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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un 26. 2018

어쩌자고

체홉: 자고 싶다(СПАТЬ ХОЧЕТСЯ)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안톤 체홉, 오종우  옮김, 열린 책들)




   아버지 예핌은 통증으로 바닥에서 몸만 뒤척이고 있다. 탈장이 심해졌다는데 통증으로 말은 못 하고 그저 부부부~ 신음 소리만 내뱉는다. 어머니 뺄라게야는 도움을 청하러 주인 저택으로 간 지 오래지만 돌아올 기미가 없다. 바리까는 뻬치까 위에 누워 아버지의 신음 소리만 듣고 있다. 다행히 의사가 집에 도착했고 농가 안으로 들어섰다. 불을 켜세요, 의사가 말했지만 예핌은 부부부~라고 답할 뿐이다. 뺄라게야가 성냥을 찾아보지만 의사가 자기 성냥으로 불을 켰다. 뺄라게야는 농가 밖으로 급하게 나가서 타다 남은 양초를 들고 왔다. 15분 정도 진찰 후 의사는 입원해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뭘 타고 갈지도 몰랐다. 의사의 부탁으로 집주인들이 조그만 짐마차를 보내줬다. 예핌은 짐마차를 타고 떠났다. 아침이 찾아왔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자장, 자장, 자장, 노래를 불러줄게…”, 누군가의 자장가 소리도 들린다. 바리까는 그 소리가 자신의 목소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돌아왔다. 성호를 긋고선 소곤소곤 말한다. 수술은 했지만 아버지는 아침 무렵에 돌아가셨단다. 너무 늦었단다. 바리까는 숲 속으로 뛰어가서 혼자 울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이마가 자작나무에 부딪힐 정도로 뒤통수를 세게 내려쳤다. 바리까는 퍼뜩 눈을 떴다.


   이런 나쁜 년, 대체 뭘 하는 거야? 아이가 우는데도 잠만 쳐 자? 구두 수선공인 집주인이 호통을 치면서 귀를 아프도록 잡아당긴다. 여전히 밤이다. 성상 앞에서 타오르는 초록색 작은 램프, 기저귀와 바지가 널려 있는 천장의 빨랫줄. 눈 앞에 어른거리는 초록색 반점은 여전히 천장에 번지고 있었고 기저귀와 바지가 긴 그림자를 뻬치까와 요람 그리고 바리까 위로 드리우고 있다. 잠깐 졸았을 뿐인데, 꿈에서 죽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 사이에 아기가 울었고 주인에게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았다. 열세 살 어린 소녀인 유모 바리까는 계속해서 아기가 누워 있는 요람을 흔들며 웅얼거린다. 자장, 자장, 자장, 노래 불러줄게… 바리까는 자고 싶다는 바람뿐이었다. 하지만 잘 수 없다. 아기가 울면 다시 매질이 시작되기에... 계속 두 눈은 감기고 고개는 절로 아래로 떨어지며 목덜미는 아프다. 얼굴이 바싹 말라 마비된 듯하고 머리가 좁쌀만큼 작아진 듯하다. 그러나 아기를 재우기 위한 자신의 웅얼거림도, 뻬치까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도, 옆방에서 잠든 집주인의 코골이도, 바리까가 흔들고 있는 요람의 주기적인 삐걱거림도 졸린 바리까를 잠 속으로 유혹하는 자장가 소리다. 초록색 반점, 바지와 기저귀 그림자가 다시 떨리며 깜박이더니 먼지가 뿌옇게 덮인 넓은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등짐을 진 사람들과 그림자들이 길 위에 누워 너무나 곤하게들 자고 있다. 너무나 졸린 바리까도 길 위에 드러누웠다. 하지만 어머니 뺄라게야가 옆에서 바리까를 재촉한다. 둘이서 살 셋집을 찾으러 서둘러 도시로 가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의 재촉은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로 바뀌었다. 이리로 아기를 데려왓!!! 이 말이 반복해서 들렸고 또 한대 얻어맞았다.


