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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un 17. 2018

보이는가, 우리 시대의 무젤만이

코레에다 히로카즈:  아무도 모른다 (誰も知らない)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誰も知らない),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야기라 유야, 키타우라 아유, 키무라 히에이, 시미즈 모모코 주연, 2004



   그들의 삶은 짧지만 그들의 번호는 영원하다. 그들이 바로 '무젤매너'Muselmanner(무슬림), 익사자, 수용소의 척추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비인간들이다. 신성한 불꽃은 이미 그들의 내부에서 꺼져버렸고 안이 텅 비어서 진실로 고통스러워할 수도 없다. 그들은 살아 있다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프레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p136, 돌베게



   아우슈비츠로부터 극적으로 생환한 유대인 작가 프레모 레비는 자신의 저서에서 '무젤만'이라는 익명의 인간들을 제시했다. '인간'이라는 말이 그들에게도 통용될 수 있는지 되물어야 하는 무젤만은 당시 나치 수용소 내에서도 제일 하급의 존재로서 가스실로 들어가기 직전의 아사 상태의 사람들을 부르는 수용소 용어인 동시에 그들의 모습이 흡사 기도하는 이슬람 교도(버틸 힘 조차도 없어서 기도하듯 엎드려 있기에...)같다고 해서 생겨난 은어다. 이들은 인간으로서~ 라는 인권적 문제의 차원에도 다다를 수 없는, 철저하게 소외되고 배제되는 군상들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자신의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강명순 역, 열린책들)"에서 후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천재적 후각을 지녔지만 정작 그 자신은 채취가 전혀 없는, 무색무취의 주인공을 내세웠다. 냄새가 전혀 없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깨닫지 못한다. 시각적으로 그의 존재를 볼 수 있음에도 후각적으로 그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볼 수 있으되 인식되지 않고 그는 함께 있으되 없는 사람이 된다. 무젤만은 이와 비슷한 존재다. 하지만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는 타고난 후각으로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존재인 반면에 무젤만은 '스스로'라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존재다. 함께 있으되 그 존재를 깨달을 수 없고,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심지어 그가 죽더라도 그 죽음은 인식되지 않으며 설령 인식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죽어도 그만인 존재들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있어도 없는 존재, 비존재이자 비인간이다. 


   이태리의 철학자 아감벤은 이런 '무젤만'의 개념을 내세워서 자신의 생명 정치 철학을 전개한다. 그는 증언과 증인의 어긋남을 파고들어 아우슈비츠에 대한 증언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무젤만을 내세운다. 증언의 불가능성, 즉 아우슈비츠가 홀로코스트의 현장이라면 생존자는 없어야 하며 그것을 증언하는 생존자, 즉 증인이 있다면 그것은 홀로코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주장에 대하여 거창하게 철학까지 동원되어야 할까 싶지만 사실 이 주장은 제논의 화살처럼 논리적으로 논박하기 쉽지 않은 역설적인 성격을 띠는 주장이다. 아감벤은 증언의 불가능성에 대한 증언의 가능성으로서, 증언할 수 없는 무젤만 자체를 증인으로 내세우는 전략을 취한다. 이러한 무젤만은 더 나아가서 아감벤 철학의 중심 개념이 되는 호모 사케르의 전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은 아감벤의 철학을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젤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우리가 사는 현시대의 시공간에서도 무젤만이라 불릴 만한 군중들을 주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운동의 측면에서 아감벤이 논거로 제시한 무젤만의 개념을 확대시켜 세월호의 아이들이나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 제주 강정 마을 사람들, 밀양 송전탑 반대 할머니들을 현대 사회의 무젤만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무젤만을 "주변의 철저한 무관심으로 인해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특징을 더 이상 갖지 못한 무리들"이라고 한정 지을 때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노숙자들이나 고독사하는 노인들, 학대받는 미취학 아동들을 현대의 그들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용의자 X의 헌신(니시타니 히로시 감독, 2008)"에서 용의자 X를 쫒는 마나부(후쿠야마 마사하루 분)는 거리의 노숙자를 이렇게 표현한다. "이 사람들은 괘종시계 속에 있는 쓸모없는 기어 같아, 매일 무의미한 생활을 반복하거든..." 그리고 용의자 X 테츠야(츠즈미 신이치 분)는 실제로 노숙자 한 명을 대리 희생자로 삼는다. 말 그대로 죽어도 그 죽음은 인식되지 않기에...


