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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ul 13. 2018

가상으로 이어지는 현실의 길목에서

꼬르따사르:맞물린 공원(Continuidad de los parques)

초보자의 삶, 스와보미르 므로제크, 유혜자 역, 하늘고래



   그는 며칠 전부터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급한 용무가 생겨 책을 덮었다가 열차 편으로 농장에 돌아온 다음에 다시 책을 펼쳤다. 차츰 줄거리와 인물 묘사에 흥미를 느꼈다. 그날 오후, 대리인에게 편지를 쓰고 관리인과 소작료 문제를 상의한 후, 책을 읽으려고 떡갈나무 공원이 보이는 조용한 서재로 들어갔다. 누군가 불쑥 들어와 독서를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문을 등지고, 아끼는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앉았다. 왼손으로 안락의자의 초록색 벨벳 천을 한두 차례 쓰다듬어보는 사이에 어느덧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등장인물의 이름과 이미지가 뇌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내 소설적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는 한 줄 한 줄 읽어감에 따라 주변 현실이 산산조각 나는 야릇한 희열을 맛보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은 벨벳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있고, 담배는 손 닿는 곳에 있으며, 커다란 창문 너머 떡갈나무 아래로 늦은 오후의 바람이 춤추고 있다는 사실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주인공들의 지저분한 갈등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여러 이미지가 한데 어울려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나고 있는 주인공들에게 다가감으로써 마침내 산속 오두막집에서 남녀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먼저 여자가 들어왔다. 조심하는 눈치였다. 이어 정부가 들어왔는데,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혀 생채기가 나 있었다. 놀랍게도 여자는 키스로 지혈을 했다. 그러나 사내는 애무를 뿌리쳤다. 이전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오솔길과 낙엽 속에서 열정적인 밀회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가슴에 품은 칼은 따뜻했고, 그 아래에서 움츠러든 자유가 박동하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시냇물처럼 숨 가쁜 대화가 몇 장이나 이어졌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이미 정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내의 행동을 말리려는 듯이 온몸을 더듬는 애무도 실은 결딴낼 사람의 생김새를 그리고 있었다. 알리바이, 우연, 실수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계산에 넣었다. 그 시간 이후, 매 순간은 치밀한 계획에 따라 흘러갈 터였다. 비정하게도 한번 더 계획을 검토하려는데 손으로 뺨을 쓰다듬는 바람에 중단됐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앞일에 골몰한 나머지 오두막집 앞에서 헤어질 때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자는 북쪽 오솔길로 가야만 했다. 반대편 오솔길로 가던 사내는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칼을 날리며 달려가는 여자가 보였다. 사내도 나무나 울타리 뒤에 몸을 숨기며 달려갔다. 연보라색 안개 같은 황혼 속에서 마침내 그 집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이 나타났다. 개가 짖으면 안된다. 짖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관리인은 집에 없을 것이다. 집에 없었다. 사내는 현관 계단을 올라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심장은 널뛰고 있어도 여자의 말이 귓전에 쟁쟁했다. 맨 처음이 청색 거실, 다음이 복도, 그리고 양탄자가 깔린 계단. 계단 위쪽에 문이 두 개 있다. 첫 번째 방에는 아무도 없다. 두 번째 방에도 사람이 안 보인다. 그런데 저 서재의 문, 움켜쥔 칼,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창, 등받이가 높은 초록색 벨벳 안락의자, 그 의자에 앉아 소설을 읽고 있는 사람의 머리.



