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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un 10. 2018

미노타우로스의 고독

보르헤스:  아스테리온의 집 (La casa de Asterión)

<알렙>, 보르헤스 전집 3, 황병하 옮김, 민음사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집 <알렙>(보르헤스 전집 3, 황병하 옮김, 민음사)의 여러 작품들이 어떤 질문을 던지면서 나를 다양한 사색으로 이끌지만 그중 특별히 그 잔상을 은은히 유지시켰던 작품이 <아스테리온의 집>이다. 물론 그 잔상의 느낌은 애잔한 안타까움이리라. 그 애잔함의 발원을 나름 이 단편 속에서 찾아보고자 쓴 글이 본 글이다. 그리고 그 발원을 찾기 위해 다소 비약도 마다하지 않은 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선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예를 하나 들어 보면서 글을 시작해 본다.


   미셀 투르니에의 <방바르디, 태평양의 끝>(민음사, 김화영 역)이란 작품은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쓴 소설이다. <방바르디, 태평양의 끝>은 “문명-로빈슨 vs 야만-프라이데이”라는 구도 하에 프라이데이를 야만으로부터 문명으로 인도하는 내용을 담은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한 문명-로빈슨과 또 다른 한 문명-방바르디(프라이데이-Friday의 프랑스어)의 만남과 충돌로 재구성하여 그것을 통해 두 문명의 차이를 더 극명하게 보여 준다. 


   신화나 기존 소설의 다시 쓰기, 굳이 상호 텍스트성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동반하는, 그리고 그것의 극단이라고 언급되는 보르헤스의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보르헤스는 <불한당들의 세계사>(보르헤스 전집 1, 민음사, 황병기 역)를 통해 이전의 알려지지 않은, 별로 유명하지 않은 여러 이야기를 유연하게 풀어낸 바 있다. 그리고 상호 텍스트성이란 개념을 이끌어 내게 하는 그의 여러 단편들이 존재한다. 이런 기존의 이야기에 대한 다시 쓰기는 아스테리온의 집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아스테리온의 집은 간단히 말하면 그 유명한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의 그리스 신화에 대한 재구성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오랜 시간 동안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란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묻혀 단순히 테세우스의 조연, 흉포한 괴물로서의 악이란 관점 하에서 전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미노타우로스의 입장에서, 미노타우로스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표현대로 “가련한 주인공”으로서의 미노타우로스의 자기 독백이기도 하다. 



   신화 속에서 언제나 무시무시한 괴물로 등장하는 미노타우로스. 하지만 보르헤스의 이 단편에서는 소외와 배제라는 절대 고독 속에서 말 그대로 가련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 결말은 비극이다. 물론 비극이란 의미는 읽는 독자의 편에서, 그리고 전통적인 희/비극의 구분에 따라서 비극이겠지만 가련한 주인공으로서의 미노타우로스에게는 해피 엔드일 것이다. <아스테리온의 집>을 다 읽고 나서 그 기나긴 외로움 속에서 홀로 그 긴 시간을 버텨 왔을 미노타우로스의 이미지를 머리 속에 그려 보았다. 하지만 쉽게 그려지지 않은 채 그 가련한 주인공의 절대 고독이 계속 나의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 그 가련한 주인공의 성격은 왓츠(Watts)가 그린 한 화폭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보르헤스의 언급을 <알렙>의 후기에서 읽게 되었고 그 그림은 마침 민음사 판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이윤기 옮김, 민음사, p340> 제 1권에 나온다. 1885년에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George Frederic Watts가 그린 “The Minotur”란 작품이다. 위의 그림이 그것이다. 황소의 머리를 한 인간, 자신을 가둔 미로의 꼭대기에서 지는 노을을 향해 멍하니 던지는 시선, 눈은 보이지 않지만 그 향하는 시선을 따라 묻어나는 외로움, 고독... 왓츠의 이 그림 속에서 보르헤스가 느꼈을 만한 그 가련함이 조금이나마 내게 느껴지는 듯했다.


   본 글에서는 미리 미노타우로스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지만 사실 보르헤스의 단편 “아스테리온의 집”이라는 이 작품에서 미노타우로스라는 이름은 마지막에 딱 한번 등장한다. 짐작만 할 뿐 화자의 주인공이 미노타우로스라고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보르헤스는 다음과 같은 아폴로도루스의 “도서관”에서의 이야기를 서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여왕은 아들을 낳았고, 그를 아스테리온이라 불렀다.

