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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un 20. 2018

문학이란 과연 그런걸까?

볼라뇨:  칠레의 밤(Nocturno de Chile)

칠레의 밤(로베르토 볼라뇨, 우석균 옮김, 열린책들)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 신부 혹은 “H. 이바카체” 선생 – 칠레의 현대사와 함께 했던 위대한 문학 평론가이자 시인. <칠레의 밤>은 오푸스 데이 소속의 하느님의 아들이자 위대한 문인 이바카체의 일생을 기록한 글이다. 이 글은 죽음을 목전에 둔 이 거장의 문학적 삶을 돌아보는 자서전인 동시에 거대한 고백성사이자 수많은 회한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 회한들은 죽기 직전까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가의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고뇌를 기록한 독백이자 자문이다. 이 의문 부호를 지우기 위해 선생은 늙다리 청년이라는, 선생 자신의 문학적 삶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폭언을 쏟아내는 열정적이고 과격한 문학청년에 대한 환영을 하나 내세운다. 선생은 언제나 자신 앞에 서 있는 이 늙다리 청년의 반론에 대해 답함으로써 자신의 문학적 삶의 연대기를 이 책을 통해서 순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제부터 <칠레의 밤>이 기록하고 있는 선생의 문학적 자취를 한번 따라가 보자.


   선생의 문학적 삶은 막 신부 서품을 받았을 젊은 시절, 당시 페어웰과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페어웰, 당대 칠레 최고의 문학 평론가로서 이제 갓 문학 평론에 발을 디딘 선생에게는 또 다른 하나의 신이었다. 그런 페어웰이 ‘라바’라는 자신의 농장으로 선생을 초대했고 선생은 회개하는 영혼처럼 그 어떤 일도 감수할 각오를 하고 그곳으로 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선생은 문단의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 중, 시를 쓰기도 했던 선생의 또 다른 우상이었던 네루다도 있었다고 했다. 감히 범접하기도 어려운, 비평과 시단의 두 거두(巨頭), 페어웰과 네루다 사이에서 그들을 찬양하며 보낸 라바 농장에서의 2박 3일… 선생은 스스로 그 방문을 자신의 “문단 세례식”이라 불렀다. 그 시점을 선생은 1950년대 말로 기억한다고 했다.


   페어웰을 통한 문단 세례식을 거친 선생은 그때부터 본격적인 집필을 시작했다고 했다.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라는 자신의 본명으로 시를 쓰고 ‘H. 이바카체’라는 필명으로 문학 비평을 썼다고 했다. 이바카체의 문학 비평은 점점 유명해졌고 시인 라크루아의 평판을 앞질렀다. 선생의 비평은 페어웰처럼 칠레의 문학을 명쾌하게 밝히려는, 문명화를 위한 이성적인 노력이, 죽음의 해안가를 밝히는 등대처럼 조신하고 화합적인 어조가 담겨 있었다고 했다. 이 시기, 선생은 언제나 페어웰과 함께 했다. 에른스트 윙거와 과테말라의 괴짜 화가의 일화를 통해서 순수를 논했고 그가 이야기한 어느 제화 업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허무와 무상(無常)을 이야기했다고 했다. 젊고 충동적인 그 시절, 선생은 전도유망한 자신의 미래를 꿈꿨지만 페어웰은 암담한 칠레의 미래와 흔들리는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고 문학의 불멸성을 이야기했지만 무너지는 문학적 삶을 예견하고 있었다. 잔잔하게 진동하는 칠레와, 그리고 선생의 원대한 꿈을 흔드는 페어웰의 암울한 레토릭과 더불어 선생은 낙담과 권태의 나락으로 빠졌다고 했다. 시는 쓰지 않았고 비평도 형식적으로 썼다고 했다. 그렇게, 문인들이 으레 겪기 마련인 권태, 푸른 권태, 노란 권태, 그 권태의 늪에서 허덕이던 선생은 오데임과 오이도라는 두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총천연색의 권태로부터의 도피처를 선생에게 제공해 주었다고 했다. 그들의 추천을 통해서 선생은 성당 보존 연구 명목으로 유럽으로의 외유 길에 오르게 되었다.