   거리의 노숙자들, 주위나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 고독사하는 노인들이나 버려지고 학대받는 아이들... 이들 중 아이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미취학 아동들에 대한 엽기적 사건, 사고가 크게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요즘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 존재하는 대한민국이다 보니 그 충격이 덜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근에만 해도 '원영이 사건'부터 해서 '고준희양 사건', ‘광주 삼남매 화재 사건’, ‘바퀴벌레 계부 사건’까지 적지 않은 아동 학대, 미취학 아동 방치 사건들이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키며 충격을 던져 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이제 아동 학대를 넘어서서 미취학 아동들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케 했으며 사회에서 소외되고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운 좋게 발견되어서 사건으로 알려졌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그들이 어떻게 되어도 아무도 모르고 지나갔을 그런 아동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시스템 개선을 요구하도록 만들었다. 


   무젤만이라 불릴 수 있는, 보호자는 있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미취학 아동들을 주인공으로 그린 영화가 바로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 2004)"란 영화다. 히로카즈 감독 자체가 사회가 감추고 싶어 하는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적지 않게 만들기도 하기에 이 감독의 영화들은 가볍지가 않다. 또한 그런 문제를 영상으로 옮기는 방식이 그들의 일상을 카메라로 섬세하게 따라가며 그대로 담는 방식이기 때문에 자칫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영화들이 히로카즈의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아무도 모른다' 역시 그런 측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면이 담고 있는 조용한 외침은 관객들을 각성케 하는 그 무엇을 던져 준다.



   밤늦은 시간의 모노레일 안,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가 커다란 분홍색 캐리어를 사이에 두고 말없이 마주 앉아 있다. 안타까운 듯 연신 캐리어를 문지르는 남자아이의 손이 클로즈-업된다. 흐릿하게 반사된 여자 아이의 얼굴을 담은 모노레일 유리창 너머로 레인보우 브릿지의 야경이 지나간다.


   모자 지간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와 남자아이가 맨션의 어느 집에서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맨션 입구에서는 이삿짐센터 트럭이 보이고 직원들이 부지런히 짐을 풀고 있다. 아마도 새로 이사를 온 듯하고 그 부부는 집주인으로 보인다. 모자는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분홍색 캐리어와 그보다 좀 작은 검정색 캐리어를 굳이 직접 옮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새로 이사한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캐리어를 열었다. 분홍색 캐리어에서 초등 1학년 또는 유치원에 다닐 나잇대의 어린 남자아이가, 검정색 캐리어에서는 그보다 더 어린 여자 아이가 나온다. 저녁이 되자 이삿짐을 옮겼던 남자아이는 밖으로 나가서 자신보다 두, 세 살 어려 보이는 또 다른 여자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온다. 이렇게 아이는 총 네 명, 장남이자 12살인 아키라(야기라 유야 분), 둘째 교코(키타우라 아유 분) 그리고 캐리어에서 나온 셋째 시게루(키무라 히헤이 분)와 막내 유키(시미즈 모모코)다. 으레 시끄럽기 마련인 아이들 때문에 이전 집에서 쫓겨 난 터라 이런 식으로 숨어 이사를 왔야 했다. 엄마는 룰을 정했다. 밖으로 공인된 자식이자 엄마 부재 시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장남만이 바깥출입이 허용된다. 둘째는 집안 빨래 담당이기에, 그리고 세탁기가 베란다에 있기 때문에 베란다 출입까지 허용된다. 셋째와 막내는 집 바깥뿐만 아니라 눈에 띌 수 있는 베란다 출입도 제한된다. 물론,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다 다르다. 엄마는 꿈이 가수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허황된 꿈을 좇아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면서 아빠들은 무책임하게 떠나 버렸고 아이들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 된다. 하지만 엄마 역시 철이 없긴 마찬가지다. 여전히 여자로서의 행복이란 잡히지 않을 꿈을 좇고 있고 아이들은 짐일 뿐이다. 장남은 중학교를 다닐 나이고 둘째는 초등학교 상급 학년임에도 모두 학교에 가질 않는다. 아니, 엄마는 학교엘 보내지 않는다. 학교 가고 싶다는 첫째와 둘째에게 엄마는 학교에 안 다녀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강변한다. 엄마는 대충 술집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인다. 매일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다. 가끔은 며칠 씩 집에 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면 묵묵히 동생들을 건사해야 하는 건 장남의 몫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장남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이야기했고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나중에 데리러 올 것이라 이야기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엄마는 오사카에 일이 생겼다고, 크리스마스 때까지 돌아오겠다고 하고 얼마의 돈만 쥐어 주고 연락처도 없이 나가버린다. 엄마를 바래다주러 간 장남에게 엄마가 남긴 말... 엄마는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거니? 