                                 아폴로도루스, [도서관] 제 3권 1장


   <도서관>이란 책은 아폴로도로스의 신화집으로서 현재 국내에 민음사 판의 <아폴로도로스 신화집, 강대진 옮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있으며 이 번역본의 제 3권 1장은 “에우로페와 그의 가족들”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아폴로도로스란 사람 자체가 그 연대가 모호할뿐더러 <도서관-Bibliotheka> 자체도 테세우스 이야기부터 그 원본이 소실되고 없으며 요약본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도 모호한 부분이 많다. 그래도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휘기누스의 <신화집>과 더불어 그리스 3대 원전 신화집으로 간주되는 도서관을 바탕으로 보르헤스가 펼치는 이야기는 도서관 그 자체의 모호함과 함께 더욱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문제가 되는 위의 서사를 아폴로도로스의 도서관을 직접 찾아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그녀(파시파에)는 미노타우로스라 불리는 아스테리오스를 낳았다.

    <아폴로도로스 신화집-도서관 제 3권 1장, p150, 강대진 옮김, 민음사>


   재미있는 것은 도서관에서는 미노타우로스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음에도 보르헤스는 그냥 아스테리온으로만 언급한다. 이것은 소설적 신비감을 더해 주려는 의도와 더불어 기존의 미노타우로스에 대한 이미지를 감추려는 이중의 효과를 노린 보르헤스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럼 미노타우로스의 탄생 배경은 어떨까? 이 부분은 직접 보르헤스의 말을 빌려 보자. 다음은 보르헤스의 <상상동물 이야기, 보르헤스 외, 남진화 옮김, 까치글방>에서 미노타우로 부분을 직접 옮긴 것이다.



   미노타우로스

 

  사람들을 미로에 빠트리기 위해서 지어진 집은 황소 머리를 가진 인간보다 더 이상하다. 그러나 위의 두 가지는 서로 상호 보완적인 작용을 한다. 미로의 이미지는 언제나 미노타우로스의 모습을 동반하는 것이다. 거대한 집 한가운데에 괴물같이 생긴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미노타우로스는 반은 황소이고 반은 사람인 괴물이다. 이것은 크레타의 여왕인 파시파에와, 포세이돈이 바다에서 내보낸 황소가 결합하여 태어난 것이다. 이러한 동물과의 사랑을 실현 가능한 일로 꾸민 데달루스는 괴물같이 생긴 이들의 아들을 감추어 놓을 수 있는 미로까지 생각해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고기를 먹고 살아간다. 크레타 왕은 아테나이 시에서 일곱 명의 총각과 처녀를 매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테세우스는 이러한 부당한 조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자원하였다. 왕의 딸 아리아드네는 그가 자신이 지나간 길을 표시하여 길을 잃지 않도록 그에게 실꾸러미를 주었다. 영웅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로를 빠져나왔다.

  오비디우스는 재치를 부려서 한 시구에서 반은 황소이고 반은 인간인 소-인간에 대해서 거론하였다. 고대인들의 저작에 대해서는 잘 알았지만 그들의 동전이나 건축물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던 단테는 미노타우로스가 머리는 인간이고 몸통은 소라고 상상하였다(“지옥편”, 제 12곡 1-30).

  소에 대한 신앙과 쌍도끼에 대한 신앙(이 쌍도끼의 이름이 바로 라브리스[labrys]인데 여기에서 “미로[labyrinth]”라는 단어가 나왔다)은 헬레니즘 이전 시대의 종교의 독특한 면이다. 벽화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황소 머리를 한 인간은 크레타의 악마학에 속한 반(半) 인간이다. 아마 미노타우로스에 대한 그리스의 우화는 오래된 신화를 뒷날 다시 상황에 맞게 각색한 것으로, 더욱 무서운 다른 꿈들의 그림자인지도 모른다.