   선생이 탄 도니체티호(號)는 수많은 경유지를 거쳐 마침내 제노바에 도착했고 선생은 제일 먼저 피스토이아 시(市)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을 방문했다고 했다. 그곳에서 피에트로 신부를 만났고 신부는 유럽에서의 성당 보존의 최대 걸림돌은 비둘기 똥이었으며 해결책은 매를 사용한다고 들려주었다. 선생에게 매가 비둘기 떼를 쫓거나 사냥하는 시범도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선생은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조제프 신부와 그의 매 크세노폰을, 아비뇽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파브리스 신부와 타 쾰이라 불리는 매를, 스페인 부르고스에서 안토니오 신부와 매 로드리고를, 마드리드를 거쳐 벨기에의 나뮈르에서는 로니라는 매를 소유한 성모 마리아 성당의 사를 신부를, 성 베드로-성 바울로 성당의 폴 신부와 그의 매 피에브르를 만나는 기나긴 여정을 이어갔다고 했다. 그 여정 중간중간에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게 꾸준히 보고서를 보냈고 특별히 <매의 이용>을 강조했으며 틈틈이 문학 기사와 서평도 보냈다. 그렇게 총천연색의 낙담과 권태로부터 해방되었고 마침내 선생은 칠레로 돌아왔다고 했다. 


   하지만 조국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고, 칠레는 너무나 많이 변해버렸다고 했다. 선거철이 왔고 아옌데가 승리했다. 선생은 그때부터 그리스 고전을 파기 시작했다. 호메로스부터 시작해서 탈레스, 크세노파네스, 알크마이온, 제논을 읽었다고 했다. 아옌데를 지지하던 군 장성이 암살되고 쿠바와의 외교 관계가 복원되고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을 때 선생은 티르타이오스, 아르킬로코스, 솔론, 히포낙스, 스테시코로스, 사포, 테오그니스, 아나크레온, 핀다로스를 읽었다고 했다. 정부가 구리, 초석과 철을 국유화하고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을 받고 피델 카스트로가 칠레를 방문했을 때 선생은 라푸르카데가 출간한, 시류에 맞춘 전형적인 청춘 소설인 “하얀 비둘기 새끼”에 대한 우호적이지만 형식적인 비평을 써 주었다고 했다. 아옌데에 항의하는 최초의 냄비 시위가 발생했을 때 선생은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알카이오스와 아이소포스, 헤시오도스와 헤로도토스를 읽었다고 했다. 물자 부족과 인플레가 발생하고 농지 개혁이 시행되고 여성청이 생기고 아옌데가 멕시코를 방문하고 유엔 총회에 참석하고 테러가 이어졌을 때 선생은 투키디데스를 읽었다고 했다. 파업과 소요가 발생하고 쿠데타가 기도되고 아옌데의 해군 보좌관이 암살되고 50만 명의 사람들이 아옌데 지지 대행진을 벌였고, 그리고 마침내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모네다 대통령 궁을 향해 쏟아지는 폭격 속에서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때, 그때… 선생은 읽고 있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대고 평온한 상태로 생각했다고 했다. 참 평화롭군, 정말 조용하군. 그리고 선생은 칠레를 위해, 모든 칠레인들을 위해, 죽은 자들을 위해, 산 자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했고, 이제 자신의 문학적 활동을 재개했다고 했다.