   아이들은 엄마를 기다리며 견디고 있었다. 엄마는 한, 두 번 돈을 부쳐줬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여전히 엄마는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엄마가 온다고 마중 나가겠다는 유키... 처음으로 유키를 단장시켰다. 좋아하는 토끼 인형을 가슴에 품고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슬리퍼를 신었다. 유키의 생일이었다. 이사 온 후 유키의 처음 외출... 그것이 생일 선물 이리라. 장남은 유키를 데리고 조심조심 밖으로 나갔다. 역에서 엄마를 기다렸지만 의미가 없다는 걸 아키라는 안다. 돌아오는 길에 머리 위로 하네다로 향하는 모노레일이 보인다. 그날, 아키라는 유키에게 비행기를 보여 주겠다고 약속했다. 크리스마스가 왔다. 엄마가 부쳐온 돈을 4천 엔씩 나누어 크리스마스 카드와 함께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친절한 편의점 알바생에게 부탁해서 아이들의 이름을 적었다. 편의점 바깥에 내어 놓은 크리스마스 케이크 가격이 최대한 떨어질 때까지를 기다렸다 사서 집으로 왔다. 아이들에겐 엄마의 선물이라고 4천 엔이 든 그 봉투를 나눠 주었다. 이제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간의 아이들의 삶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일찍 철이 들 수밖에 없었던 장남과 둘째는 남은 돈을 아끼고 아껴 철없는 두 동생을 살뜰히 챙겼지만 돈도 거의 떨어져 간다. 장남은 아빠들을 찾아갔지만 그들도 엄마 못지않게 철없기는 마찬가지고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다. 돈 오천엔, 만 엔 한 번 챙겨 주는 것으로 그들의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아키라는 도저히 계산이 서지 않는다. 엄마가 보낸 우편의 주소를 통해 연락처를 알아냈고 전화를 걸었다. 네, 야마모토입니다... 엄마가 받았다, 하지만 엄마의 성이 바뀌었다.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는 아키라... 남은 돈은 천 엔짜리 몇 장과 동전들... 지폐 아래로 내지 못한 세금 청구서가 가득하다. 고쿄가 아무 말 없이 엄마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던 4천 엔을 아키라에게 내민다. 아키라는 결심한 듯 애들을 모두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나갈 수 없었던 아이들의 얼굴엔 미소가 만발했다. 최후의 만찬을 하듯 편의점에서 먹을 것들을 잔뜩 샀다. 그리고 집 앞 공원에 가서 실컷 뛰어놀았다. 빈 컵라면 통에 흙을 채워 공원 화단에 떨어진 꽃씨를 심고 물을 주고 희망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전기가 끊겼다. 얼마 가지 않아 전화도 끊기고 수도와 도시가스마저 끊겼을 것이다.