                                                                     보르헤스, 상상동물 이야기, 까치글방, p135~p136



   여기까지가 보르헤스가 직접 이야기한 미노타우로스이다. 미로와 실꾸러미로 유명한 이 신화는 사실 테세우스와 아드리아네가 그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아폴로도로스의 도서관뿐만 아니라 토마스 볼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토마스 불핀치, 이상옥 옮김, 삼성기획>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조셉 캠벨의 글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이윤기 옮김, 민음사> 등 다른 여러 신화를 참조해서 좀 더 자세히 미노타우로스의 탄생 신화를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의 소’라는 뜻으로, 크레타의 왕인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와 수소와의 통정의 결과로 태어난, 반은 사람이고 반은 황소인 괴물이다. 우선, 미노타우로스의 의붓 아비 벌 되는 미노스의 출생 신화부터가 소와 관련이 된다. 미노스의 어머니는 에우로페인데, 그녀는 수소로 변한 제우스를 타고 크레타로 왔었고, 이 결합에서 태어난 아들이 미노스였다. 결국 미노스는 신의 아들이 된다. 미노스는 형제들과 왕위를 겨룬 후 왕이 되었을 때 그 징표로 포세이돈에게 바다의 수소를 부탁했다. 그리고 그는 제물과 예배의 상징으로 그 동물을 즉석에서 희생시키기로 약속했는데, 그 수소의 위풍에 반해 자신의 하얀 수소를 포세이돈의 제단에 바치고 포세이돈이 준 그 수소는 자기 소유로 했다. 그리고 왕국은 융성했다. 결국 해신(海神)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이에 대한 벌로 미노스의 아내인 파시파에는 이 황소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포세이돈의 계시에 이끌려 바다에서 태어난 그 잘생긴 수소에게 이끌려 억누를 수 없는 욕정을 느끼게 된 파시파에는 다이달로스에게 수소를 속일 만한 목제 암소를 만들어달라 부탁한 후, 암소 뱃속에 들어가서 그 수소와 통정을 하게 되고 그 씨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되고 미노타우로스는 자라면서 위험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즉, 미노타우로스는 크레타의 왕자가 되는 것이다. 미노스에게 미노타우로스는 골칫거리가 된다. 아내의 자식인 이 짐승은 사람을 자신의 먹이로 한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왕족의 혈통을 가졌기에 그러지도 못한다. 미노스 왕은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로 결심하고 다이달로스에게 라비린토스, 즉 무엇이든지 가두면 영원히 길을 찾아 나올 수 없는 거대한 미궁을 짓게 한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를 그 미로에 가두어 버린 후 아테나이로부터 9년마다 또는 매년(오비디우스 판은 9년이고 볼핀치의 것은 매년으로 되어 있다. 보르헤스는 이 소설에서 조공의 주기를 9년으로 보고 있다.) 14명의 선남선녀를 먹이로 미로에 집어넣는다. 아테나이의 왕자 테세우스는 크레타에게 바치는 공물의 일부가 되어 크레타로 향한다.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는, 미노타우로스의 제물이 될 아테나이의 배가 도착한 순간, 미남자 테세우스에게 반한다. 그리고 크레타에서 자기를 데리고 나가 아내로 삼아준다면 미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일러주기로 하고 둘은 그러기로 맹세한다. 다이달로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실을 한 타래 주고, 테세우스는 아드라드네로부터 받은 실을 풀면서 미궁을 빠져나갈 길을 표시한 후 결국엔 아리아드네로부터 받은 칼로 미노타우로스를 죽인다.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며 여기저기 관여하던 다이달로스 역시 마지막에 자신의 미로에 갇히게 되며 후에 자신의 아들과 이 미로를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 그 유명한 이카루스 신화가 되겠다.) 


