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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Sep 07. 2018

아름다워서 슬픈 계피색의 밤

브루노 슐츠: 계피색 가게들(Sklepy cynamonowe)

계피색 가게들 (브루노 슐츠, 정보라 옮김, 길)




   "책장은 햇빛에 번쩍였고 금빛 배의 달콤하게 녹아내리는 과육과 함께 향기를 풍겼다. 그 빛나는 아침에, 대낮의 광채 속에서 나타나는 과일의 여신 포모나처럼, 아델라가 장바구니에서 태양의 색색가지 아름다움을 흘리면서 시장에서 돌아오곤 했다. 그것은 투명한 껍질 아래 과즙을 가득 찬 윤기 나는 분홍빛 버찌와 맛보다도 향이 너무나 좋은 신비스런 검정빛 버찌, 그리고 금빛 과육 속에 그 기나긴 오후를 담고 있는 살구들이었다." (P-9)



나는 책을 펼쳤다. 후안 카를로스 비달이 번역한 브루노 슐츠의 『전집(全集)』으로, 나는 그 책을 읽어 보려고 노력했다.
<먼 별, 로베르토 볼라뇨, 열린 책들, p192~193>


   위의 인용은 볼라뇨가 쓴 <먼 별>이란 소설에서 가져온 것이다. 문인으로 등장하는 소설의 주인공은 피노체트 시대의 극우 시인이자 예술가, 비행사인 카를로스 비더를 수 십 년에 걸쳐 추적하던 막바지에 그가 자주 온다는 카페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는 동안 위장으로 펼친 책이 "브루노 슐츠"라는 폴란드 작가의 전집』이다. 그렇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브루노 슐츠"가 쓴 『계피색 가게들』이란 작품이다. 브루노 슐츠는 계피색 가계들모래시계 요양원, 이렇게 단 두 권의 소설만 남긴 채, 50세가 되던 해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폴란드에 있는 드로호비츠의 게토에서 나치의 총에 맞아 사망한 비운의 작가다. 슐츠는 소설가 이전에 화가였으며 중학교 미술 교사이기도 했기에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모은 우상숭배의 책이라는 화집도 한 권 남겼으며 모래시계 요양원은 자신의 그림을 중간중간에 삽입한 소설이기도 하다. 슐츠의 계피색 가계들모래시계 요양원은 모두 정보라 씨에 의해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으며 역자는 계피색 가계들 번역본에 적절하게 슐츠의 그림들을 끼워 넣었다. 계피색 가게들은 브루노 슐츠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전적 소설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하나의 내러티브를 가진 소설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아이의 시선으로 재구성하여 개별적인 여러 이야기들을 어찌보면 이야기라기보다는 수필처럼 구성해서 풀어낸 소설이다. 하지만 각 이야기들은 환성적이면서도 몽환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로테스크하기도, 코믹하기도 하게 서술되어 있다. 하나의 내러티브가 아니기 때문에 재미라는 소설적 요소가 반감될 수는 있겠지만 계피색 가게들은 이런 재미라는 요소를 따지기 전에 각 이야기들의 서술 자체에, 슐츠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빚어진 너무나 아름답고 황홀하며 달콤한 문장 문장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그런 표현들을 따라가는 것 자체에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찬찬히 음미하며 읽어간다면 아마도 독자들은 그 아름다운 문장들을 하나하나 모두 소장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내러티브적 측면 이전에 문체나 표현의 측면, 즉 심미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이 우선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소설 계피색 가게들은 다음과 같이 총 16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이야기인 <혜성>은 슐츠가 모래시계 요양원』 이후에 별도로 중편으로 발표한 글이지만 <혜성> 역시 슐츠의 어린 시절 경험을 담고 있기에 역자가 이 소설과 함께 엮었다고 한다.


