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간젤: 디 벨레(Die Welle)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토마스 제퍼슨은 말했다. 서구 민주주의의 역사는 수백 년에 걸친 투쟁의 역사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단 몇십 년 만에 이러한 성취를 이뤄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서구의 그 장구한 민주주의 쟁취의 역사 못지않게 험난했고 많은 이들의 피와 목숨을 요구했으며 이는 최근 영화 '1987'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민주주의가 결코 저절로 탄생된 것이 아님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90년대 초반 이전까지의 사회상을 경험하지 못했던 요즘 젊은이들이라면, 앞서 간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통해 이뤄 낸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다시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 독재는 올 수 없을 거라고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소중한 경험을 했고 또 촛불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복구시켰다. 이렇게 어렵게 쟁취한 민주주의라는 열매의 달콤함은 순간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그 성취만으로는 부족하다. 끊임없는 관심과 참여가 없다면, 일상의 민주주의에 대한 부단한 자각이 없다면 그 열매는 순간 쓰디쓴 맛이 되어 우리를 오염시키며 과거로 회귀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유지보수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가 있는 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하는 이 체제가 우리의 일상에서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영화가 “디 벨레(Die Welle, 2008, 데니스 간젤 감독, 위르겐 포겔, 프레데릭 로 주연)”라는 영화다.
독일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체육과 철학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 라이너 뱅어(위르켄 포겔 분)는 프로젝트 교육 주간에 무정부주의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독재 정치로 담당이 바뀌었고 마지못해 그는 그 수업을 진행하기로 한다. 수업을 신청한 학생들 대부분에게 프로젝트 교육 주간 수업은 졸업을 위한 의례적인 통과 과정일 뿐인 지겨운 수업이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근 20년이 지난 터라 자유분방한 학생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민주주의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고 더 이상의 독재 정치는 반복되지도 않을 터인데 왜 이런 수업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학생이 비꼬듯이 이야기했다. 히틀러는 과거일 뿐이고 그런 역사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자신들이 저지른 죄도 아닌데 언제까지 그것을 복습해야 하고 죄책감을 느껴야 하냐고...
이런 학생들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독재 정치를 담당하게 된 라이너는 갑자기 흥미를 느꼈고 과연 그럴까? 라고 학생들에게 반문한 뒤 즉흥적인 제안을 하나 한다. 그것은 프로젝트 교육 주간 동안 교실 내에서의 독재 정치에 대한 실험이었다. 우선 교실 내의 책상 배치를 바꿨고 학생들을 재배치시켰다. 그리고 독재에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라이너의 질문에 학생들은 다양한 답을 쏟아낸다. 이데올로기, 통제, 감시, 불만족…… 라이너는 좀 더 구체적으로 모든 독재자가 지니는 공통적인 요소를 물었고 그에 대한 답으로 영도자, 중심적인 대표 인물이 나왔다. 이에 대표 인물을 내세우기를 제안했고 학생들의 의견에 따라 라이너가 그 역할을 맡기로 했다. 하지만 이를 수용하는 조건으로 그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다. 평소 학생들은 그를 부를 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프로젝트 주간 수업 중에 한해서 ‘님’ 자를 붙여 성으로 자신을 부를 것(Sir Bänger), 자신이 호명한 사람들만 말할 것, 그리고 말할 때는 일어서서 말할 것. 이는 존경과 권위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저기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실험이라는 수업 방식에 합의했기 때문에 끝까지 반대하는 몇몇은 수업을 빠지고 나머지는 모두 동의를 했다. 단, 조건은 수업 시간에만 그러기로 한 것이라고 라이너는 분명히 못 박았다.
