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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찾아야만 했다. 약속!

나를 긍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무애막! 서각은 오른쪽부터 쓰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란 것을 알지만, 어설퍼도 내 이야기 이고싶어서 그냥 했다.

오해일수도? 아닐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긍정적일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나를 믿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더 젊어서도 힘든 일을 하게 되고,또 어려운 고비를 만나게 되어도 항상 "자신을 믿어야만 긍정적으로 해석을 할수가 있어!'라고 말을 했기에 '그럼 지금의 나는? 그래, 이런 나의 모습은 믿을수 없다...'로 정리가 되어버리자 더이상은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찾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열아홉, 머리가 조금은 굵어졌다고 생각하면서 시작된 이야기!


나를 믿고 싶었고, 또 자유롭고 싶어서 수 없이 흔들리면서 걸어온 시간속에 "불광불급"을 새기고, "명운재 자기수리"를 되뇌이먼서 앞만보고 달려오다가 자빠져버린 그 자리에서 나를 탓하면서 좌절도 해보았고, "정말로 욕심이었습니까?"라는 그 말을 수천 아니 수만번은 더 곱씹으면서 어렵게 그 쓴 건데기를 삼키고 나니 나를 찾아온 단어가 있었다.


"무애" 그래, 부디 거침없이 살아라!


스물 다섯이었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글을 읽으면서 나는 부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건 도를 닦는 수도승이나 할 수 있는 말인 것만 같았고, 나는 될 수 없는? 아니 전혀 생각할수도 없는 버거운 말이라고 생각했기에 마음에 새기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해보려고도 하 못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 말했듯이


"생각하는대로 살지 못하면,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말처럼 흔들리던모습을 인정하 싫었던 날에 서른이 되어버린 나는? 시야가 더 넓어지고 밝아지기 보다는 막연함에 캄캄해져서 앞이 이지를 않았고, 스무살에 생각했던 이 나이가 되면 확신이나 신념이 생겨서 믿고 행동하기는 커녕? 나를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던 그 날무거운 배낭을 메고 비를 맞으면서 지리산의 능선을 걷다가 발목을 삐끗해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들리게된 피아골에서 만나게된 사람과 무애막이 있었다.


글로 또 귀동냥으로 들어왔던 함태식 선생을 직접 뵙게 고, 그곳에서 비슷한 삶을 꿈꾸었던 형님들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잠시 들린 그곳에서 예상도 못하고 일주일을 머물면서 경험하게된 무애막으로의 초대!


 몹시도 허름했고, 또 좁았던 그곳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함과 움막이라는 그 단어가 더 어울릴듯 했지만, 함선생님에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그 움막이 내게 주는 느낌은 견고하고 당당해 보였다. 그리고 무애막이라고 매직으로쓰여진 그 허름한 움막의 문패는 이미 거침이 없은 삶을 살아 오셨기에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적어 놓으셨을 것이란 짐작만으로 쉽게 담지 못했던 말인데? 오늘은 그 말을 이렇게 새기게 되었다.


그건 행동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지금껏막연하게 아닐거믿고 바래 왔지만, 실은 오해하면서 살싶다. '지금껏 나의 눈과 귀는 어디를 향해 있었나?' 아마도 그것은 '끝에 있는 결과만을 보고 찬양하는 말의 뒤를 쫒아 따르려고만 안달을 했던탓에 그 뒤에 가려진 과정 안의 이야기는 듣지를 못했었구나!'가 보였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결과에 현혹되고, 또 안간힘을 써봐도 안될 것이란 생각에 바로 주눅들어 괴로워 하면서도? 다시 부러워고 있는 이도저도 아닌 빈 껍데기의 모습으로 그렇게...


하지만 다행이도 지난 일년을 통해서 끝이 아닌 과정 속에 녹아있는 하루하루가 더 중요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애" '그래! 거침이 없는 그 마음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걸을 수 있는 날들을 꿈꾸고 있고, 그 마음으로 웃으면서 더불어 걷고 또 그런 오늘을 고마워 하는... 너무 클수도 아니면 작을수도 있는 그런 모아들에게 이면서 웃고 이야기 해보고 싶다. 내가 무애막을 처음 보았던 그날처럼!