8월

방문

마네킹

마네킹에 대한 논설 혹은 창세기 제 2권

마네킹에 대한 논설 계속

마네킹에 대한 논설 결론

네므롯

까롤 아저씨

게피색 가게들

악어 거리

바퀴벌레

돌풍

위대한 계절의 밤

혜성


   각 이야기에는 포목점을 경영하는 부모님과 직원들, 하녀들(특히 아델라), 작가의 친척들이 주요 인물들로 등장하며 그들이 사는 동네가 주 배경이 되어 펼쳐지는 경험들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려낸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다. 이 경험들은 서로 섞여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마치 개별적인 단편처럼 느껴지기에 이 소설을 하나로 뭉뚱그려 전체적으로 소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각 에피소드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로 이 소설에 대한 언급을 대신할 것이다. 각 이야기들은 슐츠 개인의 경험과 관련된 이야기들과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들, 이렇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개인적 경험의 경우는 주로 독립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지만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서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여기서는 슐츠 자신의 독특한 경험에 관하여 서술한 이야기들에 대하여 먼저 소개하고 뒤이어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슐츠의 개인 경험에 관한 이야기들은 <8월>, <네므롯>, <판>, <까롤 아저씨>, <돌풍>, <악어 거리> 그리고 <계피색 가계들>이다. 그리고 이 글 앞쪽에 제일 먼저 인용한 글이 『계피색 가게들』의 첫 번째 이야기인 <8월>의 도입부를 채운다. 무덥고도 싱그러운 8월의 묘사와 함께 시작되는 이 에피소드는 8월의 뜨거운 어느 일요일 오후,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아가따 숙모네 집으로 산책을 나섰던 기억으로 채워진다. 작열하는 태양빛으로 빛나는 한 여름 황금빛 대낮의 시장 거리와 오래된 집, 거리의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유려하면서도 서글프다. 


   우리의 부드러운 발걸음 아래 길에 깔린 네모진 돌들은 천천히 지나가 과거로 쌓여 갔다 - 어떤 돌은 사람 살갗의 옅은 분홍빛을 띠고 있었고, 어떤 것은 금빛, 어떤 것은 푸른 회색이었지만, 모두 납작했고, 햇빛 아래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해시계처럼, 소멸의 지점으로 밟아 가다가 축북 받은 무(無) 속으로 사라져 갔다. (P-13) 


   그 거리의 모퉁이, 풀과 잡초와 엉겅퀴 덤불이 뒤엉킨 정원에는 어린 시절 우리도 볼 수 있었을 법한, 남루한 옷을 걸친 지저분한 백치 소녀 뚜야가 있다. 뚜야에 대한 표현은 그로테스크한 동시에 관능적이기도 하다. 8월 오후 한 때의 산책은 그렇게 뚜야를 거쳐 아가따 숙모네의 가족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로 끝이 난다.


   <네므롯>은 잠든 사이 집으로 오게 된 새끼 강아지에 대한 매우 앙증맞고도 인상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자신의 품에 들어온, 하지만 자신보다 더 어리고 가냘픈 존재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을, 조그마한 생명체에 대한 어렴풋한 애착과 모성애를 공감케 만든다.


   강아지는 따뜻하고 공단처럼 부드러웠다. 매박은 작고도 빠르게 뛰었다. 두 귀는 꽃잎처럼 보드랍고, 눈은 불투명한 푸른색이었다. 분홍색 입에는 손가락을 넣어도 아무 해가 없었으며, 앞발가락 위에 매혹적인 분홍색 혹들이 바깥쪽으로 나 있는 발은 섬세하고 순수했다. (P-79)


   <판>은 어린 시절 두려움의 대상일 수도 있었을 노숙자를 어린아이의 시선 그대로 그리고 있다. 더 이상의 접근을 금지하듯 막혀있는 음침한 헛간과 창고 뒤편의 경계... 모험을 하듯 개구진 사내아이의 용기로 느슨해진 판자 하나를 부수고 나아갔을 때 펼쳐진 광활한 공터. 그곳의 수풀과 가시덤불을 장애물처럼 뚫고 나아가다 보면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또 다른 경계를 이루는 심연의 어둠을 맞닥뜨린다. 그 덤불 속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았다면...


   그 눈이 멀 것 같이 빛나는 흰 점의 삼각형은, 햇빛에 탄 밀림의 엉겅퀴 사이로 도깨비불처럼 나를 인도하였다. 감히 그 공허한 심연 속으로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나는 가시덤불의 가장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나는 그를 보았다. 우거진 가시덤불 속에 겨드랑이까지 빠진 채, 그는 내 앞에 웅크리고 있었다. (P-88)


   모험의 끝에 이르러 폐허처럼 버려진 정원의 가시덤불 속에 웅크리고 있던 부랑자나 주정뱅이를 봤을 때 공포에 질려 꼼짝 못 하는 아이의 시선에 그것은 그리스 신화의 '판'으로 비쳤을 것이다. 얼어버린 아이의 눈에 비친 노숙자의 묘사는 매우 섬세하고도 그로테스크하게 이어지며 아이가 느꼈을 그 과장된 두려움을 그대로 전달해준다.  