다음 수업 시간, 라이너는 시작과 함께 학생들을 모두 일으킨 뒤 긴장을 풀어주는 동작이라며 동일하게 왼발, 오른발 순으로 쿵쿵거리며 제자리걸음을 걷게 한다. 라이너의 구령에 맞춰 학생들의 움직임은 점차 일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규율로부터 권력이 나온다. 공동체로부터 권력이 나온다.”라고 칠판에 크게 적은 후 책상 배치를 바꾼 이유를 설명했고, 그 설명을 통해서 “함께 함”, “서로 도움”이라는 공동체적 요소를 강조했다. 이런 그의 신기한 수업에 흥미를 느낀 다른 반 학생들이 라이너의 수업에 자발적으로 찾아들기 시작했다. 다음번 수업에서 라이너는 공동체를 인식할 수 있는 요소에 대해서 물었고 학생들의 여러 답을 통해서 “공동체 정신”이라는 답을 도출해 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조건으로 균일함을, 그것의 구체적인 예시로서 제복을 이야기했으며 자연스럽게 흰색 와이셔츠에 청바지로 옷을 통일하기로 했다. 그 후로 학생들은 모두 흰색 상의에 청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이름을 정하기로 했고 학생들이 제시한 여러 이름들 가운데 투표를 통해서 그 이름을 “디 벨레(Die Welle, The Wave, 물결)”로 정했다. 이 모든 과정이 수업 시간에 자연스럽게 진행된, 철저하게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이었다.
이후로 공동체는 자생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 스스로 웹 사이트를 개설하고 물결 문양의 로고를 만들어 도심 곳곳을 그것으로 도배했다. 또한 공동체의 제스처를 정해서 인사할 때마다 손으로 그 행위를 함께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부지불식간에 공동체에 대한 귀속감과 애착이 생겨났으며 반대로는 공동체 바깥에 대한 배척이 시작되었다. 평소 왕따를 당하던 팀(프레데릭 로 분)이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순간, 그를 배척했던 학생들이 그를 괴롭히는 공동체 바깥의 학생들로부터 그를 지켜 주었다. 그리고 팀은 디 벨레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된다. 이제 디 벨레에 소속되지 않은 학생들은 학교 내에서, 심지어 학교 바깥의 사교 모임에서도 배척당한다. 점차적으로 “디 벨레”는 스스로 그 규모를 팽창시키기 시작했고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삼았고 그들 역시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은 동년배들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디 벨레는 이미 라이너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항상 이런 상황에 반발하는 학생들이 있을 터이다. 디 벨레의 심각성을 깨달은 카로(제니퍼 울리히 분)는 이런 문제점들을 알리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지만 그 노력은 공동체에 의해 처절히 좌절되고 그녀는 적이 되고 감시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그녀의 남자 친구인 마르코(막스 리멜트 분)마저 그녀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이제 디 벨레는 점점 괴물이 되어 가며 그 지역의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 학교에서는 수업 중단을 요청했고 같은 학교 교사인 뱅어의 아내는 디 벨레 문제로 그와 심각한 논쟁을 벌인 후 집을 나가 버린다. 그리고 역시 디 벨레 때문에 다투다 카로의 따귀를 때리고 만 마르코가 찾아와서 디 벨레를 해체할 것을 라이너에게 요구한다. 단순한 의도로 시작했던 실험이 지금은 히틀러 시대를 재현하고 있었고 자기 자신이 히틀러가 되어 있음을 깨달은 라이너는 사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고 수업이 없는 토요일 점심시간에 디 벨레 소속 전원에게 학교로 모이라고 문자를 보낸다.
다음 날 학생들은 모두 흰색 와이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가지런히 착석해 있다. 라이너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쓴, 교육 주간 동안 디 벨레에 대한 감상문 몇 개를 읽어 주었다. 모두가 공동체에 속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부자 학생이든 가난한 학생이든, 우등생이건 열등생이건, 질 나쁜 학생이건 모두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그것을 위한 희생을 감수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라이너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최근 독일은 침체의 길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세계화의 피해자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더 많은 성취만이 위기 탈출의 해법인 양 우릴 현혹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업가들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실업률을 낮춰야 한다는 둥, 우리가 아직도 수출 최강국이라는 둥,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있지 않은가?”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다. 라이너의 목소리와 몸짓은 점점 더 커진다.
