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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un 07. 2018

매트릭스와 이데아의 그림자들

보르헤스: 원형(圓型)의 페허들(Las ruinas circulares)

보르헤스 전집 2 -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민음사





   화재로 인해 폐허가 되어 버린 원형의 신전 석상 아래에서 어떤 사나이가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그는 완벽한 인간을 만들고자 합니다. 꿈의 인간은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불멸의 존재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인간은 불 속에서도 전혀 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완벽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그는 매일 밤 꿈을 꾸고자 합니다. 그리고 몇 번의 뼈저린 좌절을 거쳐 꿈속에서 조금씩 그 인간을 완성해나갑니다. 그러던 중 그는 자신이 만들고 있는 꿈의 자식이 영원히 잠만 자는 그노시스적 붉은 아담이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역시 꿈속에서 불의 신의 도움을 받아 그 꿈의 자식에 생기를 불어넣어 그를 현실로 데려 나옵니다. 그리고 불의 신의 명령에 따라 강 건너에 있는, 역시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다른 신전으로 그 꿈의 자식을 보내 불의 신을 찬양하게 합니다. 자신의 과업을 완성한 그는 권태와 허무에 물들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다 강 건너 신전의, 불 속에서도 타지 않는 어떤 도인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듣습니다. 이제부터 그는 그 꿈의 자식이 행여나 자신의 꿈속에서 만들어낸 환영에 불가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까봐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어떤 징조와 함께 그가 있던 신전이 다시 불에 의해 폐허가 되어 갑니다. 그는 죽음이 그러한 권태, 허무, 노심초사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으며 활활 타는 불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타 들어가서 녹아 흘러내려야 할 자신의 피부는 불 속에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알았습니다. 자신 역시 다른 누군가가 꾸고 있는 꿈속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이 이야기는 보르헤스 단편집 <픽션들 - 보르헤스 전집 2, 민음사>에 실린 “원형의 폐허들”란 작품입니다. 가상현실을 다룬 영화들은 종류도 많고 내용도 다양합니다. 제가 처음 본 가상현실 영화는 아주 어렸을 때 본 율 부린너 주연의 웨스트 월드(Westworld, 1973)입니다. 각 시대의 모형 세트를 만들고 그 시대의 인물들을 인간과 꼭 같은 로봇으로 만들어 자신이 원하는 시대로 가서 모험을 즐기도록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배경을 깔고 있는 영화였지요. 영화의 주인공이 서부 시대로 가서 모험을 즐기던 중 인식을 갖게 되어 실제로 사람까지 죽이게 되는 어떤 로봇(율 부린너 분)과 사투를 벌이는 내용입니다. 그 후 컴퓨터라는 매체가 발달하면서 가상현실이라고 하면 어련히 컴퓨터와 매개된(가상현실로 연결되는 어떤 장치들이 있는) 내용들로 대체되었습니다. 게임과 관련되어 게임과 현실을 혼돈시키는 내용들이나 모의 시뮬레이션 캐릭터가 실제로 밖으로 나와 사고를 치는 등의 내용들이 많았죠. Brainscan(1994)이나 eXistenZ(1999), 그리고 Virtuosity(1995)도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Total Recall(1990)에서는 그런 형식을 갖고선 가상과 현실을 완전히 꼬아버리는 데 성공했고 Nirvana(1997) 같은 경우는 게임 소프트웨어 캐릭터에 독특한 인식을 부여했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영화들은 가상현실의 문제에 있어서 자아의 문제, 개인의 실존의 문제, 주체의 분열의 문제를 중심 주제로 다루었던 것 같네요. 

   그러나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 1999)”의 경우는 자아의 문제 이전에 그 자아를 존재케 하는 어떤 구조를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그러한 구조의 문제를 가상현실이라는 내용을 통해 “매트릭스”와는 다른 형식으로(꼭 컴퓨터가 매개되는 것이 아닌) 보여 준 작품들이 “다크 시티(Dark City, 1998)”와 “오픈 유어 아이즈(Abre los ojos, Open Your Eyes, 1997)”, 그리고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98)”라고 할 수 있겠죠. “다크 시티”에서는 인간들에게 가상 기억을 심어 줌으로써(“블레이드 러너”에서 인조인간에게 가짜 기억을 심어주는 것처럼) 매일매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을 보여 주고, “오픈 유어 아이즈”(몇 년 뒤 톰 크루즈를 주연으로 내세워 “바닐라 스카이”라는 제목으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었죠.)는 생명 연장을 원하는 사람을 냉동시켜 놓고 그 사람의 의식에 가상의 세계를 주입시킵니다. “트루먼 쇼”는 거대한 세트를 만들어 주인공으로 하여금 삶이 아닌, 연극을 살아가게 합니다. 이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그러한 인간들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형식들,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지는 않지만 인간 이전에 있었고 인간들의 배후에 존재하여 그들의 삶과 의식을, 무의식까지 지배하는 그 어떤 것 - 거대한 구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구조 속에서의 인간이란 가치는 그것이 만들어 준 자리에 그들이 위치할 때만 비로소 그 의미를 지니게 되며 그곳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게 됩니다. 이제 인간은 고유의 어떤 가치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구조가 그런 가치, 자아라는 어떤 감정을 심어주게 됩니다. 한때 구조주의라는 사조가 있었는데 이 사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언어 또는 무의식의 구조, 인식틀의 구조, 이데올로기 구조 등등이 바로 인간을, 우리가 느끼는 자아라는, 주체라는 감정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조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런 구조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와는 다르게, 인위적으로 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인간 이전에 그것이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하다고 주장하면서 철저한 수동적 인간형을 제시합니다. 구조 안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인간 능력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절대 파괴할 수 없는 구조… 하지만 이러한 자아의 문제와 더불어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구조를 만들어낸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매트릭스”에서는 AI 컴퓨터가, “다크 시티”에서는 외계인들이, “오픈 유어 아이즈”에서는 LE(Life Extension)라는 생명 연장 회사가 있습니다. 또한 “트루먼 쇼”는 그것을 만든 제작자가 있죠. 그리고 이 영화들은 한결같이 주인공이 주체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깨고 자아를 회복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물론, “오픈 유어 아이즈”의 경우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지만…). 

