, 주 52시간, 고용의 경직성이다. 모든 문제가 노동자들의 책임인양 전가하고 노동자들이 더 희생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강변한다. OECD 최악의 노동국가라는 오명으로도 부족하다면,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50~60년을 감내해온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미래를 위해 공교육을 실시하고 인재 양성을 통해 늘어난 성장의 과실을 극히 일부가 쓸어가고 있음에도 여전히 노동이 전부인 노동자들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런 사회 발전은 그만두어야 한다.
일부 노동조합도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노조의 행태는 자기 회사 직원, 자기 회사 노동조합을 마치 노예 대하듯 해온 자본가들의 거울이자 그들과 상대하면서 배운 생존의 방식이기도 하다. 고용노동부 행정 처분은 물론 법원 판결(사내하청 불법성 등)조차 버젓이 무시하면서 노동조합을 무력화시켜온 기업들이다. 논리적 접근보다 감정적·비이성적 접근과 경직성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소모적인 구조다. 죽기 살기로 끝까지 가보자는 식의 극한 대립 문화는 상당 부분 대기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권위적인 노사 관행에서 비롯되었다.
이제 생산적인 문화로의 전환을 시도할 때다. 새로운 전환을 위해 필요한 것은 노사가 지켜야할 ‘기준’이 아니다.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시급할 뿐이다. 그런 의지의 실현은 생산적인 협상 능력과 토론 능력을 갖추었을 때만 가능하다. 노동권이 무엇이고 왜 노동권을 중요시하는지, 상생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 이해와 학습이 부족했다. 모든 조건을 무시하고 시스템이 무너지든 말든, 내 것만 취하면 된다는 식의 극단적 방식을 후대에 길이 물려주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교육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학교가 좋은 노동 환경을 만들어가는 학습의 장이 되도록 말이다.
사회는 온통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신세계를 향하고 있지만, 무서운 속도의 플랫폼 기반 산업의 확장과 함께 새로운 노동법 사각지대 노동자를 급속히 양산하면서 부족한 안전망조차 해체되고 있다. 과연 4차 산업혁명의 신세계는 자본의 소모품이 된 인간의 미래도 고려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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