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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ul 07. 2018

공허한 트리스탄과 맹목적인 이졸데

투르니에:  트리스탄 복스 (Tristan Vox)

황야의 수탉-미셸 투르니에 소설집, 이규현 옮김, 현대문학



   먼저, 80년대의 미드(미국 드라마)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80년대 우리나라의 경, 방송 시스템이나 콘텐츠 제작 환경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상파에서는 미드를 꾸준히 수입해서 방영해 줬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에 <A 특공대>나 <전격 Z 작전>, <에어울프>, <맥가이버> 등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특히 <V>가 방영되었을 때의 그 반향은 지금 생각해도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 다양한 미드들 중에서 금요일 심야에 방영되는 미드의 경우 성인들을 타깃으로 하는 로맨스물이 대세를 이루었다. 당시 매우 유명했던 미드로 다이하드 전의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으로 나왔던 <블루문 특급>이 있는데 MBC에서 매주 금요일 심야에 방영했던 걸로 필자는 기억한다. <블루문 특급>은 코믹 로맨스 탐정물로서 미국에서 폭풍적인 인기를 누렸고 어느 정도 청불 수위를 가진 터라 한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미드의 후속작이 "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으로 나온 <레밍턴 스틸>이라는 또 다른 탐정 드라마였다. 당시 여자 탐정을 미덥게 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사건을 거의 의뢰받지 못하던 미드의 여주인공은 "레밍턴 스틸"이라는 가상의 남자 탐정을 내세우기로 한다. 대신 자신은 그의 여비서가 되어 사건을 수임받고 해결은 자신이 직접 담당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녀의 뛰어난 사건 해결 능력으로 인해 이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었지만 문제는 탐정 레밍턴 스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를 직접 보고자 하는 의뢰인이 자꾸 늘어난다는 점이었다. 역시 이 문제로 고객과 실랑이를 벌이던 어느 날, 어떤 남자가 뻔뻔스럽게도 자신이 레밍턴 스틸이라며 그녀와 고객 앞에 나타난다. 여주인공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이 사기꾼 같은 남자를 레밍턴 스틸로 내세우게 되고 의도치 않은 동행이었지만 함께 티격태격, 좌충우돌하며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오늘 소개할 <트리스탄 복서>는 이런 로맨스 탐정물과는 관계는 없지만 <레밍턴 스틸>과 마찬가지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주인공에 관련된 이야기다.


   요즘 세대라면 TV가 없는 라디오만의 시대를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TV라는 시청각 매체가 등장하면서 오롯이 청각에만 의존하는 라디오에 몰아닥친 비극은 버글스(Buggles)가 불렀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히트곡을 통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물론, 컬러 TV가 도입되었던 우리의 1980년대만 하더라도 라디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 <응답하라 1988>의 추억 돋는 라디오 프로그램들, 예를 들자면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라든지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또는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등은 그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라면 그 인기를 충분히 공감할 만한 대표적인 라디오 프로그램들이다. 라디오가 TV에 밀려나게 된 이유가 오롯이 청각에만 의존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TV가 없었던 시절의 라디오가 TV 못지않게 환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청각 때문이기도 하다. 목소리밖에 없기 때문에 오롯이 목소리만으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그릴 수 있는 상상의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지금 소개하는 미셀 투르니에의 단편 <트리스탄 복스> 역시 이런 라디오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TV가 등장하기 얼마 전의 라디오 시대의 프랑스, 단편의 주인공 펠릭스 로비네는 작달막한 키에 머리는 벗어졌으며 배는 불록 나온 육십에 가까운 인물로서, 유랑 극단을 따라 프랑스 전역을 떠돌던 무명의 희극 배우였지만 운 좋게 라디오 마이크를 잡게 되면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게 된다. 처음에는 일기예보, 간추린 뉴스, 다음날 방송 프로그램 소개 등의 일로 목소리를 내보내기 시작했지만 누구나 전화를 걸면 들을 수 있는 시보(時報) 서비스 '기상대 84.00'에 목소리를 녹음한 다음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TV가 없던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얼굴도 시선도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신비감을 함축하면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당시의 용어로 '스피쾨르'(우리나라로 치자면 라디오 DJ)는 대중에게 육체가 없이 편재하며 동시에 전능하고 접근할 수 없는 어떤 피조물로 보였다. 이런 스피쾨르들은 규칙적으로 출연함으로써 대단한 대중적 인기를 누렸고 그중의 으뜸은 "트리스탄 복스"였지만 그 목소리의 실제 주인공은 바로 펠릭스 로비네였다. 만성 후두염과 진동성의 기묘한 이중턱 덕분에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저음이었고 갈라지는 듯한 쉰소리는 그 목소리를 더 도드라지게 만들어 청취자들, 특히 여성들의 감정 속으로 냉혹할 정도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이런 로비네의 목소리는 청취자들의 상상을 통해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청취자들이 보내는 수많은 팬레터를 통해서 묘사된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2의 청춘을 구가하는 중년 남성으로서 키가 크고 날씬하며 숱 많은 밤색 머리털을 아무렇게나 흩날리지만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와 고매한 번민의 인상을 주는 동시에 우수에 젖은 커다란 눈을 가진, 유연하고 낭만적인 남자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런 남자여야만 했다. 이제 방송국이 나섰다. 방송국은 로비네에게 넉넉한 금전적 측면을 보장해주는 자유계약을 제안했고 국장은 두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첫째 가명을 사용할 것, 둘째, 절대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말 것.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어 시끌벅적한 인기보다는 조용한 안락을 원했던 로비네는 선뜻 그 제안을 수락했고 그렇게 "트리스탄 복스"가 탄생하게 되었다.