   오데임과 오이도가 다시 선생을 찾았다고 했다. 아주 비밀스럽게, 기밀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특별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피노체트를 위시한 군사 평의회 위원인 네 명의 쿠데타 주역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르크시즘 강의였다. 피노체트는 적을 알기 위해서라고 했다. 선생은 열 차례(사실은, 아홉 차례라고 선생은 말했다. 마지막 강의는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였다고 했다.)에 걸쳐서 비밀스러운 강의를,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공산당 선언>과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 위원회 메시지>로 시작해서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 개념>, <프랑스의 계급투쟁 1848~1850>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자본론>, <프랑스 내전>, <임금, 가격, 소득>,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 <무엇을 할 것인가>, <붉은 책>을 거쳐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마오쩌둥, 티토, 피델 카스트로에 이르는 여러 마르크스주의자까지 정성스럽게, 충실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진행했다고 했다. 한편으로, "그런 강의"의 행위 자체의 정당성에 대하여 혼자 고민하고 자책하고 전전긍긍했던 선생은 이 사실을 몰래 페어웰에게,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이라는 전제를 깔고 털어놓았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사실은 문인들 사이에서 모두가 다 아는 비밀이 되었다고 했다. 선생은 비밀 유지 파기와 그 행위에 대한 사실 확인이나 문책 또는 비판이 쏟아질 것이라 예상하고 전화를 기다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했다. 선생의 말로는 사람들은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선생은 바깥출입을 시작했고 시집을 출간하고 수업과 강연도 재개하고 비평집도 출간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이 세계의 공항을 누비는 시절이 도래했다. 철권통치와 침묵의 시절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서평과 평론을 꾸준히 발표하는 선생을 예찬했으며 선생의 시를 칭송했고 선생에게 접근해 평론을 부탁했다고 했다. 페어웰이 그렸던 암울한 미래와는 다르게 이제 선생의 전성시대가 마침내 열렸던 것이다. 


   선생은 기록 말미에 찌라시로 회자될 만한 하나의 사건을 넌지시 집어넣었다. 마리아 카날레스… 수려한 외모와 부를 소유한 여자. 피노체트 치하의 문인들은 밤의 갈증에 허덕였다고 했다. 통금이라는 제약이 갈증을 만들었고 그것을 해소해 준 여자가 바로 마리아 카날레스였다. 칠레 주재 미국 대사관을 남편으로 둔 덕분에 교외에 위치한 거대한 그녀의 저택은 통금과 무관하게 새벽까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문전성시를 이룰 수 있었고 그녀의 문학 살롱은 피노체트 치하의 그 갈증을 상당히 해소해 주었다고 했다. 그녀는 나쁘지는 않았지만 좋은 작품과는 거리가 먼 단편으로 등단한 평범한 작가였지만 그렇게 매일같이 자신의 집에 모임을 만들어 문학가나 예술가들로 하여금 숨 쉴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고 했다. 당대의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초대 손님 중의 한 명이었던 선생 역시 자주, 아니 가끔 그곳을 찾았다고 했다. 술과 여흥 그리고 문학과 예술의 담론이 끊어지지 않는 그 집은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선생은 그곳에 몇 번 가긴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완전히 발을 끊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문이 하나 돌기 시작했다. 그곳 출입을 끊은 몇 달 후, 선생이 친구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당시 그곳을 들락거렸던 예술가 한 명이 술에 취해 화장실을 찾다 헤매다 지하의 이상한 방에 들어가게 되었고 발가벗겨진 채로 한 남자가 탁자 위에 누워 있더라는 소문. 이 소문은 은밀하게 퍼져나갔고 점진적으로 좀 더 구체성을 띠며 여러 친구들을 통해서 선생에게 전달되었다고 했다. 그 방을 찾았던 예술가가 누구였는지, 방이 어떤 구조를 갖고 있었는지, 탁자 위의 그 남자가 어떻게 누워있었는지 그리고 그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상세하게 전달되었고 종국에는 선생이 보더라도, 아니 누가 생각하더라도 '끔찍한 고문'이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소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십몇 년이 지나 피노체트 정권이 교체되고 나서야 그 소문의 진상이 밝혀졌다고 했다. 마리아 카날레스의 문학 살롱의 지하는 정적이나 반체제 인사들을 고문하는 피노체트 정권의 고문실 중의 하나였으며 그녀의 남편 지미 톰슨은 악명 높은 고문 기술자였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카날레스의 저택의 밤은 음주가무와 문학과 예술이 넘쳐나던 지상 세계와 끔찍한 고문으로 인한 비명과 죽음이 지속되는 지하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 했다. 남편은 체포되어 구속되고 좌, 우를 가리지 않고 그렇게 뻔질나게 그녀의 집을 드나들었던 수많은 문인들이나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외면했고 그곳에 갔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의 문학 모임에 출입했던 모든 이가 다 등을 돌렸고 그녀는 이제 홀로 남겨졌다고 했다. 