   듣고 있는 거야? 더러운 년! 안주인이 화를 낸다. 바리까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어깨가 넓고 뚱뚱한 안주인이 젖을 먹이며 아기를 달래고 있다.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천장의 그림자와 초록색 반점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바리까는 아침이 반가웠다. 걷거나 뛰어다닌다면 잠에 대한 생각은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리까, 빼치까 불을 때! 헛간으로 달려가서 장작을 가져왔다. 뻬치까에 불을 때며 무감각해진 얼굴이 펴지고 머리가 맑아진다는 것을 느낀다. 바리까, 사모바르를 올려놔! 나무를 잘게 쪼개어 불을 붙이고 사모바르 속에 집어넣었다. 바리까, 주인어른의 덧신을 닦아 놔! 바닥에 앉아 덧신을 닦는다. 어디 머리를 박고 잠깐 잤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덧신이 부풀어 오른다. 바리까는 머리를 흔든다. 바리까, 계단 위부터 물청소를 해! 계단을 닦고 방을 치우고 다른 뻬치까에 불을 땐 후 가게로 달려갔다. 싱크대 옆에서 감자를 깎는다. 앉아있는 게 괴롭다. 감자가 아른거리고 칼이 미끄러진다. 식사 시중을 든다. 세탁하고 바느질을 한다. 모든 걸 던져버리고 바닥에 쓰러져 자고 싶은 순간이 다시 잦아든다. 하지만, 바리까, 바리까, 바리까!!! … 날이 저물고 바리까는 무감각해진 관자놀이를 꼭 누르며 미소를 짓는다. 왜? 무엇 때문에 이래야 하지? 바리까는 곧 잘 수 있을 거라 스스로 위안을 했다. 저녁에 손님들이 몰려온다. 바리까, 사모바르를 올려! 차를 반복해서 올리면서 손님들을 바라보며 명령을 기다린다. 바리까, 뛰어가서 맥주를 사와, 바리까, 보드까를 가져와! 바리까, 병따개는? 바리까, 청어를 씻어! 바리까! 바리까! 바리까! 마침내… 손님들이 떠난다. 불이 꺼지고 주인들은 잠자리에 든다. 이제 마지막 명령이 울려 퍼진다. 바리까, 아기 요람을 흔들어!!!


   귀뚜라 울음소리, 천장에 어룽진 초록색 반점, 번지는 기저귀와 바지의 그림자, 몽롱해지는 바리까의 머리. 자장, 자장, 자장, 웅얼거리는 바리까의 소리, 노래 불러줄게… 웅얼거림이 희미해지고 아기는 미친 듯이 울어댄다. 그리고 여지없이 나타나는 먼지 쌓인 포장도로와 등짐을 진 사람들, 예핌과 뺄라게야... 바리까는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모든 사람을 알아본다. 하지만, 하지만 자신을 짓누르며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방해하는 그 힘만큼은 이해할 수 없다. 바리까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 힘이 무엇인지 찾아내려 하지만, 찾을 수 없다. 기진맥진해진 바리까는 온 힘을 다해 두 눈을 부릅뜨고 깜박거리는 초록색 반점을 바라보았고 아기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젠, 알 것 같다. 그 힘, 적(敵), 바로 아기다! 바리까가 웃는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초록색 반점, 그림자, 그리고 귀뚜라미도 뒤따라 웃으며 놀라는 것 같다. 바리까는 접의자에서 일어나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방 안을 천천히 맴돌았다. 자신의 사지를 짓누르는 그 적으로부터 이젠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온 몸이 근질거렸고 유쾌했다. 미소 띤 얼굴로 눈을 끔뻑이며, 초록색 반점을 손가락으로 으르며 바리까는 요람으로 다가갔다. 아기 쪽으로 몸을 굽혔다.