   위 소설은 "훌리오 꼬르따사르"라는 아르헨티나 작가가 쓴 <맞물린 공원(Continuidad de los parques)>이라는 단편의 전문이다. <맞물린 공원>은 송병선 씨가 번역한 단편집 <탱고 – 라틴아메리카 환성 문학선, 문학과 지성사>에 <연속된 공원>이란 제목으로 처음 소개되었고 후에 박병규 씨가 꼬르따사르의 단편들을 모아 번역한 <드러누운 밤>이란 단편집에 지금의 제목으로 다시 소개되었다. 위의 전문은 처음엔 송병선 씨의 번역을 실었으나 후에 스페인어 원문을 직접 읽어본 결과(단편 자체가 굉장히 짧기 때문에 가능했다.) 후자의 번역이 나은 듯해서 박병규 씨의 번역판으로 다시 실었다. <맞물린 공원>은 남미 환상 문학의 전형을 매우 축약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보르헤스와 함께 남미 환상 문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꼬르따사르는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글쓰기를 통해 환상 문학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다. <맞물린 공원>에는 어떤 뒤틀림이 있다. 필자의 경우, 현실과 가상의 접점 혹은 통로를 가능케 하는 이런 뒤틀림의 문학을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브런치 글: 매트릭스와 이데아의 그림자들 참조)>를 통해서 처음 느꼈고 보르헤스의 소설에 미친 듯이 빠져들었던 경험이 있다. 꼬르따사르의 <맞물린 공원>은 <원형의 페허> 이상의 그런 뒤틀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필자에게  보르헤스와는 또 다른 형식의 뒤틀림과 그 희열을 맛보게 해 준 작품이었다. 이는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 이후로 더 이상의 반전 영화는 없을 거라 생각하던 차에 영화 <식스 센스>를 보고 난 후에 느끼게 되는 그런 전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A4 용지 한 페이지에 충분히 담을 수 있는 이 짧은 글을 통해서 긴박하고도 사실적으로, 하지만 극적인 반전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기실 남미 환상 문학이니 마술적 리얼리즘이니 하는 것들이 포스트모던이라는 바람과 맞물려, 포스트모던 철학을 타고 이 땅에 유행처럼 던져진 것이 사실이다. 필자의 경우만 하더라도 보르헤스를 처음 알게 된 계기가 철학자 푸코의 책을 통해서였다. 당시 굳어져 교조화되어버린 진보-좌파적 담론에 크나큰 파문을 일으키며 그들 스스로를 분열하게 만든 계기가 된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을 필두로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등 소위 포스트모던이니 해체주의니 하며 그렇게 파문을 일으켰던 그때의 철학들은 들불처럼 번졌다 지금은 잠잠해졌고, 우리나라 지성사의 토대를 반영하듯 하나의 유행처럼 그렇게 지나가 버린 것 같다. 남미 환상 문학 역시 이 땅에서의 포스트모던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포스트모던의 힘을 빌어 유행처럼 번진 듯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남미의 작가들은 보르헤스나 마르케스 정도(물론 잘 팔렸을 것이라라.)인 듯했고 꼬르따사르와 같은 다른 남미 작가의 글들은 구하기 매우 힘들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남미의 환상 문학이나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붐 소설과 그것에 반기를 든 포스트-붐 소설들, 그리고 다양한 남미 작가들의 단편들을 엮은 단편집들이 조금씩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지만 최근에는 또다시 보르헤스와 마르케스의 시대를 반복하는 듯 요사나 볼라뇨가 너무 잘 나간다. 한때는 번역서가 없어서 영문판을 구매하기도 했었지만 요즘 볼라뇨는 전집이 거의 번역된 듯하다. 물론 돈이 되기에 역시 유행처럼 몰아서 쏟아지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꼬르따사르의 단편은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당시, 송병선 씨가 번역한 <붐 그리고 포스트 붐, 예문>에 실린 <악마의 침>(1966년에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이 ‘블로우업’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된 소설이다.)과 지금 소개하는 <맞물린 공원>, 또 다른 경로를 통해서 <드러누운 밤>이라는 겨우 세 편의 단편만을 겨우 접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몇 년 전에 박병규 씨가 <드러누운 밤>이란 제목으로 꼬르따사르의 단편집을 번역, 발간했다. 하지만 여전히 꼬르따사르 작품에는 배가 고프다. 특히 꼬르따사르의 장편 소설 <팔방놀이>가 번역되길 바라고 있지만 쉽지는 않을 듯하다. 그래도 단편집 <드러누운 밤>이 번역되기 전에 봤던 이 세편의 단편만으로도 나로 하여금 꼬르따사르의 소설을 기대하게 만들기는 충분했으며, 그래서 꼬르따사르의 작품들이 더 많이 번역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다.