   선생은 혼자서 그녀를 찾아갔다고 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어 버리는 시대의 양심이 마뜩잖았으리라. 옛날의 영화를 뒤로 하고 이미 낡아 버린 그 저택은 을씨년스럽게 남겨져 있었다. 카날레스가 문을 열어 주었고 그녀는 처음엔 선생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집안은 낡을 대로 낡았고 그녀의 옷도 예전만 못했다고 했다. 돈도 친구도 이미 없고 남편은 자신을 잊어버렸고 사람들은 다 등을 돌렸지만 그녀는 계속 그곳에 혼자 머물며 큰 소리로 웃는 사치를 부리고 있었다고 했다. 그녀의 말로는 예전에 왔었던 문인이나 예술가들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에 기자들만 찾아왔고 자신은 문학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정치, 지미의 일, 지하실에 대해서만 질문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인터뷰 비용을 받는단다. 선생은 그녀를 용서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했다고 했다. 그래도 그녀는 예전에 누가 자신의 모임에 왔는지는 결코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라며 미소 지었다고 했다. 선생은 남편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알고 있었냐고 물어보았다고 했다. 네, 신부님. 참회하고 있나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요. 선생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분노가 일었다고 했다. 그녀는 이제 곧 저택의 실제 주인들이 소송을 통해서 집을 빼앗을 것이며 그들은 집을 허물고 새로 지을 거라고 했다. 선생은 그녀의 사정을 딱히 여기며 여러 가지 현실적인 충고를 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도전적으로 이렇게 반문했다고 했다. "제 문학 경력은요?" 그러곤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 지하실을 보고 싶으신가요? 선생은 그녀의 뺨이라도 갈기고 싶었지만 눈을 감고 가만히 고개만 저었다고 했다. 그녀는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선생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했다.  

   “이곳에서 지미의 부하가 스페인인 유네스코 직원을 죽였죠. 이곳에서 지미가 세실리아 산체스 포블레테를 죽였어요. 가끔 아이들과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전기가 잠깐씩 나가곤 했어요. 비명 소리는 전혀 들린 적이 없고, 전기만 갑자기 나갔다가 조금 후 다시 들어오곤 했어요. 지하실을 보러 가고 싶으신가요?”  

   선생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그만 가보겠다고 했을 때 그녀는 자지러지게 웃었다고 했다. 그리고 떠나는 선생 뒤로 던진 그녀의 마지막 말이 들렸다고 했다.  

   “칠레에선 이렇게 문학을 하는 거예요.”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그녀의 그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고 선생은 말했다. 그래… 문학은 원래 그렇게 하는 거지. 칠레에서는… 어디 칠레만 그런가? 세계 어디에서나 문학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선생은 이렇게 자조 섞인 한탄을 내뱉었다고 했다.



   <칠레의 밤>은 위에서 소개한 그대로 칠레 문단의 최고봉에 속하는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 필명 "H. 이바카체"의 삶을 이바카체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1인칭으로 회고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철저하게 체제 순응적인 한 문인의 자기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삶에 대한 풍자와 문단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고 있는, 매우 공격적이고 반어적인 소설이다. 이바카체의 이 독백은 변명과 위선, 책임 전가로 점철된, 처절한 자기 위안일 뿐이다. 