   계약에 따르면 복스와 로비네 사이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져야 했다. 로비네가 일하는 동안 방송 관계자 외의 어느 누구도 스튜디오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고 어떤 사진도 외부로 유출되지 말아야 했다. 서신, 전화, 면담 등 외부로 연결되는 통로는 세심하게 걸러질 것이다. 로비네 역시도 이런 업무에 만족했다. 방송국의 이런 조치가 로비네 입장에서는 트리스탄 복스라는 가상의 약탈자가 자신의 평온한 삶에 반대로 침투하는 것을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호만족에는 두 여인의 역할이 컸다. 먼저, 방송국에서는 제일선에서 마른 체구에 말 같은 얼굴을 한 여비서 플라비 양이 그 침투를 막는 방어막 역할을 했다. 수많은 팬레터와 선물, 소포들을 다 걸러내어 대신 답장을 하고 로비네가 관심을 가질 것들만 추려서 전달해 주었으며 트리스탄 복스의 얼굴을 보겠다고 방송국으로 밀려드는 많은 팬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차단시켰다. 다음으로, 자정이 넘어 스튜디오를 나와서 곧바로 집으로 가게 되면 풍만한 몸매의 다정한 그의 아내 아멜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 식도락을 즐기는 로비네에게 아내가 해주는 오베르뉴식 간단한 밤참은 나날이 변신해야 하는 실체 없는 트리스탄 복스를 창조하느라 지친 로비네의 심신을 풀어주었다. 아내는 솜씨 좋고 세련된 요리사였고 두 부부가 식도락의 지복 속에서 갖는 연대감은 행복과 영원한 사랑의 이미지를 그려냈다.


