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펜티에르: 씨앗으로 가는 여행(Viaje a la semilla)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지였다. 어느 시점에 벽돌과 나무가 공수되면서 집이 자라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범선이 나타나 대리석들을 내려놓았고 대리석들은 바닥과 분수대가 되었다. 장롱과 선반과 침대, 십자고상(十字苦像)과 탁자와 블라인드가 설치되더니 커다란 저택이 세워졌다.
그곳에서 카페야니아스 후작, 돈 마르시알이 태어났다. 난산(難産)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세상을 보기 직전에 죽음을 맞이했다. 처음엔 본능적인 욕구밖에 자각할 수 없었던 그는 소금물로 세례를 받고 난 후 손에 닿지 않는 물건을 집으려 했고 자기만의 언어로 말을 했다. 어느 날, 마르시알에게 개를 가리키자 마르시알은 “멍, 멍!” 이렇게 말했다. 그때부터 카넬로란 이름을 가진 그 개는 마르시알의 친구가 되었다. 마르시알은 카넬로와 함께 오줌을 누고 울부짖었으며 함께 흙을 먹고, 태양 아래서 뒹굴고, 물고기가 사는 분수대 물을 마시고, 그늘과 박하 향기를 찾아다녔다. 물건을 깨뜨리는 버릇이 생겼을 때 마르시알은 카넬로를 잊어버렸고 코끼리와 하마, 호랑이가 있는 왕국에서 왔다는 마부 멜초르와 놀기 시작했다. 멜초르는 말을 잘 다뤘고 벨벳 옷에 번쩍이는 박차를 차고 다녔다. 또한 배우기 쉬운 노래도 많이 알고 있었고 부엌에서 과자를 훔치기도 했고 문을 넘어 밤중에 도망치기도 했다. 돈 마르시알은 비 오는 날이면 큰 장화를 신는 멜초르가 부러웠다. 두 사람은 함께 집 안을 샅샅이 뒤졌고 창고 밑에 있는 네덜란드산 향수병들, 하녀 침실 위의 다락방에 먼지를 뒤집어쓴, 헤진 날개가 달린 열두 마리의 나비가 있다는 사실은 그들만의 비밀이었다.
좀 더 자라게 되자 돈 마르시알은 아버지란 존재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무섭고도 관대한 사람이었다. 항상 근엄한 태도로 교훈적인 얘기를 들려주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그 이유는 앞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훈장과 허리에 칼을 찬 제복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가끔은 청소하는 물라토 여자를 뒤에서 안고는 자신의 방에서 혼내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여자는 단추도 잠그지 못한 채 울면서 방에서 나왔다. 그 여자는 언제나 선반 위의 돈 항아리에 손을 댔기 때문에 마르시알은 통쾌하게 생각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버지는 병석에 누웠고 이제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병석의 아버지에게 다가가 손에 입을 맞추었다. 바닥 타일을 장기판 삼아 멜초르가 말이 되고 마르시알이 왕이 되어 밤늦게까지 체스 놀이를 하던 어느 날 밤, 소방차처럼 왱왱거리며 어떤 차가 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마르시알은 방에 갇혔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점심은 평소보다 풍성했다. 블라인드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구리 손잡이가 달린 상자를 들고 나왔다. 마르시알은 울고 싶었다.
마르시알은 바닥의 세계가 좋았다. 누우면 대리석 바닥은 시원했다. 그곳에선 아름다운 나뭇결, 벌레들이 다니는 길, 그늘진 구석 등 어른의 눈높이로는 볼 수 없는 방 구석구석을 다 볼 수 있었다. 비가 오면, 천둥이 울릴 때마다 갖가지 신비한 소리를 들려주는 클리비코드 밑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시알은 더 이상 대리석 장식고리가 달린 욕조에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수가 없었다. 가구가 줄어들고 식탁 위에 팔을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마르시알은 신비한 동화의 세계를 맞이했다. 그 세계에서는 축제 때 잡아먹는 어린양, 도자기로 된 비둘기, 하늘색 망토를 걸친 성녀, 금빛 색종이로 만든 별, 동방박사, 백조 날개를 단 천사, 당나귀 별, 황소자리, 무서운 성(聖) 디오니시오 등이 우글거렸으며 가끔은 마르시알의 꿈속에 나타나기도 했다.