   1817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칠레는 1891년 대통령과 의회의 권력 분배를 놓고 일어난 끔찍한 칠레 내전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의회 민주주의 체제가 성립된다. 하지만 불안한 체제였고 쿠데타가 반복되다 1924년 루이스 알타미라노 장군의 쿠데타를 마지막으로 대통령제가 정착되었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주의 집단이 발흥하기 시작했고 여전히 내분과 혼란은 지속되었지만 당시의 라틴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그나마 안정된 편이었다. 이바카체가 문단에 막 입문했던 시기, 즉 페어웰의 초대를 받아 라바 농장을 찾았던 시점은 1950년대 말이다. 1952년 선거에서 당선된 이바녜스 델캄포 이후로 6년 단임 대통령제가 안착되었고 1958년 선거에서는 보수와 자유 동맹 후보였던 알레스산드리 로드리게스가, 1964년 선거에서는 우익 진영, 중도파를 기반으로 한 기독 민주당 프레이 몬탈바가 대통령이 되었다. 52년에서 70년까지의 칠레는 좌파 진영이 점차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지만 보수나 중도 보수 기반의 정권이었고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그것이 크게 분출되지는 않는, 마치 여진 같은 상태가 지속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아바카체는 페어웰의 우산 아래 있었고 페어웰의 명성이 그를 받치고 있었다. 마리아 카날레스가 문학적 재능을 통해서라기보다 자신의 문학 살롱을 통해서 문단의 아이돌로 떠올랐던 것처럼 이바카체 역시 페어웰의 문단 세례식을 통해 페어웰의 명성에 힘입어 자신의 문학적 입지를 다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두 사건을 준비라도 하듯 이 시기의 칠레는 정치적으로 잔잔한 혼란기였고 그런 상황 속에서 지주 출신의 농장주 페어웰과 엄격한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오푸스 데이 출신의 신부 이바카체는 점점 세력을 확장하는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을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페어웰은 이런 적개심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으며 네루다의 장례식에서 그들을 비난하는 군중에 대하여 아바카체 역시 그런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이 시기, 젊은 이바카체는 페어웰만큼의 명성을 누리는 그런 문학적 성공을 꿈꾸고 있었던 반면 페어웰은 다가오는 암울한 칠레의 미래와 무너지는 자신의 평판을 허무와 무상이라는 표현으로 예감하고 있었으리라. 이어지는 이바카체의 낙담과 권태는 자신이 열망하는 장밋빛 미래에 대한, 페어웰이 던져주는 비관적 전망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절망적인 낙담과 권태 속에서 이바카체는 운 좋게도 오데임과 오이도를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유럽 외유라는 탈출구를 맞게 된다. 혼란한 칠레를 벗어난 이바카체는 유럽 외유를 통해서 문학적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칠레로 돌아왔지만 그의 표현 그대로, 조국의 상황은 좋지 못했고 칠레는 잘 풀리지 않았다. 아옌데와 사회주의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칠레, 칠레. 너는 어찌 이리도 많이 변해 버릴 수 있는가? 칠레? 아예 변한 거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괴물로?”


   그가 언급했던, 괴물로 변해버린 칠레는 1970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70년, 공산당 소속 네루다가 사회당 소속 아옌데에게 대통령 후보를 양보하며 결성된 인민연합은 그해 대선에서 승리하며 세계 사회주의 혁명사 사상 최초로, 봉기가 아닌 선거를 통해서 무혈 혁명을 이뤄낸다. 그리고 아옌데 정권은 노동자, 농민들의 지지 속에 국유화 조치를 포함한 여러 가지 개혁 조치를 단행한다. 하지만 쿠바 공산 혁명에 겁을 먹은 미국은 경제 봉쇄를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라틴 아메리카에 노골적으로 개입했다. 이로 인해 물자 부족과 인플레가 발생했고 시위와 파업으로 인한 사회 혼란은 가중되었다. 종국에는 미국이 사주한 군부 피노체트가 1973년 9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아옌데는 카스트로가 선물한 총으로 폭격이 쏟아지는 모네다 대통령 궁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하고 치열한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가 소용돌이치는 그 시기 내내, 우리의 이바카체는 골방에 처박혀 그리스 고전 읽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결국 아옌데의 자살로 사회주의 정권이 막을 내리고 피바람을 몰고 올 피노체트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이바카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제야 읽고 있던 그리스 고전을 덮으며 “참 평화롭군”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였다. “참 조용하군.”