   <돌풍>은 어느 밤, 심하게 몰아친 돌풍의 경험을 마법 세계 속의 모험처럼 그리고 있다. 어른들의 입장에서야 돌풍은 돌풍일 뿐이겠지만 아이의 시선에는 그것이 경처동지할 만큼 거대한 사건으로 보였을 것이고 또 하나의 모험의 세계를 펼쳐주는 사건일 것이다. 돌풍이 가져다준 이 모험은 환상의 세계를 펼쳐 놓아 프라이팬과 냄비와 솥의 연회가 펼쳐지고 지붕은 새들처럼 제멋대로 날아다니고 집 천장은 허파처럼 부풀어 오르고 교회 주위의 거대한 너도밤나무들은 끔찍한 광경의 목격자들처럼 팔을 높이 들고 서서 비명을 지르고 또 지른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을 피해 집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경험한 돌풍의 밤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그들은 끔찍한 어둠에 대하여, 돌풍에 대해서 거의 횡설수설 이야기했다. 바람에 젖은 그들의 털코트는 이제 바깥공기의 냄새를 풍겼다. 그들은 빛 때문에 눈을 깜빡거렸다. 그들의 눈에는 아직도 밤이 가득해서 눈꺼풀이 깜박일 때마다 어둠을 흘렸다. (P-137~138)

  

   이런 아름다운 문장들로 구성된 에피소드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제목에 해당하는 <계피색 가게들>이다. <계피색 가게들>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도시가 겨울밤의 미궁 속으로 끝없이 뻗어가다가 짧은 새벽빛이 흔들어 깨우면 마지못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아침과 저녁의 털북숭이 어스름에 양 가장자리를 걸친 그 가장 짧고 졸린 겨울날에, 아버지는 이미 다른 세계에 넋을 잃고 빠져들어 굴복해 버린 상태였다. (P-95)


   <계피색 가게들>은 꿈과 현실을 섞어놓은 듯한 몽환적인 서술들로 이어져 마치 푸른 하늘이 부른 "꿈에서 본 거리"라는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어릴 적 우리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던 어떤 장소를 찾아 헤매지만 그것이 꿈이었는지 실제로 그랬는지 혼동하게 만듦으로써 그곳에 대한 애착을 더욱더 애달프게 만든다. 그것은 어찌보면 데자뷔를 느끼기 전에 그것을 느껴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환상성을 심어준다. 


   봄처럼 따뜻한 겨울밤, 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보러 나섰던 아이는 집에 지갑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부모의 심부름으로 지갑을 가지러 간다. 하지만 아이는 집으로 가기 전, 자신이 동경했던(상상으로든 실재하든 관계없다) 계피색 가게들이 보고파 잠깐의 모험을 감행한다. 희미한 기억을 따라서 골목골목을 돌지만 곧 길을 잃어버리고 몽환적인 거리거리를 꿈처럼 헤맨다. 너무나 아늑하고 따뜻한 거리와 함께 이어지는 학교의 모습, 그것은 마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처럼 과거의 경험과 연결되면서 그 아련함은 더욱더 도드라져서는 종국에는 또 다른 경험으로 재탄생한다. 어느덧 꿈의 시간은 보드랍고 따스한 눈과 함께 아침에 다다르고 아이는 꿈속에서 현실의 아침을 맞이한다. 그리고 에피소드는 다음의 글로 마무리된다.


   나는 하늘의 광채로 밝혀진 겨울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별로 가득한 하늘이 너무나 넓고 너무나 멀리까지 펼쳐져 있어서, 겨울밤 한 달을 충분히 뒤덮을 만한 밤의 모든 현상들, 모험, 사건과 축제를 감싸는 은빛과 색색의 천구로 가득한 몇 개의 하늘들로 갈라져 멀어질 것처럼 보이는 그런 맑은 밤이었다. (P-98)

   

   <까롤 아저씨>와 <악어 거리>는 다른 글들과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 <까롤 아저씨>는 이혼하고 홀로 살아가는 독신 남성의 고독하고도 나른한 하루를 우울하게 그리고 있으며 <악어 거리>는 당시 폴란드에 유입되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단면들(이 시기에 슐츠의 고향 드로호비츠에서 석유가 발견되었고 급격한 자본의 유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을 매우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욕망으로 부풀어 오른 상업 단지가 생산해낸 향락과 퇴폐, 부패의 거리를 음산하고 기괴하며 몽환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이러한 악어 거리의 묘사 전체가 하나로 묶여 그로테스크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은연중에 담고 있다고 한다.