신비한 그 세계를 졸업했을 때 마르시알은 학교에 입학했다. 마르시알은 점차적으로 사물을 본능적으로 지각하는 습관을 버리기 시작했다. 자연 교과서 삽화를 보고 사자, 타조, 고래, 재규어 같은 글자를 읽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뉴턴의 사과도 배웠고 프리즘의 원리도 배웠다. 또 깨알 같은 글씨로 우주에 관한 지루한 해석을 늘어놓은 책장 안쪽 귀퉁이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베이컨, 데카르트 같은 글자를 읽었다. 학교 수업에 만족했고 교과서 내용을 무턱대고 받아들였다. 라틴어 선생님의 설명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관념적인 세계에 점차 익숙하게 될 무렵 마르시알은 산 카를로스 학교를 졸업했다. 그즈음에, 마르시알 집안의 유언 집행인 돈 아분디오의 방문 역시 잦아졌다.
음악당에서는 대규모 가장무도회가 열렸다. 청년들은 커다란 팔찌를 찬 흑인 여자들이 과라차 춤을 추고 있는 교습소를 나왔다. 처녀들은 황혼을 등지고 있는 등대 쪽에서 왔다. 그들은 가장을 위해 다락방을 뒤졌다. 다락방에서 마르시알은 캄포플로리도에서 온 여자를 구슬려보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곳에는 장식용 칼, 망가진 갑옷, 교황의 망토, 빛바랜 연미복이 있었고 오래된 튜닉, 벨벳으로 만든 꽃, 붉은색 허리띠도 있었다. 캄포르로리도에서 온 처녀는 할머니가 사용했던 살색 숄을 둘렀고 어깨를 으쓱했다. 청년들은 가장을 하고 무도회장으로 돌아왔다. 청년들과 처녀들은 왈츠를 추었고 이윽고 술래놀이가 시작되었다. 마르시알은 캄포플로리도 여자와 함께 병풍 뒤에 숨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를 했고 그 보답으로 앞가슴의 체온이 묻어 있는, 향수를 뿌린 손수건을 받았다. 음악당에서의 그 무도회를 끝으로 마르시알은 이제 성년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비너스상은 이제 세레스 여신상으로 바뀌었고, 분수대의 괴인면 돋을새김은 조금씩 흐릿해져 갔다. 마르시알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한동안 메르세데스 집을 들락거렸고 반지에 문양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신부는 결혼식 예복을 벗고 도시를 떠났다. 신혼의 행복과 몇 번의 다툼과 불화, 맥 빠진 포옹, 그리고 권태… 오데콜롱 냄새와 안식향 목욕과 흐트러진 머리칼도 지겨웠고 또 장롱 속에서 침대 시트를 꺼낼 때 바닥에 떨어지는 나프탈렌도 조금 넌더리가 났다. 이제 그들은 커다란 마차를 타고 제당 공장에서 왔다. 어둠 속에서 마르시알은 혼자 이야기했다. 마침내 후작 부인은 등불을 켰다. 그들은 수줍어서 얼굴을 붉혔다. 마르지 않은 유화 냄새가 집 안에 가득 찼고 그들은 열정을 회복했다. 마르시알은 종종 부인을 껴안고 오후 내내 산책을 했다.