   앞서 언급한 대로 <맞물린 공원>에는 어떤 뒤틀림이 있다. 작품은 액자소설 형식으로 구성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우연히 읽게 된 삼류 치정 소설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업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읽기를 중단해야만 했고, 그 아쉬움에 당일 업무를 빠르게 마무리한 후 공원의 떡갈나무가 보이는 자신의 집 서재에 자리한 벨벳 의자에, 이번에는 더 이상의 방해를 거부하기라도 하듯 아예 서재의 문을 등지고 느긋하게 앉아 읽다 만 그 소설을 이어서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액자소설 형식 그대로, 하지만 전체가 아니라 주인공이 읽기를 재개한 부분부터의 내용이 소설 상에서 전개된다. 불륜 관계의 두 남녀, 산속 오두막집에서의 만남, 정부는 남편을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여자로부터 전해 들은 저택의 구조를 치밀하게 계산한다. 짧은 서술임에도 긴박함과 긴장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자의 말 그대로 그 시간엔 관리인도 없었고 개도 짖지 않았다. 저택의 내부 구조도 여인의 말 그대로였다. 한 손에 칼을 들고 서재로 들어서자 떡갈나무가 있는 공원이 보이는 창문 앞의 벨벳 의자에 느긋이 앉아 소설에 빠져 있는 주인공의 뒷머리가 보인다. 누군가 불쑥 들어와 독서를 방해할까 봐 일부러 문을 등지고 앉은 주인공의 글 읽기를 끝장 낼 그 누군가가 바로 주인공이 읽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맞물린 공원>은 소설 속의 소설과 원래 소설을 교묘하게 뒤틀어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고 있다. 이런 뒤틀림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성격을 띤다. 뒤틀림이 없는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경우를 수학적으로 표현한다면 "A OR ~A"가 되어야 한다. 이는 "A이거나 또는 A가 아니거나" 혹은 A를 존재로 본다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가 된다. 하지만 뒤틀림의 경우는 "A AND ~A"가 되며 이는 "A이고 동시에 A가 아닌" 혹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이 된다. 이런 경우를 흔히 역설, 모순, 패러독스라고 하며 이는 수학적으로도 아니면 우리 일상에서도 '있을 수 없는'을 의미한다. 이런 뒤틀림은 바로 패러독스를 의미하며 이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 위치할 것이다(물론, 패러독스를 통하여 수학이나 과학의 절대적 기반을 흔든 경우도 적지 않기에 굳이 문학이나 예술의 측면에만 한정 짓기도 쉽지는 않다.). <맞물린 공원>은 말 그대로 패러독스, 되먹임, 현실과 경계의 허물기, 가상과 실재의 공존을 그대로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다. 소설 속의 긴박한 장면이 현실과 그대로 이어져 소설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소설이 되는 역설적인 구성을 멋지게 보여 준다.


  사실, 현실과 가상을 극적으로 교차시키는 이런 식의 기법이 내게는 너무나 놀라울 따름이었다. 보르헤스는 <원형의 페허>에서 꿈을 통해 만들어낸 꿈의 자식을 위해 죽음을 택하지만 결국 자신 스스로도 누군가가 꾼 꿈의 자식이라는 반전을 보여준 바 있다. 여기서의 뒤틀림은 꿈과 현실의 뒤틀림이다. 그리고 그 뒤틀림은 기원의 추적을 '의미 없음'으로 만들어버리는, 예를 들어 영화 <인셉션>과 마찬가지로 꿈이 꿈의 기원이 되어 꿈의 무한을 되풀이해야 하는 그런 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맞물린 공원>은 픽션과 현실 사이의 뒤틀림을 통해 그 경계를 지워버리는 동시에 마주 보는 거울처럼 자기 증식하는 공간적 무한 피드백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픽션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소설의 전형은 아마도 우나무노가 쓴 소설 <안개, 조민현 옮김, 민음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보르헤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던 작품이기도 한 <안개>의 경우,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의 비극을 한탄하며 <안개>의 저자인 우나무노에게 상담을 요청하고 소설 상에서 주인공인 자신이 처한 비극을 따지며 심지어 저자를 협박하기도 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자신의 창조주인 소설의 저자와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는 구성(사실 그 서문부터가 놀랍다. 물론, 그 서문의 놀라움은 “안개”를 상당히 읽고 난 후에 알게 되겠지만…)을 통해서 픽션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안개>의 이런 형식은 후대의 여러 작가들을 통해서 채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맞물린 공원>의 경우, 안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식의 경계 허물기를 보여 준다. 그 형식은 앞서 언급한 대로 소설 속의 소설이 원래 소설과 연결되어 픽션과 현실을 꼬아버리는 절묘한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의 경우 <이어지는 공원>의 이런 뒤틀림의 구조를 시각화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해본 적이 있다. 우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이란 그림이었다. 그 이유는 <맞물린 공원>이 가상과 현실의 공존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액자소설 형식을 차용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마그리트 - 인간의 조건, 1933