   아이들은 굴하지 않는다. 근처 공원의 화장실에서 생리 현상을 해소하고 역시 공원 수돗가에서 세수도 하고 빨래도 했다. 공원의 철봉은 훌륭한 빨래 널이다. 친절한 편의점 알바생에게 당일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 김밥을 받아서 나눠 먹었다. 셋째 시게루는 혹시나 하고 거리의 자판기나 공중전화 잔돈 배출구에 손가락을 습관처럼 찔러 넣기 시작했다. 우연히 공원에서 만난 아키라와 또래의 여학생 사키(칸 하나에 분)도 그들과 함께 한다. 사키는 정상적인 집안에서 살지만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던 학생이었기에 등교한다고 집은 나서지만 학교엔 가지 않는다. 우연히 공원에서 아키라 남매들을 만나서 자연스레 그들과 어울렸고 학교 대신 매일같이 그들의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가면 갈수록 집은 엉망이 되어가고 점점 견디기 힘들어진다. 장남은 편의점 알바라도 하고자 하지만 16세부터 가능하단다. 친절한 알바생은 경찰서나 보육원 등을 알아보라 했지만 아키라는 정색을 하며 자신을 포함한 네 명이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에 안된다고 한다. 이전에도 그래서 한 번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고... 사키가 나섰다. 아키라에게 자신이 돈을 만들어 오겠다며 함께 거리로 나갔다. 거기서 사키는 중년의 남자를 만나 노래방에 들어갔고 아키라는 밖에서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 사키가 나왔고 만 엔짜리 여러 장을 아키라에게 건넸다. 사키는 그냥 노래만 함께 불렀을 뿐이라고 했지만 아키라는 사키가 건넨 봉투를 내팽개치고 한참을 도망쳤다. 이제 사키는 더 이상 집에 오지 않는다. 


   점점 버티기가 어려워진 아키라는 조금씩 체념 상태로 빠지게 된다. 그날도 어찌할 바를 몰라 혼자서 방황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 연습 경기를 하는 애들을 부러운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인원이 모자란 관계로 대신 선수로 뛰게 되었고 오랜만에 아키라의 얼굴에 미소가 홍조처럼 번진다. 야구를 하고 돌아온 밤, 유키가 방바닥에 쓰러져 있고 아이들은 마냥 지켜만 보고 있다. 밖으로 함부로 나가지 못하는 어린 유키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아슬아슬하게 깨금발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곤 했었는데 그날 의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우선 약을 구해야 했고 아키라는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몇 푼 안 되는 동전으로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지만 엄마에게 전화기를 건네는 사이 동전이 떨어져 버렸다. 안타깝게 약국 주위만 돌다 결국 약을 훔쳐서 집으로 왔다. 다음날 아침, 유키의 손을 만졌다. 순간 아키라는 흠칫 놀란다. 차가웠다. 유키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아키라는 사키를 찾아갔고 그때 자신이 거부했던 그 돈을 빌려 달라고 한다. 유키에게 비행기를 보여 줘야 한다며... 사키와 아키라는 편의점에 들려 유키가 좋아했던 아폴로 초콜릿을 잔뜩 산다. 사키와 함께 집으로 왔을 때 편지가 한통 도착해 있었다. 애들을 잘 부탁한다는 엄마의 메모와 함께 만 엔짜리 몇 장이 들어 있었다. 너무 늦은 도착...


   그날 밤, 이사올 때 유키가 타고 왔던 캐리어에 유키를 담았지만, 그 사이에 자란 유키의 몸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시게루의 분홍색 캐리어에 유키를 담았다. 더불어 유키가 좋아하던 인형을 안겼고 삑삑 소리 나는 슬리퍼를 신겼고 아폴로 초콜릿으로 그 위를 덮었다. 늦은 밤, 아키라와 사키는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 교코와 시게루는 베란다 위에서 유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시게루가 조용히 말한다. 이제 못 봐? 교코는 말없이 시게루의 손을 꼭 쥘 뿐이다. 아키라와 사키는 모노레일을 타고 하네다 공항으로 향했다. 둘은 말없이 마주 보고 앉았고 그들 사이엔 분홍색 캐리어가 있다. 바깥으론 레인보우 브릿지 근처의 야경이 펼쳐진다.