후로 가끔은 찾아가서 등짐을 지어드렸다. 뒤에 앉아계신 분이 지금은 영면하셨지만 함태식 선생님이시다!

p.s 하지만 아들은 "그런데 아빠! 지금 중요한게 빠져있는것 같은데?" 그래서 아빠는 어디로? 어떻게? 무엇을 위해 갈건데?"라고 물을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도 "그걸 왜 하고 있는 건데?" 란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고, 그런 말에 그저 "재미있으니까!그냥 해보고 싶으니까!"라는 말로 답하다가 때론 쉽게 답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많은 말을 보태서 보내보기도 했고, 그럴수록 "그런다고 지금이 이럴때냐?"로 대표되는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에 그저 웃음만을 지어보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느껴진다.


그래, "두리뭉실!" 명확한 것을 선으로 생각하고 닿아가려 했던 적도 있지만! 나는 지금 가보고 싶고, 또 해보고 싶은 것들이 그저 두리뭉실 정해진것 뿐이야! 아직은 내가 무엇을 타고? 어디에 묵으면서? 언제까지 도착해서 무엇을 볼 것인지는 아직 몰라! 그리고 그 끝이 어디인지도? 또 어디서 마무리를 할 것인지도 모르는거야! 그런게 지금까지 내가 여행하는 스타일이었던것 같고, 그런 모습이 편하고 나 같아 보여서 좋으니까 앞으로도 그런 모습은 지금까지의 내 모습과 많이는 다르지 않을것 같다고...


 앞으로도 걸어가는 그 길 위에서 분명 의도와 이유는 있겠지만, 무엇을 바라고 또 예상하는 모습으로 주저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에 지금은 이렇게 내게! 아니 앞으로도 필요한 것이 나를 믿고 거침이 없이 나아가는 힘일거라고...비록 미흡하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이렇게 걸을수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달리는 지프니 위에서 자유로웠다! 지금은 그런 날을 다시 꿈꾸고 있다.

2014년에 다시 학교로 돌아오면서 맘고생이 많았다. "몸도 아픈 사람이 힘든데 거길 왜가?" "돈을 많이 주는 일도 아니고 그렇게 하다가 아팠으면 이제는 그만하고 좀 쉬어!"


그래서 말을 해야만 했다. "살고 싶어서요! 진짜로 살고 싶어서 그런거예요!"


그렇게 돌아온 2014년 9월 26일 학교에서 알게 되었다.


나를 믿기위해 필요했던 것이 약속을 지키는 모습이었음을...

2014.09.26일 과 27일은 내가 이렇게 살아있음이 정말로 고맙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래, 나는 살아있다!


26일 아침일찍 일어난 아들은 나를 깨우면서"아빠! 사랑해요!"라고 말했고, 미역국을 먹고 기분좋게 들어선 학교에는 나를 본 늘찬이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헐레벌떡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삼촌! 삼~~촌!" 그리고는 와락 껴안으면서 소리쳤다."쌤! 생일 축하드려요!"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어서는 09녀석들이 식당에 모여 노래를 불러주었고, 대자보를 선물했다. 고마웠다. '내가 이런것을 받아도 좋을만한 사람인가?' 싶을정도로...


매주 금요일 점심 시간은 농구부 연습이 있는 날이다. 연습을 마치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면서 난 큰소리로 말했다. "이젠 쫌 믿으라고!""아직도 너흐들은 자신을 믿는 모습이 아니야!" " 내가  누구보다 더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게 아니잖아!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를 진짜라고 믿지 못하면 그 마음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 사그라들어 공을 놓게 될거야!" 그러니까 너를 좀 믿으면서 해보라고 소리쳤다. 그렇게 연습을 끝마치고 돌아서는데 녀석들은 원을 만들어 편지를 전하면서"쌤! 축하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휴~ 내가 이런 말을 들어도 되나? 진짜로?