   이상이 이 단편의 배경이 되는 신화의 내용이다(불핀치의 글에서는 미노타우로의 탄생 배경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신화를 통해 본 미노타우로스는 신화 상의 조연이자 감금과 격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아스테리온의 집”에서는 미노타우로스의 독백으로 시작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고 기존의 신화를 비껴간다. 즉, 소설의 화자는 그 미노타우로스이다. 미노타우로스가 독백 형식으로 풀어나가면서 자신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 세계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들의 시선이 오해임을 강조하는데 그러한 소설 속 인간들의 시선 역시 일반적으로 우리가 미노타우로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화적 사실과 일반 다름없는 것이다. 미노타우로스는 이것을 부정하면서 독백을 시작한다. 즉, 신화적인 편견에 대한 부정이다. 우선 사람들이 자신이 오만하거나 자폐적이고 혹은 실성했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알지만 그건 다 얼토당토않은 것이다라고 시작한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신화에서 알려진 것처럼 감금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 고결한 의지에 따라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미로라고 알려진, 감금을 위한 그곳의 문은 항상 열려 있고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심지어 자물쇠도 없는 자신의 집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자신은 수인(囚人)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 그냥 머물러 있을 뿐임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한 미로는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그런 미로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는 그 미로를 자유자재로 들락거린다. 일반 사람들이 그를 가두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그 미로는 미노타우로스에게는 자유자재로 들락거릴 수 있는, 자신의 휴식 공간인 집인 것이다. 단지 미노타우로스가 미로-집에만 머물러 있는 이유는 반대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미노타우로스가 한번 거리를 나섰다가 당한, 단편에서 표현된 그 공포감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그를 보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평평한 얼굴과 비명, 아우성, 난리…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미로는 미노타우로스에겐 자신의 집일 뿐이다. 하지만 그 집은 다른 여느 집과 다르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떠한 가구도 없다. 단지 구유와 낭하 등이 있는 이상한 집, “지상에서는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어떤 집“이다. 이러한 집의 묘사는 역시 보르헤스의 단편 <더 많은 것들이 있다 – 보르헤스 전집 5, 셰익스피어의 기억, 민음사, 황병기 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누군가에 의해 인수되어 이상하게 개조된, 고인이 된 자신의 삼촌 집을 찾아가는 내용인데, 개조된 집의 괴상함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피라네시 풍의 미로를 연상케 하는 미노타우로스의 집에 대한 꿈을 꾼다. 그리고  몰래 그 집에 들어가서 주인공이 느끼는 그곳의 구조를 여느 다른 집과 다른 것으로 묘사하면서 기괴한 느낌을 계속 풍긴다. 집의 묘사만으로도 미노타우로스의 집을 연상케 하는 그 소설은 마지막에 결국 황소의 두 뿔을 암시하는, 갈라진 V자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등장하는 그 집의 주인을 직접 목격하기 직전에서 끝나게 된다. “더 많은 것들이 있다”에서 묘사된 것과 마찬가지로 아스테리온의 집도 여타 일반적인 집과는 다르다. 여하튼 이 집은 고독과 적막이 감도는 황량한 느낌을 주는 집이다. 그리고 그러한 집에 사는 미노타우로스 자신도 고독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고독을 나름대로 정당화한다. 즉, 자신은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글자로 표현되는 조막조막한 철학적 지식의 전수에는 관심 없으며 자신은 언제나 거대한 것만 사유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이성적인 사고가 아닌 직관에 의해 순간적으로, 한 번에 감지되는 그런 성질의 사고인 것이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자신이 이미 범인들과 다른 존재임을 암시한다. 앞서 자신은 왕비의 자식이며 동시에 세계인 미로 속에서 무한을 한 번에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음을 암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고귀함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유일무이한 신적인 존재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그 절대 고독감을 미로, 즉 자신의 집안의 구조를 설명하면서도 암시한다. 14라는 숫자를 통해 자신의 집이 무한하다는 것,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무한한 자신의 집의 경계를 벗어나서 역시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그 역설을 깨달았음을, 집 바깥의 세계에서 보는 신전과 바다 또한 무한이라는 것을, 따라서 모든 것이 열네 번(그리니까 무한 번)씩 반복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무한의 반복 속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것이 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늘의 태양과 미노타우로스 자신이라고 한다. 이제 한발 더 나아가 어쩌면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창조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물론 기억이 나진 않겠지만… 


   무한히 반복되는 미로와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 이제 곧 세계 자체가 미로가 되는 것이다. 하나이자 동시에 여러 개인, 무한한 반복을 통한 유한과 무한의 경계 허뭄, 현실과 허구가 공존하는 세계, 혼재향의 그곳, 그 속에 독자들을 위치시킴으로써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순간을 아스테리온의 집에서도 역시 보여 주고 있다. 보르헤스의 글을 보면 무한과 되먹임의 반복을 통한, 말로서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전체”라는 존재, 즉 역설적인 표현이 충분히 가능한, 하나이자 동시에 무한이며 모든 곳에 있으며 어디에도 없는 "완전성"을 설명하는 있는 단편이 많다. 바벨의 도서관이 그렇고, 알렙이 그렇다. 알렙에서 알렙을 표현하는 그 긴 설명도 그렇거니와, <신의 글, 보르헤스 전집 3>을 보게 되면 아즈텍의 마술사이자 주술사인 치나깐이 아즈텍의 전복에 따라 반구 형의 감옥에 갇히게 되고, 신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감옥 벽 반대편에 있는 표범의 무늬로부터 신의 글을 알아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바퀴, 물이자 동시에 불인, 둘레가 보이긴 하지만 무한한, 미래, 현재, 과거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얽혀 짜인 그 총체성, 그 총체성 속에서도 하나하나의 모든 개체를 다 확인할 수 있는, 원인과 결과가 함께 있는 그런 신의 글을 본다. 그러면서 호랑이에 쓰인 신의 글을 이해하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그 신의 글이 14개의 무작위적인 단어들의 조합이라는 것이다(사실, 굳이 신의 글을 연결시킨 것은 이 14라는 숫자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치나깐은 신을 글을 발화함으로써 영원한 존재가 되는 대신에 감옥 속에서 그 비밀을 간직한 채 호랑이와 함께 죽어간다. 신의 글을 발설하는 대신에 감옥의 어둠 속에서 세월이 자신을 잊어 가도록 내버려 둔다. 아스테리온의 집은 바로 미로이며 무한이며 동시에 세계, 혼재향의 세계이며 치나깐이 보았던 그것이다. 미노타우로스의 변명에 따르면 자신은 이미 치나깐이 본 그 속에 살고 있으며, 또한 신의 글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고독할 수밖에 없었던 미노타우로스는, 시간이 그를 지우도록 스스로 기나긴 고독을 택했던 치나깐과는 다르게, 죽음만이 자신을 그러한 고독에서 구원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해방자 테세우스를 기다렸을 것이다. 마침 그 기다림의 보답인 양, 미노타우로스는 그로부터 기쁘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미노타우로스의 죽음에서 떠올리게 되는 테세우스와의 격렬한 싸움 대신, 미노타우로스는 담담하게 아무런 저항 없이 테세우스의 칼을 받게 된다. 그리고 테세우스는 신화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르게 중얼거린다.