   여러분들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트리스탄 복스라는 이름은 당연히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그 유명한 유럽 신화에서 대충 따온 것이다. 그렇게 실체 없이 껍데기만 존재하는, 그래서 공허한 트리스탄 복스의 삶에 만족하며 지내던 어느 날 명백히 트리스탄이란 이름에 맞춰 가명으로 서명했을 터인 이졸데가 난데없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이졸데는, 내용 없이 형식만 존재하는 공허한 트리스탄과는 달리 형식은 없고 오롯이 내용만 존재하는 맹목적인 이졸데였다. 팬레터로만 등장하는 그녀는 처음에는 정기적으로 배달되는 일련의 열정적인 내용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내용은 로비네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당혹스러운 세부사항까지 담고 있었다. 로비네의 출신지인 오르베뉴 지방 비옹 지역의 특정 언덕의 이름과 그곳에서 그 언덕의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외설적인 의미를 명확히 드러내는 내용이었다.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업무를 처리하는 여비서 플라비 양은 이 점을 캐치했고 자신의 비상한 기억력에 따르면 로비네가 트리스탄 복스의 목소리로 비옹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확신했다. 잠시의 소강상태를 끝내고 다시 이졸데의 편지 공세가 쏟아졌지만 이번에는 예절의 한도를 완전히 넘어서는 노골적인 애정 표현을 담고 있었다. 그런 맹목적인 편지 공세로 인해 로비네와 플라비 양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방송을 시작하기 전 갑자기 비옹 지방의 토속적이고 고유한 요리인 쇼드 에드 내장 요리를 먹고 싶어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다음날, 플라비 양이 로비네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넸다. 역시 이졸데의 편지였고 거기에는 전날 먹었던 내장 요리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담겨 있었다. 전날 방송 중에 로비네는 그 요리와 관련해서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이 점은 플라비 양도 보증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상은 그가 방송 중에 무의식적으로라도 그 요리와 관련된 어떤 암시를 흘렸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로비네는 점차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 뒤에는 이졸데로부터 특이한 편지가 배달되었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케이크가 그려져 있었고 케이크 주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뚱뚱보 트리스탄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양초 육십 개를 꽂은 큰 피쿠셀로......' 피쿠셀 역시 오베르뉴 지방에서만 먹는 일종의 플랑이었다. 그리고 그 주 토요일에 생일 축하 피쿠셀이 배달되었고 로비네는 열어보지도 않은 채 바로 양로원으로 보내버렸다. 이 사실을 알고 있기나 하다는 듯 다음날부터 이졸데의 거친 편지 공세가 이어졌다. 편지 내용은 허리 아래를 표적으로 삼은, 고해 신부조차 얼굴을 붉히게 만들만한 강력한 색욕을 담은 공세였다.


   이렇게 '식도락의 암시'와 '성애의 분출'이 교대로 드러나는 편지들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로비네의 이중적 삶은 별 탈 없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그런 무탈한 삶을 깨뜨리는 운명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트리스탄이라는 공허한 껍데기의 속을 채우는 사건이었다. 실체 없는 트리스탄이 현실로 걸어 나왔다. 이 사건은 사실 방송국 측의 실수였다. 매주 수요일마다 발간되는 유명 라디오 방송 주간지 "라디오 앱도"는 차주 프로그램 소개와 더불어 마이크 스타들의 사진 부록도 실리는 잡지였다. 하지만 유독 그 주의 주간지는 몇 시간 만에 매진되었고 곧 조사에 착수했다. 프로그램 소개란의 여백에 인물 사진이 하나 실렸는데 젊은 남자의 사진이었다. 약간 두드려진 광대뼈, 우수에 젖은 부드러운 큰 눈, 아무렇게나 흩날리는 숱 많은 밤색 머리... 목소리만으로 청취자들이 상상으로 그렸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 사진의 주인공은 낭테르 테니스 클럽 소속이자 쿠프 바로타 대회 결승전 진출자인 "프레데릭 뒤라토"란 테니스 선수였지만 실수로 사진 하단에 트리스탄 복스란 이름이 인쇄되어 출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말 사이에 유력 일간지에서 트리스탄 복스라는 이름으로 된 그 사진을 확대하여 게재함으로써 그 실체를 더욱더 공고하게 만들어버렸다. 이졸데로 인해서 심기가 불편했던 로비네는 국장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파국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파국이 마침내 도래했다. 가상에서 걸어 나온 트리스탄 복스가 직접 그를 찾아온 것이다.