“이런 상황을 위협할 최상의 수단은 테러다. 불공정한 이 세계의 틈새를 뚫고 우리가 창조하고 실행할 테러! 우리가 세상을 서서히 무너뜨릴 동안 몇몇 갑부들은 앉아서 안절부절못하고 우주 캡슐 속으로 숨어서 위에서 모든 걸 지켜봐야 할 것이다!”
또다시 쏟아지는 박수를 뚫고 마르코가 일어서서 외친다. 너희들을 세뇌시키려는 거야, 모르겠어? 바로 “디 벨레”가 문제라고! 여기저기서 마르코에 대한 야유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라이너는 눈을 부릅뜨고 외친다.
“아니야. "디 벨레"는 진실을 직면하는 유일한 통로일 뿐이야! 우리가 함께 하면 모든 걸 이룰 수 있으니까! 우리가! 우린 오늘 역사의 한 장을 새로 쓸 기회를 얻었다! 우리 "디 벨레"는 이제부터 독일을 정복한다! 우릴 방해하는 자는 누구라도 "디 벨레"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뜨거운 박수와 갈채, 환호성, 외침…… 그것은 열정에 찬 웅변이었고 하나의 엄청난 선동이었다. 이제 라이너는 “배신자” 마르코를 잡아서 앞으로 데려올 것을 명한다. 학생들 몇 명이 극렬하게 반항하는 마르코를 강제로 잡아서 끌고 나온다. 라이너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이 배신자를 어떻게 할까? 그리고 마르코를 잡아온 한 학생에게 집요하게 답을 요구한다. 네가 이 녀석을 끌고 왔잖아! 선생님이 시켜서요. 내가 시켜서? 그럼 내가 얘를 죽이라고 한다면 죽일 거야? 목을 잘라야 할까? 고문을 할까? 갑자기 어안이 벙벙해진 학생들은 아무 대답을 못한다.
“이게 바로 독재야. 방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겠어? 첫 수업 시간에 했던 질문을 기억하나? 우리한테 아직 독재 정치가 가능할까라는 질문. 이게 바로 파시즘이야!!! 모두 우리 자신은 다를 거라고 착각했지.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그리고 더 끔찍했던 건... 우리가 생각이 다른 이들을 공동체로부터 배척했단 사실이야! 우린 그들에게 상처를 줬어!”
숙연해진 학생들 앞에서 라이너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디 벨레”의 해체를 선언한다. 이어지는 실망과 탄식, 반발. 라이너는 “디 벨레”의 해체를 한번 더 명확하게 선언했고 학생들에게 귀가를 명했다. 구시렁거림과 함께 교실 밖을 나서기 위해 일어서던 학생들을 막아서며 팀이 총을 꺼낸다. “당신은 거짓말을 했어. 디 벨레는 끝이 아니야. 계속되어야 해…” 울먹이며 팀이 읊조린다. 그 읊조림은 차라리 조용한 절규에 가까웠다. 막아서는 한 학생을 기어이 총으로 쏜 후 팀은 눈물을 흘리며 “디 벨레는 내 인생이야.”라고 나지막이 내뱉었고…… 재빠르게 총을 입에 물었고 방아쇠를 당겼다.