이제 담쟁이는 점점 위로 뻗어 올라갔고 벽의 균열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클리비코드는 피아노로 바뀌었고 야자수에는 마디가 생기기 시작했다. 커다란 살롱의 샹들리에는 불이 꺼졌고 수많은 친척들도, 친구들도 서서히 사라졌다. 우기가 시작되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침대 밑에서 비둘기와 씨암탉을 키우던 흑인 노파는 중얼거렸다. 강물은 믿을 것이 못돼, 흘러가는 청춘도 그렇고... 오월이 되자 저수지가 흘러 넘쳤다. 저녁 무렵에는 후작 부인 욕실에 물이 가득 담긴 물통이 깨졌다. 다음 날,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마차를 끄는 말은 오전 내내 마구간 판자에 연신 발길질을 해댔다. 오후에 마차를 타고 토란이 자라는 알멘다레스강으로 나갔던 후작 부인은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날, 돈 마르시알은 허리띠로 자기 몸을 내려쳐 피를 보고야 말았다. 그렇게 매질로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던 마르시알의 회한은 점차 엷어져 갔고 시간이 흘러 그는 새 여자를 맞이하기로 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이제 그는 서명이라는 덫에 걸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태에 처했다. 세상의 모든 서류가 그를 옥죄었으며 문서에 쓰인 글자들은 굴레가 되어 그를 묶어버렸다.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법망을 피할 수 없었고 파산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그의 재산은 경매로 넘어갔다. 사무실에서는 판사와 변호사, 서기가 집을 이전할 준비를 위해 대기하고 이었다. 사무실에서 돌아온 그는 화장대 앞에서 넥타이를 풀면서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침대로 갔을 때 관자놀이의 압박이 심해졌고 그는 스러지고 말았다. 아나스타시오 신부가 왔고 많은 것을 감춘 고해성사를 했다. 몇 시간을 자고 났을 때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점점 야자 무늬 창틀과 침대 머리맡 마리아상 은판 사진, 비단술 장식, 대들보가 흐릿해졌다. 돈 마르시알은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사람들이 왔고 수녀는 후작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촛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돈 마르시알은 눈을 감았다. 상(喪)이 치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돈 마르시알의 저택은 철거되기 시작했다.
이상이 카페야니아스 후작, 돈 마르시알의 일대기를 그린 단편 <씨앗으로 가는 여행>의 줄거리를 요약한 것이다. 요약된 줄거리는 너무나 평범하고 별로 흥미도 일으키지 못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줄거리를 거꾸로 풀어낸다면? ‘거꾸로’의 의미는 말 그대로 위에서 정리한 돈 마르시알의 연대기를 시간의 방향이 끝에서 처음으로 향하도록 되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영화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알레호 카르펜티에르”가 쓴 단편 <씨앗으로 가는 여행>은 위의 이야기를 거꾸로 풀어낸 소설이다. 영화의 경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예가 몇몇 있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설경구, 문소리 주연, 1999>의 경우 주인공 영호의 서글픈 삶을 네 개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나누어 현재에서 과거 순으로 배치한다. 하지만 배치만 시간 역순일 뿐이며 각 옴니버스 내의 이야기는 시간 순이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쳇 주연, 2008)>는 주인공 벤자민 버튼의 신체적 시간만이 거꾸로 흐른다. 즉, 늙은 할아버지로 태어나서 점점 젊어지고 종국에는 애기가 되어 삶을 마감하지만 신체적 시간 외의 나머지 시간은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다. 하지만 <씨앗으로 가는 여행>은 이야기의 서술 자체가 거꾸로 돌아가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즉, 위에 서술된 순차적 이야기 전체를 거꾸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주인공 돈 마르시알은 죽음에서 깨어나서 마지막에 그의 탄생으로 삶을 마감한다.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 글을 서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과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부터 먼저 든다. 그 이유는 표현의 기법 때문이기도 하다. 필름을 거꾸로 돌렸을 때는 모든 것이 거꾸로 움직일 것이다. 사람이나 차는 뒤로 가고 해는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지고 나무나 꽃은 줄어들고 오그라들 것이며 시계 역시 거꾸로 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거꾸로 돌아가는 필름이 상영되는 장면 장면들을 글로 표현하는 것, 그것도 말이 되게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란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씨앗으로 가는 여행>의 저자 알레호 카르펜티에르는 그런 영화적 상상력을 글로 표현해 낸다. 쿠바 출신의 카르펜티에르는 보르헤스와 함께 "마술적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동시에 라틴 아메리카의 붐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설 역시 그러한 마술적 사실주의를 마음껏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단편의 경우,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듯 서술한 다채로운 표현들은 자연스럽지만 매우 인상적이다. 여기서는 시간을 역행시키는 그 표현들을 중심으로 <씨앗으로 가는 여행>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소설은 마르시알의 저택이 한창 철거 중인 장면에서 시작한다. 뽀얀 먼지를 날리며 인부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한다. 지붕에서 걷어낸 기왓장은 이미 화단에 쌓여 있고 허물어진 벽 사이로 실내가 훤이 들여다 보이고 천장이나 코니스에선 여러 장식물들이 뱀처럼 매달려 있다. 거리에서는 아득한 소음이 들려오고 위에서는 정으로 돌을 쪼는 망치 소리와 삐걱거리는 도르레 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분주하고 시끌한 장면을 뒤로하고 시간은 오후 다섯 시가 되어 황혼이 찾아오고 인부들은 다음 날 작업을 이어가기 위해 그날의 작업을 정리한다. 이때 한 흑인 노인이 흙벽돌 더미 위에서 지팡이를 휘두르며 이상한 몸짓을 했고 그때부터 시간은 역행을 시작하고 영화의 필름은 거꾸로 돌아간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대리석이 날아오르고 돌조각이 튀어 올라서 갈라진 벽 틈을 메운다. 분리된 문짝이 문틀에 끼워지고 나사못은 빠른 속도로 구멍을 파고들고 화단의 꽃이 고개를 쳐들며 기왓장을 들어 올리면 기왓장은 흙바람을 일으키며 지붕을 덮는다. 이윽고 헐린 집은 이전의 웅장한 외관을 되찾는다. 이제 노인은 현관문에 열쇠를 꽂고 창문을 연다.