   하지만 주체란 문제는, 나라는 자아의 문제는? 다시 앞에서 얘기했던 인간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 같은데, 글쎄요… “매트릭스”도 그렇고 “다크 시티”, “트루먼 쇼”도 전부 그러한 구조를 박차고 나아가게 하는 것은 바로 주체의 문제, 동시에 자유 의지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인간 본연의 것, 영화 “13층(The Thirteenth Floor, 1999)”에서의 가상의 캐릭터들, 또는 “매트릭스” 내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가질 수 없는 그런 것일까요? 하지만 적어도 영화 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유에 대한 인식이나 막연한 감정마저도 그것을 만들고 느끼게 해 준 곳, 인간이 자유란 것의 감정을 배운 곳도 바로 “매트릭스”와 같은 구조 속에서가 아닐까요? 인간이 주체로서 자신을 내세우게 된 시기는, 지금 우리가 느끼는 주체라는 감정,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적극적인 주체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은 근대에 들어서, 정확하게 말하면 칸트 이후에 가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느끼는 그 주체, 자아라는 것은 어찌 보면 교육을 통해 우리에게 체화된, 철저하게 서구적인 개념의 주체가 아닐까요? “공각기동대(攻殻機動隊, 1995, 브런치글: "정보의 바다를 떠다니는 자유로운 인조영혼" 참조)”에서 인형사는 정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그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합니다. 어차피 우리 인간 역시 DNA라는 정보의 배열과 복제, 그리고 유전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결국 쿠사나기 소령은 “네트는 넓어!”라는 말을 남기고 정보가 되어 광대한 네트워크 세계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라는 영원한 어떤 상, 변하지 않는 하나의 원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개똥이, 변강쇠, 영자 같은 그런 구체적인 인간이 아닌, 그런 구체적 인간들을 추상화시킨 신과 같은 어떤 영원한 관념의 존재를 규정하고 그것에 해당하는, 근접하는 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요? 동시에 그러한 존재들의 변하지 않는 세계를 상정하고 그것을 실재한다라고 보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가상의 세계는 역시 거짓의 세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일 수밖에 없고 그 속에 사는 인간 역시 가상이겠죠. 동시에 우리가 그리고 있는 기준은 나와 너, 개똥이 등의 구체적 인간과 너와 나의 차이를 지닌 그런 인간들은 사상된 그러한 기준일 겁니다. 

   그러나 가상의 세계라는 것이 영화에서는 가상이라고 확실하게 밝혀졌지만 정말로 현실과 느끼는 것과 동일하다면 그곳도 살아갈 만하지 않을까요? 그 가상도 현실만큼의 존재의 무게를 지니지 않을까요? 장자의 호접몽처럼 “매트릭스”의 입장에서는 “매트릭스”와 투쟁하고 있는 그 세계가 가상의 세계가 아닐까요? 중요한 것은 실재성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성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매트릭스”에서 대머리 아저씨 사이퍼는 말합니다. 역겹고 냄새나는 이 현실보다는 차라리 “매트릭스”로 돌아가고 싶다고… 그리고 “매트릭스”로 돌아가기 위해 동지들을 배반하게 됩니다. 세트장을 빠져나간 트루먼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매트릭스”를 파괴한 후 건설될 시온의 세계는 “매트릭스”만큼의 인간적인 세계일까요? 

   영화 “13층”은 가상에 대한 실존의 근거를 부여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임 속의 캐릭터가 가상의 세계 속에서 실제로 느끼고, 생각하고, 울고 불고 합니다. 과연 그들에게 감히 실존한다라는 말을 사용할 수는 없는 걸까요?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플라톤은 실재하는 세계는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이고 그 이외의 것은 이데아를 모사한 가상의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플라톤의 모든 원형들(prototypes)의 집합 - 책상의 이데아, 사람의 이데아, 나무의 이데아… 등등(심지어 바퀴벌레의 이데아, 악의 이데아까지도 포함되어야겠죠?) – 속의 각 원소(이데아들)에 대응하는 각 이미지가 이 책상, 저 책상, 개똥이, 철수, 옹녀 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엔가는 있을 이데아의 이미지, 그림자로서, 즉
 가상의 세계 속에서 역시 가상의 주체로서 살고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미 영화 “13층”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삶을 떠날 수는 없겠죠. 자신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13층”의 흑인 형사 래리 맥베인의 말처럼, 우리가 인간이라는 가치를 발견하는 곳도 현실 속에서이지 관념의 원형 속에서는 아닐 겁니다. 

  영화 “13층”은 그렇게 남편 바꿔치기로 끝나지만 그렇게 끝난 마지막의 세계 역시 다른 가상 세계의 일부가 아닐까요? 마치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존재하는 것일까요? 




2000년 5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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