영화 “디 벨레”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67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팔로알토 커 벌리” 고등학교에서 교사 론 존스에 의해 진행된 실험이 이 영화의 배경이다. 이 영화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사실은 매우 허약한 것이며 일상에서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일상의 독재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으며 이는 반대로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관심과 참여를 요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디 벨레”는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유지보수(維持補修)를 필요로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을 떠올릴 때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두 가지 경향이 있다. 그 하나는 정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를 절대적인 어떤 것, 하나의 진리 또는 절대선으로 여기는 경향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의 결과로 이어지는 또 다른 경향이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민주주의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 나머지 이 정치 체제가 마치 천부적인 것처럼 느끼고 있으며 과거의 군사 독재 시절로의 회귀는 결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다양한 정치 체제의 하나일 뿐이며 현대 시대에 와서 그것이 부각되는 이유는 요즘 시대의 넘쳐 나는 다양성들과 보편적 가치들을 함께 조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효율성의 측면에서 봤을 때 독재나 과두제와 같은 이전의 여러 정치 체제 역시 시대마다 나름의 효율성을 가졌다. 역사적으로 왕조나 독재라는 체제는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서 나름의 효율성을 발휘했던 측면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로마 제국이 가능했고 칭기즈칸의 몽고 제국이 가능했다. 또한 과거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 역시 박정희 독재의 산물임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로 넘어오면서 그 위험성을 목도했고 인권이나 여러 천부적인 부분들을 고려했을 때 요즘 시대에 가장 부합되고 가장 효율적인 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보편화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차선이지 결코 절대선은 아니며 더더욱 진리도 아니다. 사실 민주주의는 진리의 문제와는 다른 영역이다. 진리는 철학의 영역에 속하며 민주주의는 진리 자체도 아니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민주주의는 대신에 동의와 합의를 우선시한다. 그 결과 동의되지 않고 합의되지 않은 진리보다 동의되고 합의된 거짓을 우선시한다는 역설이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민주주의의 꽃이 만개했다고 믿는 미국에서의 트럼프 정권의 탄생일 것이고 우리나라의 경우 이명박근혜 정권의 탄생일 것이다. 동의와 합의의 결과가 낳은 최악의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경험했던 그대로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도, 진리도 아니며 퇴보할 수도, 과거로 회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정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체제 내에 역행을 허용하는 이런 불합리성을 담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렇게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그 답을 정치와는 다른 영역인 철학에서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 태생의 철학자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는 민주주의라는 이 정치 체제가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과 함께 탄생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강조한 바 있다.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진리를 추구하던 고대 그리스 철학은 소피스트들의 출현 이후로 자신들의 전통과 절대성에 대하여 의심과 회의를 갖기 시작했으며 그러한 소피스트의 가르침은 이후 철학과 민주주의라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두 금자탑을 이룩했다고 그는 평가했다. 민주주의의 특징인 동의와 합의의 정신을 바로 이 소피스트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에 대한 의심,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를 전제로 한다. episteme(에피스테메-진리)와 doxa(독사-억견, 의견)를 극한의 대립항으로 간주하고 절대적 진리를 추구했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어찌 보면 민주주의의 적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의 충실한 제자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우민 정치라고 비난했으며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현인들이 다스리는 철인 정치를 내세웠으며 이는 정치 체제 상에서 볼 때 과두정에 해당한다. 물론 소피스트란 단어에 대한 기본적인 거부감은 자연 동반된다. 하지만 그 거부감은 서구 전통 철학사에서의 승자들의 기록에 의해 왜곡된 측면이 크다. 현대에 들어서 이러한 소피스트의 가르침은 재평가되고 있으며 정치 철학의 관점에서는 더 그렇다. 그것은 바로 절대적 진리에 대한 태생적 거부라고도 할 수 있다. 회의는 기존 질서나 가치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로부터 이어온 또는 지배층에서 정립한 체제나 사상에 대한 회의를 의미한다. 소피스트의 그러한 측면들은 하나의 진리에 대한 의심이며 회의다. 하나의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상대적 진리를 고려하게 되며 결국은 개개인의 다양한, 수많은 진리들이 존재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에피스테메는 독사로 바뀌며 독사의 부정적 측면인 억견은 이제 의견으로 그 의미가 대체된다. 