저택 안에서는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고 노란 네 자루의 촛불은 메달을 가슴에 달고 누워 있는 마르시알을 비추고 있다. 이제 소설은 시간의 역행을 실제로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촛불이 타면서 촛농이 늘고 초의 길이가 점점 줄어드는 시간의 경과를 역으로 아주 인상 깊게 표현한다.
“촛농이 줄어들면서 양초가 점점 자라났다. 원래의 크기가 되었을 때 수녀는 촛불을 끄고 성냥갑을 치웠다. 심지는 탄 흔적을 지우고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문상객들이 찾아오는 장면 역시 텅 빈 집에서 나가더니 마차를 타고 한밤중에 떠나는 것으로 표현된다. 돈 마르시알의 임종의 순간 역시 반대로 표현되면서 마르시알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눈을 뜨게 된다. 이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마르시알의 여행은 죽음에서 깨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촛농이 줄어들면서 양초가 점점 자라나는’ 식으로 시간의 역행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여러 표현들이 나온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기 직전 마르시알의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과정은 “흐릿하고 아련하던 대들보가 분명하게 보이고, 약병, 비단술 장식, 침대 머리맡 성모 마리아상, 은판 사진, 야자 무늬 창틀이 또렷해”져 가는 반대의 과정으로 표현된다. “동틀 녘이었다. 방금 식당에 걸린 시계가 오후 여섯 시를 쳤다.”라는 표현은 황혼 무렵의 해가 지는 상황을 역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시간이 흐름에 따른 주변 환경의 변화를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는 영상을 눈에 떠올릴 수 있도록 “야자수는 마디가 없어졌다. 담쟁이는 코니스 아래로 내려갔다. 세레스 여신상의 귀는 하얗게 빛났고, 기둥은 이제 막 깎아놓은 듯했다.”라고 표현한다. 한편 어린 마르시알의 키가 점점 줄어드는 상황은 가구가 자라나서 마르시알이 식탁 위에 팔을 올려놓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장롱 위쪽 장식물은 점점 높아지도록 서술한다. 따라서 흉상은 길어지고 층계참 무어인 동상의 횃불은 더욱 늘어날 것이고 안락의자는 더 깊어졌으며, 흔들의자는 뒤로 더 기울어진다. 그리고 마르시알은 이제 대리석 장식고리가 달린 욕조에서도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수가 있게 된다. 이제 마르시알은 침대나 장롱이나 선반 밑의 일을 알게 될 정도로 작아진다.