   유력 일간지가 트리스탄 복스를 기사화한 후 월요일, 사진의 주인공 프레데릭 뒤라토가 직접 방송국을 방문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플라비 양이 몹시 불안에 떨면서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준비 중인 로비네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로비네는 다리에 힘이 쭉 빠져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디 있지? 로비네의 질문에 플라비 양은 그가 사무실에 있다고 대답했다. 로비네의 사무실이 아니라 그냥 사무실이라 답한 것을 캐치한 로비네는 그것이 곧 자신의 사무실이 아니라 트리스탄 복스의 사무실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비네는 자신의 사무실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문틈으로 그를 보았다. 진짜로 트리스탄 복스였다. 넘쳐나는 청취자들의 팬레터 속에서 트리스탄 복스라고 묘사된 모든 육체적 특징을, 어쩌면 정신적인 특징까지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였다. 방송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차마 그를 직접 만나볼 강단도 없었던 그는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진짜로 트리스탄 복스라는 플라비 양의 조심성 없는 말에 로비네는 '사진의 남자라니까!'라고 짜증을 내고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냥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 중 초조함과 당혹감이 묻어나는 로비네의 목소리는 훨씬 더 매력적으로 들렸다. 자정을 조금 넘겨 방송을 끝낸 로비네는 그 침입자가 떠났기를 바랐지만 그는 여전히 로비네의 사무실에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로비네는 플라비 양에게 아내에게 전화해서 자신이 좀 늦을 거라고 전해줄 것을 부탁하고 또 다른 복스와 대면했다. 물론 그 만남은 서로 달가운 만남은 아니었다. 뒤라토는 자신의 어리둥절한 상황과 함께 손해배상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고 서로 감정이 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고 가는 서로 날이 선 대화를 중단시킨 것은 어떤 방송 기사(技師)가 급박하게 전해 준 플라비 양의 투신 소식이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로비네는 사층에서 일층까지 단박에 뛰어 내려갔고 구급차에서 피로 흥건히 젖은 플라비 양을 찾아냈다. 좀 더 가까이 와요, 펠릭스. 로비네는 플라비 양이 처음으로 자신을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플라비 양은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이 이졸데였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하지만 그 이졸데는 성애를 분출하는 이졸데였음을 강조했다. 로비네의 여비서로 있으면서 자신의 삶은 온전히 실재하지 않는 존재에 바쳐진 삶이었음을, 그래서 트리스탄 복스를 억지로라도 실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바로 그때 이졸데가 편지로 등장했고 자신이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녀는 이졸데의 필체를 익히고 식도락의 이졸데가 아닌 요란스럽고 음란한, 성애의 분출을 담당하는 이졸데가 되었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트리스탄 복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 공허를 지워버린 복스의 출현을 확신했고 파국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역시 느꼈다고 했다. 마침내 그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녀는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고 자신이 그를 오게 했다고 확신했다. 물론, 터무니없는 확신이었지만... 하지만 로비네는 복스를 등장시킨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고 심지어 그녀를 파멸시키려고 아내에게 전화까지 하게 했기에 그녀는 홧김에 아내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해 버렸다고 한다. 로비네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내까지 이 문제에 끌어들이다니... 다급하게 물었다. 아내에게 뭐라고 이야기했나? 그러나 플라비 양은 눈을 감고는 머리를 베개 아래로 힘없이 떨구고 말았다.


   이런 난리 통에 로비네는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왔다. 아내는 그를 보자마자 울며 그의 품에 안겼다. 방송국에서의 그 난리에 대한 위로일 거라 생각했지만 아내의 그 행위는 또 다른 엉뚱한 고백이었다. 용서해줘요! 모든 게 내 잘못이에요!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이번에는 아내가 이졸데였다고 한다. 로비네는 아내를 진정시키고 야식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여비서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었다. 트리스탄 복스가 로비네와 함께 있으며 이졸데의 편지들 때문에 큰 난리가 날 거라고 전해 들었다고 하면서 아내는 편지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었다는 고백과 함께 또다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애의 분출을 담당했던 이졸데가 아니라 그녀는 식도락의 암시를 쏟아내던 이졸데였다. 아내는 여느 다른 청취자들과 마찬가지로 매일같이 트리스탄 복스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가 그녀의 남편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라디오의 목소리와 남편의 이미지를 일치시킬 수 없었다. 그녀 역시 미지의 수많은 여자들이 공유했던 트리스탄 복스의 이미지를 그렸고 그의 정체를 알고 싶어 했으며 더 나아가서 그의 연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이졸데라는 이름으로 편지를 썼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로비네가 트리스탄 복스가 되었을 때 그를 다시 붙잡으려는 시도였다고도 했다.