   17년간 지속된 피노체트 치하는 어느 독재정권 못지않게 수많은 비극을 양산했다. 그 시절 유혈 통치 하에서 고문이나 즉결 처형, 강제 실종으로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람들만 3,197명이라고 한다. 이러한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는 칠레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73년 9월 11일 이후에는 문학을 한다는 것은 곧 정치에 뛰어드는 것이라는 하이메 꼰차(Jaime Concha)의 지적처럼, 이들은 앞을 다퉈 쿠데타가 야기한 정신적 충격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데 몰두했다. 이렇게 해서 소위 칠레 독재 소설이라는 일련의 작품군이 탄생한다.
- [논문] 자살의 충동에 사로잡힌 칠레 현대사, 우석균 


   위의 인용처럼 쿠데타를 직,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수많은 소설이 쏟아져 나왔으며 그중 우리나라에 소개되고 번역된 대표적인 작품으로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불타는 인내>[1]와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2]이 있다. 이렇게 수많은 문인들이 쿠데타와 피노체트 군사 독재를 비꼬고 풍자하며 비판하는 작품들을 쏟아낼 때에 우리의 이바카체는 그리스 고전을 덮고 피노체트와 군사 평의회의 요구에 따라 태연히 마르크스주의를 강연했고 그 강연이 그들에게 어떻게 비췄을지 전전긍긍한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들의 비호 아래 그는 문단의 실세로 떠오르고 기나긴 군부 독재 시절, 최고의 문단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에 오른다. 이제 페어웰의 자리를 그가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다. 볼라뇨가 등장시킨 소설의 주인공인 이바카체는 사실, 오푸스 데이 신부인 동시에 시인과 문학 평론가로 활동했던, 본명이 “호세 미겔 이바녜스 랑글루아”, 필명이 “이그나시오 발렌테”인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피노체트 정권의 기관지 역할을 자처했던 『엘 메르쿠리오』라는 칠레 최대 일간지에 문학 평론을 쓰면서 그는 칠레 문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소설에서 서술된 마르크스주의 강의도 현재는 정설로 인정되고 있으며 강의자가 발렌테였다는 것도 신빙성이 높다고 한다. 페어웰 역시 "알로네”라는 필명으로 『엘 메르쿠리오』를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에르난 디아스 아리에타”라는 실존 인물이 그 모델이라고 한다.  


   이바카체가 자신의 문학적 삶의 마지막 부분에 별 사건이 아닌 것처럼 할당한 문학 살롱은 이 소설의 제목인 <칠레의 밤>의 의미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군부 통치하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그래서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문인과 예술가들… 그들을 구원해준 마리아 카날레스의 문학 살롱은 공존할 수 없는 두 항을 동시에 공존케 하는 칠레의 밤을 구현했다. 문학과 예술의 담론이 별빛으로 수 놓인 칠레의 밤하늘을 가로지르며 술과 흥취로 오롯한 카날레스 저택의 지상의 풍경, 하지만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의 지하는 반체제 인사와 정적들에 대한 끔찍한 고문, 그로 인한 비명과 죽음이 넘쳐나는 공간이다. 동시간대의 같은 곳에 위치한 이 상반된 두 공간… 볼라뇨가 소설에 등장시킨 역설적인 이 문학 살롱과 이 곳의 안주인 마리아 카날레스 그리고 그녀의 남편 지미 톰슨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문학 살롱이 열린 카날레스의 집 지하실은 실제로 피노체트 시절의 비밀경찰 조직인 국가 정보국 취조실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미국 CIA와 칠레 국가 정보국 소속의 “마이클 타운리”라는 미국인이었고, 그리고 마리아 카날레스는 “마리아 카예하스”라는 실존 인물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가 문인 및 예술가들과 파티를 벌이고 있었을 때 그곳 지하에서는 스페인 국적의 UN 산하 라틴 아메리카 경제위원회 직원인 “카르멜로 소리아”가 고문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3]


   이런 역설적인 현장에 이바카체는 함께 있었으며 후에 고문이 자행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친구들을 통해서 직접 들었음에도 그냥 소문인 양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1989년 비로소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그 진상이 밝혀졌을 때는 그는 여전히 변명으로 일관한다. 한 달에 한 번 밖에 안 갔다느니, 일주일에 한 번밖에 안 갔다느니… 다음과 같이 말하는 그의 변명은 더 이상 구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뭔가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너무 늦게 그 사실을 알았다. 시간이 자애로이 감추어버린 것을 무엇 때문에 들쑤신단 말인가?”