이런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상적인 표현과 더불어 마르시알의 심리 변화 역시 거꾸로 흐른다. 미성년자가 되고 서명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면서 홀가분해진 마르시알의 심리 변화는 자신의 서명에 묶여 결국 집을 넘겨야만 할 지나간 미래라는, 미래를 경험한 뒤에 느끼게 되는 시간의 역설을 담고 있다. 졸업은 입학이 되고 라틴어 수업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베이컨,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점점 더 이해력을 잃어 간다. 마르시알은 차츰 그런 공부를 하지 않게 되면서 심적 부담도 줄어든다. 그리고 마르시알은 점차 이성적 사고를 버리고 사물을 본능적으로 자각하게 되면서 정신은 한결 가뿐해진다. 뉴턴의 사과는 그저 먹는 사과일 뿐이고 밝은 햇빛 아래에 항구의 요새가 그대로 보이는데 굳이 프리즘을 들이댈 이유도 없다. 마침내 초등학교를 입학하던 시점, 즉 그곳을 벗어났을 때에는 책이란 물건의 존재도 잊어버린 채 마르시알은 해시계는 요정나라에 있고, 환영과 유령은 동의이음이며 팔면체는 등에 침이 달린 갑충이 되는 동화의 신비한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더 어려지면서 마르시알은 바닥에 앉는 버릇이 생기고 마부 말초르와는 어른들이 알 수 없는 바닥의 세계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이제 시간은 더 역행해서, 기어 다니며 물건을 깨뜨리는 버릇이 생겼을 때 마르시알은 멜초르를 잊어버리고 개 카넬로와 일체가 된다. 그리고 마르시알은 자기만의 언어로 말하고 절대적인 자유를 얻게 되며 손에 닿지 않는 물건을 집으려 한다.
이제 아기가 된 마르시알은 빛도 포기하고 점점 본능적인 욕구만 자각하게 된다. 세례를 받기 전 상태로 돌아가면서 후각도, 청각도, 시각도 흐릿해지고 순전히 촉각에만 반응하는 신생아가 된 마르시알은 마침내 눈을 감고 뜨겁고 축축하고 어둠이 가득한 엄마의 자궁 속으로 파고든다. 난산으로 죽었던 엄마는 마르시알을 받아들이며 반대로 생명을 얻게 된다. 이제 시간은, 마지막 순간을 향해 치닫는다. 이때부터 시간의 역행은 그 속도가 갑자기 가속되어 압축되기 시작한다. 마치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 장면은 급속도로 빠르게 돌아간다.
“시간은 노름꾼이 카드를 나누어줄 때처럼 쉭쉭 소리를 냈다. 새는 깃털 바람을 일으키며 알로 되돌아갔다. 물고기는 연못 밑바닥에 비늘을 남기고 알이 되었다. 야자수는 땅 속으로 사라지면서 부채를 접듯 잎을 접었다. 줄기는 잎을 삼키고, 대지는 땅 위의 만물을 빨아들였다. 천둥은 복도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세무장갑에서는 털이 자랐다. 담요는 올이 풀어지고, 아득히 먼 곳에서 기르는 양털 망울이 되었다. 장롱과 선반과 침대와 십자고상(十字苦像)과 탁자와 블라인드는 아득한 근원을 찾아 밤중에 밀림으로 날아갔다. 못을 박아놓은 것은 모두 허물어졌다. 어디에 정박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느닷없이 범선이 나타나 바닥과 분수대에 사용된 대리석을 싣고 이탈리아로 급히 떠났다. 무기와 연장과 열쇠와 구리 냄비와 말 재갈이 녹아내려 큼직한 쇳물 강을 이루며 땅 속으로 흘러들었다.”
마치 블랙홀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빨아들이듯, 모든 것이 하나의 소실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씨앗으로의 여행, 모든 것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여행은 마침내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마저 집어삼키는 친부 살해를 범한 후에야, 모든 시작을 하나의 점으로 빨아들여 없애버린 후에야 마무리된다. 모든 것이 모습을 바꾸어 처음 상태로 되돌아갔고 벽돌은 흙이 되고, 집 대신 흙무더기를 남겨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대지일 뿐이다.
그리고 장면은 바뀌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정상의 시간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철거를 담당하던 공사장 인부들은 저택의 세레스 상이 사라졌다고 조합에 가서 항의를 하고는 알멘다레스 강가에서 쉬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 소문처럼 떠도는 돈 마르시알 저택의 비화를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 비화는 오월 어느 날 오후, 토란이 자라는 알멘다레스강에서 익사한 카페야니아스 후작 부인의 이야기였고 그제야 독자들은 “그날은 바로 후작 부인이 알멘다레스 강변에서 돌아온 날이었다”라는 표현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