   서둘러 바리까는 바닥에 누웠다. 이제는 잘 수 있다! 기쁨으로 웃음이 온 얼굴로 번졌다.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바리까는 곤히 잠들어 버렸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위의 글은 체홉 소설선집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 실린 “자고 싶다”라는 단편을 요약한 글이다. 체홉이 이 소설을 쓴 시점은 러시아의 짜르 통치가 막바지에 이른 혼란의 시기였고 농노제가 공고할 때였다. 이 시기 농노의 삶은 비참했으며 살기 힘들어 어린 자식들을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노비로 팔았을 것이다. 열세 살의 바리까 역시 구두수선공 집의 유모로 팔려왔고 낮에는 수많은 집안 일과 주인들 시중을 드느라, 밤에는 아기를 재우느라 잠을 청할 수가 없다. 애기가 깨서 울기라도 하면 매질을 당했기 때문이다. 어린 바리까는 자신이 잠을 자지 못하는 원인,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게 되고 그 비극은 소설에 나온 그대로다. 이 소설은 순진한 어린 유모가 자신이 돌보는 천진난만한 아이를 죽인다는 엽기적인 윤리적 터부를 건드림으로써 독자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반면에 그런 상황을 강제하는 제반 사회적 조건들에 독자들은 공감하게 된다. 이렇게 독자들을 이중의 감정에 위치시키는 또 다른 예로서 토마스 하디의 소설 <이름 없는 쥬드(정종화 옮김, 민음사)>를 들 수도 있다. 가난한 시골 출신 쥬드는 사촌 수와 결혼했지만 사촌 지간의 결혼이라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어렵게 자식들을 건사하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하지만 어린 첫 째는 부모의 가난과 고생, 불행이 자신들 때문이라 여기고 어린 동생들을 죽인 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두 소설 모두 사회 제도적 모순이 강제하는 한계 상황에 내몰린,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는 어린 아이들의 비극적이고 극단적 선택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자고 싶다>나 <이름 없는 쥬드>는 소설이다. 그리고 이 소설들이 기반하고 있는 경제 및 사회 구조를 넘어선 현대라면 이런 윤리적 터부를 범하는 엽기적 사건들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단순한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슷한 일이 실제로 현대 사회의 우리 현실에서도 여전히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사실 요즘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체홉의 이 단편과 비슷한, 윤리적 터부를 건드리는 실제 사건을 하나 확인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든 영화 <아무도 모른다(브런치 글: 보이는가, 우리 시대의 무젤만이 참조)>의 모티프가 되었던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巣鴨子供置き去り事件)”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영화는 그 배경이나 구성, 그리고 진행 과정은 실제 사건과 거의 비슷하게 그리고 있지만 결말 부분을 실제보다 훨씬 순화시켰으며 코레에다 감독은 끝까지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하지만 실제 사건의 결말은 영화보다 훨씬 더 엽기적이고 끔찍하며 체홉의 단편 “자고 싶다” 이상으로 윤리적 터부를 건드리고 있다.



   1988년 7월 18일, 도쿄(東京) 도시마구(豊島区)의 스가모(巣鴨) 경찰서로 한 건의 제보가 들어온다. 니시스가모(西巣鴨)의 한 맨션에서 세 명의 아이가 보호자도 없이 오랫동안 방치된 것 같다는 제보였다. 경찰이 사회 복지사를 대동하여 맨션으로 갔을 때 집안은 온갖 쓰레기 더미로 쌓여 엉망이었다고 한다. 남은 음식 찌꺼기는 썩어가고 있었고 화장실 근처에는 변기가 말라붙어 있었으며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그런 집 안에서 남자아이 한 명과 두 명의 어린 여자 아이가 자고 있었다. 남자애는 장남으로서 열네 살이었고 여동생 둘은 각각 여섯 살과 세 살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모두 영양실조 상태였고 뼈와 살이 붙어있을 정도로 야위었다고 한다. 집 내부와 아이들의 이런 상태를 보아, 그리고 오빠가 자신들을 돌봤다는 둘째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은 장기간 방치된 것으로 경찰은 판단했다. 그리고 경찰은 벽장에서 백골화된 유아의 시신이 담긴 상자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뉴스에 크게 보도되었고 이 뉴스를 TV로 접한 엄마가 그제야 경찰서로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사연은 이렇게 전개된다.