   당시 그렇게 뻔질나게 들락거리던 사람들이 이제 와선 그 문학 살롱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고 그는 비판했지만 자신 역시 거리두기에 여념이 없었을 뿐이다. 그런 비난을 피하기 위한 목적인지 아니면 시답잖은 측은지심의 발로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폐허가 된 마리아 카날레스의 집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앞으로의 삶을 위해 이런저런 현실적인 조언을 하지만 카날레스는 자신의 저택에 실재했던 무시무시한 고문의 기억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문학 경력만 걱정할 뿐이다. 그리고 서둘러 집을 나서는 그의 머리 뒤로 카날레스의 일침이 비수처럼 꽂힌다.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하지요.”

   그는 돌아오는 길에 그 말을 되뇐다. 그래~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하지… 이 말은 체제 순응적인 그의 문학적 삶 전체를 변명하는 훌륭한 수단이 되고 핑계가 된다.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그렇다면 그는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문학이 다 그런 거지. 어디 문학뿐이랴~ 삶 자체가 그런 거지… 하지만 문학은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일까? 카날레스가 자신의 문학 경력을 운운하는 것처럼 이바카체 역시 자신의 문학적 삶에 대한 평판의 몰락이 두려워 이런 방대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늙다리 청년은 이런 변명을 위해 소환된 자신의 분신일 뿐일 것이다.


   이 소설은 볼라뇨의 글쓰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방식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처럼 허구적 요소가 대폭 가미된 실존 인물을 모델로, 또는 실존 인물을 그대로 소설에 등장시키기도 하며 허구적 인물을 마치 실존 인물인 것처럼 소설 속에 혼합하여 허구 같은 실제와 실제 같은 허구를 만들어낸다. 볼라뇨 판 <불한당들의 세계사>라 할 수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네오 나치 또는 극우 파시스트 작가들에 대한 가상의 인물사전 형식으로 쓰인 <라틴 아메리카 나치 문학>이 그러하며 예술의 이름으로 어떠한 비행(非行)도 마다하지 않는 극우 예술가를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먼 별> 역시 그러하다. 볼라뇨는 이런 방식에다 시니컬하고 풍자적인 기법을 동원하여 기존의 거대 문단 권력과 우상을 철저히 해체하고 파괴한다. 이런 해체는 좌, 우를 가리지 않고 수행되는데 대표적으로 칠레가 자랑하는 대문호 네루다와 영혼의 집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사벨 아옌데 역시 그러하다. 비단 칠레뿐만 아니라 후에 멕시코로 건너가서 활동하면서 멕시코 문학의 대부인 옥타비오 파스까지 그의 해체를 피해가지 못했다. 이런 그의 해체는 기존의 고착화된 사조에 대한 해체까지도 뻗친다. 보르헤스부터 시작된 마술적 사실주의 사조인 <붐> 세대의 문학을 해체하고자 하는 포스트 <붐> 문학 사단의 선두 주자였다고 한다. <칠레의 밤>은 이런 기존 문단 권력의 해체를 위한 풍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 국내에서는 <네루다와 우편배달부>라는 제목으로 민음사에서 번역 및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와 함께 앞서 [투사를 그린 소설과 회한을 노래한 영화]라는 제목의 포스트를 통해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2] 아옌데의 5촌 조카였던 이사벨 아옌데는 피노체트의 쿠데타 후 망명을 떠나야 했다. 인민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인 1930년대부터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까지의 칠레의 격동기를 4대에 걸친 두 집안의 역사로 풀어낸 작품이 <영혼의 집>이다. 이 작품은 민음사에서 두 권의 책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3] 피노체트 치하에서는 이렇게 칠레에 거주했던 적지 않은 스페인 사람들이 고문 과정에서 죽었으며 후에 스페인 법원이 영국을 방문한 피노체트를 고발하여 범죄 인도 요청을 하고 스페인 법정에 세우고자 시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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