그리고 진리는 다양한 의견들이 될 것이며 이는 자연스레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하나의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결국은 개개인의 여러 개의 진리들에 대하여 동의되고 합의된 진리를 선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동의와 합의를 기본으로 하는 정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재 정치와 대립되는 민주주의는 하나의 진리, 권위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의심을 한다. 그리고 여러 진리들을 내세우며 이것은 그 진리들을 주장하는 나와 너, 그들의 진리를 내세울 수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한 바탕 위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바로 모두의 참여가 가능해야 하며 동시에 참여의 능동성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능동성은 어렵게 성취한 민주주의에 대한 유지와 보수를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단지 성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유지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관심과 참여가, 즉 보수(補修)가 필요하다. 세계 혁명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두 가지를 뽑으라면 나는 1970년 칠레 아옌데 정권의 탄생과 2017년 촛불 혁명을 뽑을 것이다. 이 두 혁명은 무혈 혁명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경이롭다. 세계사 최초로 무장봉기가 아닌 선거를 통해서 사회주의 정권을 탄생시켰던 1970년 칠레. 하지만 그 혁명을 통해 당선되었던 아옌데 정권은 얼마 가지 않아 미국과 군부, 반혁명 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피노체트의 피의 시대로 퇴보해 버린다. 우리의 촛불 혁명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민주주의에서 요구되는 능동성은 그 반대 세력에서 언제나 더욱더 활발히 작동한다.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保守) 언론과 수구 극우 세력들의 능동성은 소피스트들의 부정적인 측면들, 즉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부정적 측면으로서의 허무주의를 확대 재생산하여 정치에 대한 극단적 무관심을 조장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이나 DJ-노무현 정권이나 무슨 차이가 있냐라는 논리는 이명박근혜 정권이나 문재인 정권이나 똑같다는 식의 정치적 허무주의를 계속 생산해 내고 조장할 것이다. 이승만의 자유당 시절부터 박정희를 거쳐,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근혜 정권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2/3 이상 되는 기간 동안 기득권을 유지해왔던 수구 보수 집단들은 소피스트의 이런 부정적인 측면들을 최대한 부각시켜 대한민국 구성원들을 자민당 일당 지배가 계속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 같은 적군파 이후의, 정치의 극단적 무관심에 놓여 있는 일본 국민들처럼 만들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영화 “디 벨레”가 잘 보여주고 있다. 소피스트의 긍정적 측면에서의 의심, 회의, 상대주의. 이는 하나의 진리에 대한 부정이자 동의와 합의를 특징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는 동시에 그것의 지속에 대한 유지보수를 전제하고 있다.
IT 업계에서 S/W 설루션을 판매할 때 판매 비용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신 년 단위의 유지보수 비용을 꾸준히 따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쉽게 말해서 개발한 설루션 자체의 가격보다 장기적인 유지보수 단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구매자 입장에서도 유지보수 비용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사실 대한민국의 가장 큰 폐단이 유지보수를 우습게 알고 그것의 비용을 비용으로 치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리든, 건물이든 만들 때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일단 보기 좋게 만들고 나면 그걸로 끝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 결과로서 거짓말처럼 성수 대교가 끊어졌고 영화처럼 삼풍 백화점이 무너져 내렸다. 우리의 문화재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나아졌지만 이전까지는 문화재의 유지보수에 대한 개념을 잘 몰랐고 그것이 비용이란 사실을 언뜻 인정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프랑스가 직지심경(直指心經)을 반환하겠다고 했을 때 일부에서는 썩 내켜하지 않았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었겠는가? 직지심경이 문화재 보존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프랑스에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까지 잘 보존되었는데 이제 한국으로 돌아온다면 큰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 때 유지보수 역시 그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비용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민주주의는 체제다. 그리고 체제로서의 민주주의 역시 끊임없는 유지보수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4.19를 시작으로 5.18을, 그리고 1987을 거쳐서 힘겹게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문민정부와 10년의 진보 정권을 보낸 뒤의 9년, 우리는 다시 민주주의의 후퇴를, 독재 시절의 부활을 경험했다. 그리고 2016년 촛불을 들었고 2017년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정권 교체를 이뤄냄으로써 민주주의를 보수하고 유지시켰다.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유지보수는 바로 국민 각 개체의 능동적인 관심과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촛불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참여가 어떻게 한국의 민주주의를 보수하고 재건시켰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허약하다.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방심하는 사이 민주주의는 후퇴한다. 그리고 일상에서의 독재가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덮칠 것이다. 하지만 비판 의식을 바탕으로 회의하고 의심하고 끊임없는 관심을 기울이고 참여할 때 민주주의는 건강하게 유지될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싶다.
“민주주의는 일상에서의 유지보수를 필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