   아내의 고백에 로비네는 오믈렛을 씹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트리스탄 복스, 여러 해 동안 모든 매력과 미덕을 갖춘 이상적인 인물로서 그가 만들어낸 존재, 물론 상상 속의 존재였지만 실재하지 않는 인물은 아니었다. 바로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는 공허한 존재로서의 트리스탄 복스. 그 형식은 수백만의 남녀 청취자들이 만들어낸, 쉽게 믿는 고지식한 대중들 속에서 축적된 잠재 에너지로서 거대한 어떤 성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위광을 정면으로 받는 사람은 바로 플라비 양과 그의 아내였고 비어있는 껍데기를 어떻게든 알맹이로 채워 넣어야 한다는 작위적인 의무감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비존재를 어떻게든 존재케 하기 위한 편집증적인 시도는 자연스레 트리스탄의 운명적 대응체인 이졸데여야 했겠지만 내용 없이 형식만 갖춘 트리스탄과는 반대로 그 이졸데는 내용으로만 넘쳐흐르는, 그러나 그것을 주체할 형식은 갖추지 못한 맹목적인 이졸데일 뿐이었다. 물론 트리스탄이라는 비존재의 현전은 가당치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있을 수 없는 것을 있게 해야 한다는 역설... 하지만 어떤 우연의 개입 하에 그녀들은 마침내 비존재의 현전을 목도하게 되었고 벌어진 사태 앞에서 그녀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을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로비네는 자신의 능력으로 제어할 수 없는 힘을 전혀 인식하지도 못한 채 너무 안이하고도 미숙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스라는 존재는 하루 두 시간의 라디오 방송이 공급하는 사이비 생명 주사를 통해 실재하는 존재다. 따라서 '수도꼭지를 잠가야 한다!'라고 로비네는 생각했다. 제일 간단한 방법은 라디오 방송을 그만두는 것이지만 방송국과의 계약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일방적인 파기는 불가능했다. 대신 플라비 양의 자살로 인한 심적 충격이라는 명분으로 그는 방송국으로부터 삼 주간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주말에 부부는 비옹행 기차를 탔고 처갓집에 함께 머물렀다. 이제 아내는 요리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다. 로비네는 매일 저녁 동네의 큰 카페로 당구를 치러 갔고 그곳에서 습관처럼 늦게까지 머물렀다. 아내는 집에 머물면서 이웃집 여자와 함께 저녁을 보냈다. 어느 날 감기 기운 때문에 일찍 집에 들어왔지만 라디오에 귀를 들이밀고 있어서 자신이 문 여닫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 두 여인을 발견했다. 자신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이름만을 알아들었을 뿐이지만 또다시 울려 퍼지는 따뜻하고 호감을 주는 남자의 목소리... 그 이름은 트리스탄 복스였다! 로비네는 더 이상 자신이 마이크 앞에 설 일이 없을 것이라 예감했고 다음날 신문 가판대에서 "라디오 앱도"의 최근호 겉표지에 트리스탄 복스라는 큰 글씨로 이름이 인쇄된 프레데릭 뒤라토의 사진을 보고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을 것이다. 트리스탄은 항상 그 내용물을 채울 수 있도록 비어있는 그릇이라는 것을... 대중의 상상이 빚어낸 공허한 형식으로만 존재할 트리스탄 복스는 로비네의 존재 여부도 고려치 않는다. 로비네는 자신이 트리스탄이라 생각했었지만 사실은 로비네 역시 잠깐 머물다 가버린 트리스탄의 흔적일 뿐이다. 하지만 그 형식은 변하지 않고 항존하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질료들을 빚어내어 내용물을 대체해 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졸데는? 며칠 후, 로비네는 아내가 몰래 부치려고 준비해둔 편지봉투의 수신란에서도 트리스탄 복스라는 동일한 이름을 발견했다. 그 자체로 항존하는 트리스탄 복스의 공허를 채우기 위한 형식 없는 이졸데의 맹목적인, 하지만 부질없는 헌신도 계속될 것이다. 로비네는 아찔한 고독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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