   공항 근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풀로 덮인 넓은 빈 공터에 다다라서 손과 막대기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구덩이에 유키를 누이고 아폴로 초콜릿을 덮었다. 유키의 시신 위로 첫 번째 흙을 뿌렸을 때, 어찌할 바 몰라하는 아키라의 손은 꿇은 무릎 위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비행기는 끊임없이 그들의 머리 위로 이착륙을 반복하고 있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유키를 위한 자그마한 봉분이 완성되었다. 흙투성이가 된 채로 아키라와 사키는 집으로 가는 모노레일에 몸을 실었다. 해는 떠오르고 있었고 둘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들을 실은 모노레일은 무심히 레인보우 브릿지를 건너 하마마츠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일상은 달라진 것이 없다. 엄마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아키라는 친절한 편의점 알바생에게 유통기한이 막 지난 삼각 김밥을 받아 바구니에 담는다. 멀리선 교코와 시게루, 그리고 사키가 물을 담은 바구니와 생수병을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 넷은 이제 나란히 걸어서 집으로 향한다. 건널목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유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비행기가 아키라의 머리 위로 지나가고 아키라는 하염없이 그 비행기를 바라본다. 시게루는 여전히 쾌활하게 뛰어다니고 혹시나 동전이 있을까 자판기와 공중전화의 잔돈 배출구에 손가락을 찔러본다. 그렇게 넷은 웃으며, 장난치며 집으로 가는 길을 재촉한다.



   이 영화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심지어 부모마저도 신경을 꺼버린 아이들의 비참한 일상을 섬세하게, 하지만 너무나 담담하게 영상으로 옮긴다. 그래서 영화는 꾸준히 아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따라서 전개되고 그 일상은 극적인 장면은 거의 없다. 심지어 관객들을 응당 분노케 하거나 눈물이 필요한 상황도 너무나 담담하게, 소박하게 그려내기 때문에 도중에 분노를 하거나 눈물을 흘릴 이유도 없다. 하지만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분노를 느끼고 슬퍼했어야 할 장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영화는 극적인 전개를 피해 간다. 대신 아이들의 일상을 아주 섬세하고 세밀하게 화면에 담는다. 어찌 보면 화면으로 말을 한다. 가령, 엄마가 발라 준 교코의 손톱 매니큐어가 점점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장면들을 연결하여 오지 않을 엄마를 마냥 기다리는 교코의 심정을 대신 표현한다. 가정환경으로 인해 비뚤어진 아이들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고 착한 아이들이란 것을 유키가 밟고 올라선 공원 벤치 위에 떨어진 흙을 교코가 손으로 정리하는 장면이나 없는 친구들을 어렵게 만든 아키라가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치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어렵게 거부하는 장면으로 그려 낸다. 또한 아이들의 시선이나 방 안의 또는 베란다의 물건들을 무심히 비춤으로써 극한 상황의 표현을 대체한다. 이 영화가 던지는 주제는 매우 무겁지만 그 무거움을 장면 전체에 골고루 분배하여 그만큼 가벼워진 각 화면들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하지만 주제가 갖는 무거움의 농도를 그만큼의 섬세함으로 대체하여 장면 장면들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면 가슴 한 곳을 잔잔하게 흔드는 그 무엇이 있다. 


   놀라운 것인 이 영화가 사실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도 실제 사건을 매우 순화시켜 표현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의 모티프는 1988년에 도쿄에서 발생했었고 일본 사회를 경악으로 몰아넣었던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巣鴨子供置き去り事件)"이라 불리는 실제 사건(브런치글: 어쩌자고 참조)이다. 또한 이 사건은 영화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잔인하다. 이러한 끔찍한 사건을 의도적으로 순화시켜 아이들의 일상을 무심하지만 섬세한 눈으로 쫓아가는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지루함을 안겨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는 그 제목 그대로 무젤만으로서의 소외되고 버려진, 심지어 죽어도 아무도 모를 그런 아이들의 일상을 담는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철없는, 무책임한, 죄의식 없는 어른들에 대한 일찍 철들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소리 없는 고발을 담고 있으며 현대의 무젤만으로서의 방치된 아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끝까지 감독은 희망을 여운으로 남기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끔찍한 실화를 소소한 일상인 양 그렇게 섬세하게 추적했을지도 모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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