   특히, 1986년에 스티븐 퀘이, 티모시 퀘이 형제는 <악어 거리>의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특징을 한껏 부각시켜 21분짜리 동명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독창적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악어 거리(Street Of Crocodiles, 스티븐 퀘이, 티모시 퀘이 감독, 1986)



   작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아름답고 수려한 표현들로 구성된 각 이야기들 중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는 <방문(訪問)>, <새>, <마네킹> 연작, <바퀴벌레>, <위대한 계절의 밤>과 <혜성>이 있다. 이 이야기들의 전체에서 묻어나는 서정은 어둡고 슬픈, 멜랑콜리한 감정선을 따라가고 있으며 그런 감정선들을 끌고 가는 주체는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 본 아버지가 된다.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들이지만 그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아버지다.


   아버지에 대한 어린 슐츠가 느꼈던 그 서정은 심보선 시인의 시 <붉은 산과 토끼에 관한 아버지의 이야기(눈앞에 없는 사람-심보선 시집, 문학과지성사)>에서 느낄 수 있는 서정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붉은 산과 토끼에 관한 아버지의 이야기

심보선


소싯적 아버지는 붉은 산속에서 토끼를 키웠다

열 마리를 백 마리로 백 마리를 천 마리로 늘리겠어!

아버지는 산 아래를 향해 주먹을 흔들며 외쳐댔다

아버지는 헤밍웨이와 스타인벡을 읽으며 토끼를 키웠다

달무리 진 밤 희뜩한 별빛들로 어설픈 천점(天占)을 보고

손수 담근 산머루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마른 나뭇가지를 들어 허공에 불립문자를 휘갈기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쓸쓸한 얼굴로 말하곤 했다

토끼가 늘어날수록 고독과 광기도 늘어나더군


그러나 하루하루 아버지의 함성은 녹슬고 주먹은 금이 갔다

깨우침은 정처 없어지고 용기는 구부정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산림단속원들이 토끼농장에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산 아래 마을로 내달렸다

거기 어느 피륙 가게 경리였던 어여쁜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는 산에 두고 온 아름답고 사랑스런 토끼들을 떠올리며 울었다

어머니의 긴 손가락이 아버지의 봉두난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다른 한 손의 긴 손가락으로는 굴리던 주판알을 마저 튕겼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그때를 떠올리며 말하곤 했다

너희 어머니는 동정심과 현실감각을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처자였지


세월은 흐르고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토끼 같은 삼 남매가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독과 광기는 점차 잦아들었다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고자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아버지는 헤밍웨이와 스타인벡을 읽으며 우리 삼남매를 키웠다

아버지는 때로 쓰고 때로는 말했다

때로는 환멸에 대해서 때로는 치욕에 대해서 쓰고 말했다

마치 행복을 불러오는 유일한 방법이라도 되듯이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회한에 젖어 말하곤 했다

나는 전도양양한 토끼 농장주였어

공무원 시험도 단 한 번에 합격할 만큼 머리가 좋았다구

하지만 그 여우 같은 산림단속원들이 토끼를 무자비하게 살육했지

이제 나도 그놈들처럼 공무원이 된 거야

그놈의 돈 때문에 원수들과 한 무리가 된 거지!

언젠가는 붉은 산으로 돌아가고 말 거야

거기에는 어쩌면 살아남은 토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아버지는 붉은 산속에서 토끼를 키웠었다

아버지는 붉은 산 아래에서 우리 삼 남매를 키웠다

아버지의 마음속엔 많은 방랑들이 녹슨 왕관처럼 굴러다녔다

아버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고 아무도 증오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태양이 영원히 뜨거운 상태로 죽어가듯이 죽어갔다


아버지는 몇 해 전 어느 여름날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의 붉은 산이 어디인지 모른다

아버지의 붉은 산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거기가 어디든 거기가 실제로 존재하든 아니든

아버지는 결국 붉은 산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토끼들이 살고 있을 붉은 산으로