   영화와 비슷하게 엄마는 가수가 꿈이었고 변변찮은 여러 남자들과 동거하면서 총 다섯 명의 아이들을 낳게 된다. 엄마는 1973년 26세 때 한 남자와 동거에 들어가서 장남을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혼인신고도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채 남자는 떠나버렸고 장남은 6살이 되어도 취학 통지서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1981년 다른 남자를 만나서 사건 발생 당시 생존한 장녀, 둘째 아이를 낳았지만 역시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다. 1984년에는 세 번째로 남자아이를 낳았지만 이 아이는 분유를 먹이는 과정에서 질식사를 했고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서 엄마는 악취 제거제와 함께 비닐로 싼 후 상자에 담아 벽장에 숨겼다고 한다. 1985년에는 역시 생존한 세 살배기 차녀를, 1986년에는 막내딸을 출산했다. 물론 모두 출생신고는 하지 않았다. 1987년 9월 무렵, 문제가 된 니시스가모의 맨션으로 네 아이와 함께 이사를 했고, 이때 죽은 아이의 시신을 비닐봉지에 넣고 슈트 케이스에 넣어 옮겼다고 한다. 1987년 가을 무렵, 엄마는 한 남자를 알게 되었고 그와 동거하기 위해 장남에게 현금 5만 엔을 쥐어주곤 동생들을 잘 돌보라는 말만 남기고 집을 나섰다고 한다. 장남은 가지 말라고 울면서 엄마에게 매달렸지만 영화에서의 대사 그대로 “엄마는 행복해지면 안 되는 거니?”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 버렸다고 한다. 엄마는 오사카로 간다고 하고는 동경과 가까운 치바의 애인 집에서 1년 가까이 동거하면서 간헐적으로 얼마씩 돈을 보냈을 뿐이었고 장남은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편의점에서 정크 푸드로 연명하며 어린 동생들을 건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1988년 4월경, 아이들을 돌보는데 점점 지쳐갔던 장남은 중학교를 다니는 또래 친구 둘을 사귀게 되었고 집으로 데리고 오게 된다. 둘은 가정 문제로 학교에 별 뜻이 없는 아이들이었고 장남과 알게 되면서 학교는 가지 않고 매일같이 장남의 집에 와서 지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영화와 비슷하다. 영화에서는 친구들의 비중은 크지 않고 막내의 죽음은 의자 위에서 밖을 내다보다 떨어져서 죽은 것으로 처리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상당히 엽기적이다. 4월 21일 낮 무렵, 친구 중 한 명이 전날 자신이 사둔 컵라면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고 두 살배기 막내가 먹었다고 판단하여 막내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부인했지만 이 폭행에 자신도 가담했다고 후에 장남은 스스로 실토했다. 장남의 친구는 막내를 벽장 위에서 몇 번씩 떨어뜨렸으며 떨어지는 막내를 발로 차기도 했고 막내가 울면 그 반응에 더 재미를 느껴 계속 공처럼 막내를 찼다고 한다. 이렇게 동생이 공 취급을 당하는 와중에도 옆에 있었던 장남은 관심 없다는 듯 TV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울음소리가 그쳤고 그제야 장남과 친구들은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막내는 다음날인 22일 아침 8시경에 사망하고야 만다. 26일 장남과 친구들은 막내의 시신을 비닐에 싼 후 보스턴백에 넣고 밤 11시경에 전철로 이동해서 치치부시(秩父市)의 한 공원 수풀에 버렸다고 한다. 그 후로 친구들은 집에 발을 끊었고 그렇게 장남과 나머지 두 여동생만 남았다고 한다. 삼 개월이 지난 7월 17일, 집주인이 아이들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그제야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엄마는 피보호자 유기 및 치상으로 기소되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집행유예 판결의 이유로 판사는 “출생신고도 하지 않아 학교에도 다닐 수 없게 하는 등 모친으로서의 자각이 없고 방치가 계속되었을 경우 아이의 생명이 위급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죄는 무겁지만 자력갱생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고 한다. 막내의 죽음에 대하여 처음엔 두 친구들만 기소되었지만 장남이 막내 폭행에 자신도 가담했다고 실토하면서 상해치사 및 사체유기로 장남도 기소되었다고 한다. 막내 폭행 사실을 털어놓은 후 장남의 표정은 한결 편안하게 보였고 지치부의 현장 검증 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고 관계자는 말했다. 센터 직원은 “정말로 상냥한 아이라고 느꼈다. 사회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살아와 모친이 절대적 존재였지만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거라고 소회했다 한다. 범행을 저질렀던 두 친구에 대해서는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연령이어서 소년원으로 보내졌지만, 장남의 경우 후에 동정 여론이 일었고 도쿄 지검은 “모친만 있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며 장남에게는 교육적 조치가 필요하다”며 소년원이 아닌 교화원에 보내는 것이 합당하다는 이례적인 송치 의견을 제출했다고 한다. 여동생 둘은 양호시설로 보내졌고 후에 모친에게 다시 돌아갔지만 장남에 대해서는 소식을 모른다고 한다.