그렇게 벤치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웃으면서 다가온 우정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미소짓게 만들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꺼낸 사진을 건네며 말했다. "저희는 기다려 줄꺼에요! 그러니까 빨리 나아서 꼭 우리반 해주셔야 해요! 알았죠?" 그렇게 녀석이  내게 건낸 사진 속에는 아들의 모습과 농구장에서 뛰고 있는 녀석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었다. 녀석은 그동안 사진을 찍고 또 현상을 하고, 인화를 하면서 이런게 진짜로 정상쌤다운 모습일거라 생각했다고 말하는데... 가슴이 먹먹했다.


27일 제천 간디학교 가을축제!


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못한다. 그건 스스로가 이미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꼭 해야했다. 그건 이제 곧 졸업을 앞두고 있는 녀석들과 했던 3년전의 약속을 나와 녀석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에... 그렇게 나는 쉽지 않았지만 뚜벅뚜벅 걸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리고 27일의 또다른 이야기!  딱 21년만인 거라고 형들은 말했다. 내가 열아홉이 되던 해에 졸업했던 형들과 그동안 타지에서 떨어져 지낸 10년을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렇게 대문을 스르르 밀치고 마다에 들어서는데, 그 모습이 마치 어제 헤어지고 오늘 다시 만나던 20년 전의 그 모습과 너무도 같은 모습이어서 우리는 거리낌 없이 어우러져 그의 대화들을 이어나갔다.


'고마웠다! 모든것이...' 이렇게 그날에 모습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것도, 그날의 이야기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것도그리고 1초의 망설임이나 어색함 없이 이 오가고 웃는 모습 모두가 정말로 좋았고 고마웠다. 그렇게 그 밤이 깊어가도록 웃으면서 스물부터 마흔에 이르는 시간여행을 하면서 웃게 되었던 우리는 고맙고 좋다는 말을 많이도 했고, 형수와 제수씨 그리고 집사람은 웃으면서 처음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만들면서 웃음지었고, 아들녀석들은 땅바닥과 이불 위를 뒹굴면 저희들만의 이야기 새롭게 써내려갔다. 그래서 나는 지금 몹시도 고맙고 행복하다!


p.s 그래, 나는 생각이 많다. 하지만 그 생각들이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것 같다. 나의 생각들에는 염려와 걱정, 두려움과 번민보다는 그 장면을 상상하고 기획하는 순간들이 많았기에 나는 생각 하는것을 좋아했고 즐겼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상상을 했기에 그 장면들이 내게로 와서 현실이 되어준 것이란 믿음도 갖게된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이렇게 상상하고, 생각하는 내 모습이 좋다! 그래, 꿈같은 소리라고 해도 좋다! 깨어나면 나는 그것을 잊지않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실행해 나갈거니까! 그렇게 난 생각한대로 천천히 살아갈 거니까~그래, 화이팅!

1953년에 지어진 집이다. 나는 이곳을 직접 꾸며서 제천간디학교의 선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성향상 이 영상은 "오바!"라는걸  알면서도 지금 "말과 행동이 닿아있는 삶!"을 생각하는 내게 어제 이곳에 쓰여진 짧지 않은 댓글에 답하고 싶어서 올렸다.


"저는 지금껏 자신을 믿으려면 적어도 잘해야? 할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3년 전 망설이던 녀석들을 보면서 했던 "임마!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건 필요없어!"라는 말이 부메랑이 되어서 망설이는 내게 졸업을 앞둔 녀석들은 말했다. "저희가 지금 쌤이랑 같이 준비하는 것을 즐거워하는데 뭐가 문제예요? 그냥 해보세요!" 그렇게 웃으면서 난리친 모습을 찍어서 보내준 부모님 덕분에 지난 1년을 힘이 들때마다 보면서 다시 생각할수 있었다.


'그래! 니가 뭐라고 잘해야 할거란 부담에 망설여? 누구도 네게 대단한걸 바라는 사람은 없어! 내가 뭐라고? 그러니까 나쁜짓이 아니라면 그냥 해봐!' 그렇게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짓들을 돌아보면서 조금씩 나를 긍정하게 되었다.


잘해서?가 아니라 하고 있음이! 더 중요한 모습임을 이제는 나와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어서...

꿈을 말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서 노래하고 싶었다!

어떤 선생이 되고싶은 것인지?를 노래와 함께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앵콜곡으로 "지금은 분명 막막하지만!" 내일은 또 다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고! 말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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