고독과 광기가 아직도 뜨겁게 불타고 있을 그 붉은 산으로



   에피소드 속의 아버지는 어떤 낭만, 하지만 좌절될 낭만을 끊임없이 쫓는, 교체되는 여러 낭만들에 계속 집착한다. 쉽게 말해서 정신줄을 조금씩 놓아가면서 기행을 일삼는, 광인이자 폐인이 되어가는 아버지다. 시인의 아버지를 대변하는 색이 붉은색이라면 작가의 아버지의 색은 회색이며 이 회색은 겨울이라는 계절의 일상이 병든 아버지에게 안겨주는 권태와 지루함을 대변하기도 한다. <방문(訪問)>에서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해서 약병과 알약통과 가게에서 가져온 장부에 둘러싸여 하루 종일 침대에서 지낸다. 건강의 악화와 더불어 어떤 집착이 시작되고 그것은 다양한 기벽과 더불어 광인으로 변해가는 전조가 된다. 시인의 아버지가 토끼에 집착하듯 <새>에서 작가의 아버지는 새에 집착하여 집안 옥상 전체를 새장으로 개조하고 새를 기르기 시작했고 어느 날, 새똥과 깃털로 난장판이 되어버린 옥상에 심판자처럼 물 양동이와 빗자루를 들고 나타난 아델라에 의해 꿈은 좌절된다. 이어 <마네킹> 연작에서는 자신만의 창조론에 집착하여 그 이론에 관심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어린 가게 여직원들을 모아놓고 어쭙잖은 철학적 강의를 장황하게 이어가다 역시 아버지를 다룰 줄 아는 아델라에 의해서 강연은 중단되고 만다. 조금씩 천천히 스러져가던 아버지는 마침내 <바퀴벌레>로 변해버렸고 아델라는 무심하게 스레받이로 아버지를 쓸어 담아 버린다. 특히, <바퀴벌레> 에피소드는 카프카의 <변신>을 저절로 연상케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위대한 계절의 밤>은 윤달을 의미한다. 있기도 하고 없어도 그만인 윤달의 마법적인 특성처럼 포목점의 결실인 천들이 펼치는 형형색색의 너울들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묘사와 함께 이 결실들을 지켜내고자 하는 아버지의 미친듯한 눈물 어린 고투는 위대한 계절의 밤 아래의 포목점을 환상적으로 만든다. <혜성>은 1910년에 핼리 혜성이 지구로 접근했을 때의 상황을 환상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혜성이 주는 과학적 환상은 아버지로 하여금 전기와 기계에 집착하게 만들어 숙부를 분해하고 기계로 만들게 한다.


   이런 연속되는 일련의 집착들은 점점 병들고 미쳐가는 아버지의 기행을 아이의 시선에서 마술처럼 보여주고 있지만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린 작가의 시선에 비친 아버지는 아픔이고 슬픔인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자 결코 포기하지 않은 불굴의 상징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아버지는 시인이자 철학자, 과학자, 발명가이고 유대의 선지자이자 전통의 수호자였을 것이리라. 시인의 아버지는 어느 여름날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작가의 아버지는 시간이 멈춰버린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요양원으로 간 작가의 아버지의 이야기는 슐츠의 마지막 소설 모래시계 요양원에서 계속된다. 아버지와 관련된 단편들의 소개는 추후 모래시계 요양원』을 소개할 때 좀 더 자세히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 슐츠의 소설 계피색 가게들』의 소개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점은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이 슐츠의 자전적 소설이며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지만 하지만 당연히 이 경험은 소설적 재구성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소설에서는 우울과 슬픔으로 헌사된 아버지였지만 실제로 슐츠의 아버지는 기인이 아니라 포목점을 경영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몸 상태도 건강했던 유대 상인이었으며 말년에서야 건강이 나빠져서 포목점을 처분하고 집에서 요양했다고 한다. 소설은 소설이기에 저자와 주인공을 일치시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관해서도 한마디 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번역자인 정보라 씨에게 놀라게 된다. 물론 소설의 원문을 보진 않았지만 슐츠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그대로 계피색 가게들이나 모래시계 요양원에서 느낄 수 있는 슐츠의 그 아름다운 문장을 한국말로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기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기도 하다. 쁠라또노프가 쓴 구덩이』라는 소설 역시 정보라 씨가 번역한 작품인데 이 소설을 읽었을 때 과연 번역자가 계피색 가게들을 번역한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구덩이의 문장은 무미건조하고 투박했었다. 하지만 슬라브 문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소설 구덩이와 쁠라또노프에 대하여 문의했을 때 원문 자체가 원래 그렇게 투박하고 무미건조하단다. 번역에 있어서 원문의 느낌을 가능한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번역가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에 새삼 번역가 정보라의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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