   자신이 돌보던 아기를 죽인 바리까와 역시 자신이 돌보던 동생을 죽게 만든 장남. 하나는 소설이고 하나는 현실이지만 성격이 비슷한 측면이 있다. 자신 역시 보호를 받아야 할 어린 나이에 남을 보호해야 하는 무거운 짐, 그것도 원치 않은 짐이 주어졌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버틸 수 없을 만큼 참으며 버텨왔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래서 사회적, 윤리적 판단이 불가능했기에 왜?라는 질문에 답을 얻지도 못하고 얻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바리까나 장남은 그 해답을 즉물적 판단에 의지하게 되고 바리까는 애기를 죽이고 무너져 내리듯 평온한 잠을 청했으며 장남은 폭행에 가담했고 친구가 동생을 공처럼 다루든 말든 신경을 꺼버렸을 것이다. 체홉은 어린 유모가 자신이 돌보는 아이를 죽인다는 극단적 윤리적 터부를 건드림으로써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 역시 우리는 장남의 엽기적 행위에 대하여 윤리적 비난을 쉽게 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보호받아야 할 아이가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적 현실이나 제도에 대한 제반 모순에 대하여 비난하고 성토할 것이며 거기에 대한 사회적 반성과 성찰이 논의될 것이다.

 

   이러한 성찰은 당연히 제기될 반향이기에 이 두 비극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어진 상황이 강제하는 고통,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고 그 이유도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바리까는 어쩌자고 아기는 그렇게 울어대는지, 어쩌자고 잠은 쏟아지는지 그리고 장남의 경우에는 어쩌자고 전기나 수도는 끊겨 버렸는지, 어쩌자고 엄마는 연락이 없는지, 어쩌자고 동생들은 그렇게 방해가 되는지 이런 의문들을 끊임없이 속으로 삼켰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쩌자고~만 되뇌며 버티고 버티다 결국엔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는 순간, 그 순간은 어떤 체념의 순간이며 체념의 결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바뀌었으리라.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이유를 찾을 수 없기에 그 이유를 즉물적으로 찾은 결과 바리까는 애기를 찾았고 장남은 어린 두 동생을 찾았으리라. 이는 체념이라는 행위가 만들어낸 극단적인 비극의 한 양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아래에서 어쩌자고만 되뇔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 되뇜의 끝은 체념으로 이어지고 체념은 극단적 비극을 선택하게 된다. 이런 체념의 상태에 다다르기 전 끊임없이 어쩌자고만을 되뇌었을 먹먹함과 안타까움은 결과론적인 비극과는 별개로 우리에게 어떤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체념 직전의 그 먹먹함과 안타까움에 대한 서정은 시인 진은영의 아름답고 달콤한 언어로 표현된 <어쩌자고(우리는 매일매일-진은영 시집, 문학과지성사)>란 시와도 맞닿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시인의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밤은 타로 카드 뒷장처럼 겹겹이 펼쳐지는지.

물 위에 달리아 꽃잎들 맴도는지.

어쩌지고 벽이 열려 있는데 문에 자꾸 부딪히는지.

사과파이의 뜨거운 시럽이 흐르는지.

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지.

유리공장에서 한 번도 켜지지 않은 전구들이 부서지는지.

어쩌자고 젖은 빨래는 마르지 않는지.

파란 새 우는지,

널 사랑하는지,

검은 버찌나무 위의 가을로 날아가는지,

도대체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어쩌자고 종이를 태운 재들은 부드러운지


<어쩌자고, 진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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