 “정말 믿을 수 있겠어, 아리아드네?  

   미노타우로는 전혀 자신을 방어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2008년 5월 8일




2012년 후기...


   <아스테리온의 집>에 대한 황병하 씨의 번역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 황병하 씨의 변역본을 읽은 상태에서 우연히 <라틴 21>이라는 사이트에서 박병규 씨가 번역한 <아스테리온의 집>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두 개의 번역이 상당히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의문을 느껴 영문판을 찾아 봤지만 여전히 애매한 구석이 있었기에 직접 스페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스테리온의 집 스페인어판을 구해서 직접 확인해 보았고 여기서 황병하 씨의 문제가 되는 번역 두 부분을 지적하고자 한다.



1) 허망하게도 나의 어머니는 여왕이 아니었다. 설령 내 미천한 출신 성분에 대한 자격지심이 그것을 바란다 할지라도 그런 속설에 현혹될 내가 아닌 것이다.

위 문장에 대한 스페인어 원문과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S>> No en vano fue una reina mi madre; no puedo confundirme con el vulgo, aunque mi modestia lo quiera.

E>> Not for nothing was my mother a queen; I cannot mix with commoners, even if my modesty should wish it. 


   대충 번역을 해 보면 "내 어머니가 여왕이었다는 사실은 특별한게 아니다. 비록 나의 겸손이 원한다 할지라도 나는 범인들과 어울릴 수는 없다."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번역이 된다면 아스테리온은 자신이 왕통을 잇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고 그래서 일반인들과는 어울리고자 하더라도 왕의 후예이기에 그러지 못함을 강조하는 것이 된다. 이런 의미라면 황병하씨의 번역과는 정반대의 의미가 되어 버리며 결국은 박병규 씨의 번역에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2) 집 안에는 단 하나의 물 웅덩이도, 마당도, 가축들이 물 마시는 통도, 구유도 없다. 그러나 집 안에는 14개(그러니까 무한한)의 구유와, ...

위 문장에 대한 스페인어 원문과 영어 번역은 다음과 같다.


S>> No hay un aljibe, un patio, un abrevadero, un pesebre; son catorce [son infinitos] los pesebres, abrevaderos, patios, aljibes. La casa es del tamaño del mundo; mejor dicho, es el mundo.

E>> There is not one wellhead, one ~, one ~ ; There are forteen ~~~~


   원문 및 영문 문장을 보면 구유든, 물 웅덩이든 하나씩 있는 것이 아니라 14개씩 있음을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 개가 아니라 14개가 있음을 계속 반복해서 말한다. 이는 14개가 무한임을, 그리고 뒤에, 하나씩 있는 것은 태양과 자신 뿐일 것이라는 추측과의 명확한 대비를 위해 강조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황병하 씨의 번역대로 하자면 물 웅덩이든, 마당이든 전혀 없음이 되었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14개씩 있다고 이야기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



   황병하 씨의 위의 두 번역은 확실히 오역이다. 문제는 그런 오역이 사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면 눈감아 줄 수 있겠지만 작품의 전개 자체를 반대로 뒤바꿔버리는 오역이기 때문에 심각한 오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018년 후기...

   민음사에서 2012년에 새롭게 출간된, 송병선 씨가 번역한 "알레프" 속의 <아스테리온의 집>에서는 다행이도 위의 두 오역이 제대로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 우리 어머니가 왕비였다는 사실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내가 겸허하게 평민이 되고자 한들, 나는 그들과 뒤섞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하나의 우물, 하나의 마당, 하나의 물통, 하나의 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네 개(그것은 무한한 숫자다.)의 구유와 열네 개의 물통과 열네 개의 마당과 열네 개의 우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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