   소설 속의 소설이 원소설과 연결되어 맞물리는 구조를 보여주는 것처럼 위의 그림 역시 그림 속의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이 원그림의 일부로 참여하여 원그림과 서로 맞물리면서 그림 자체의 풍경과 그림 속의 캔버스의 풍경의 경계, 즉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지우고 있기에 필자의 경우 마그리트의 이 그림을 통해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 그 뒤틀림의 시각화를 보았다(사실 마그리트의 경우에도 패러독스를 표현하는, 예를 들어 <빛의 제국>이나 <헤겔의 휴일>과 같은 그림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인간의 조건>에 대한 마그리트 자신의 설명은 지금 필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인식에 관한 것이다. 마그리트의 의도를 따라가다 보면 왜 푸코가 마그리트의 그림을 갖고 자신의 에피스테메 - 인식틀의 담론을 전개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그리트의 위의 작품은 <맞물린 공원>의 구조를 시각화한다는 측면에서는 몇 퍼센트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면 <맞물린 공원>의 뒤틀림을 더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다른 화가의 그림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처음부터 가상과 현실의 공존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한 화가인 M. C. 에셔의 판화 작품들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에셔의 너무나 유명한 작품인 <Drawing Hands>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놀라운 것이었다.

 

Drawing Hands, 1948

   자신을 그리는 손을 그린 그림, 상호 대칭적으로 서로를 그리는 그림, 자기완성적인 무한 피드백과 패러독스를 보여주는 이 그림을 통해서 수많은 철학적 담론들을 끌어낼 수 있다. 에셔의 경우, 놀라운 상상력을 통해서 이런 뒤틀림의 구조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비틀어 시각화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으며 비단 이런 뒤틀림과 패러독스를 보여주는 판화들뿐만 아니라 수학적 비율에 따른 확대 및 축소, 그리고 대칭과 반복을 통해서 마치 프랙털 이미지를 보여주듯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는, 무한을 유한의 캔버스에 가둬버리는 기이하고도 신비한 작품들 역시 적지 않게 남겼다. 이런 수많의 에셔의 작품들 중에서 <맞물린 공원>의 뒤틀림을 좀 더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에 주목하자면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 <Still Life and Street>다.


Still Life and Street, 1937

   이 그림에서도 액자소설의 형식을 떠올릴 수 있다. 건물 사이의 거리를 중심으로 하여 점점 줌 아웃하게 되면 이 거리는 책과 그릇, 재떨이가 놓여 있는 탁자 위의 세계가 되고 이는 <맞물린 공원>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처럼 세계 속의 또 다른 세계로 연결된다. 단검을 든 치정 소설의 주인공이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주인공을 만나는 것처럼 이 그림 역시 계속 줌 아웃하여 탁자를 벗어나서 집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역시 탁자 위의 거리가 나올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맞물린 공원>의 비틀기를 한눈에 시각화하는 데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비틀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한눈에 들어오도록, 현실과 가상의 접점을 독특하게 시각화한 작품이 에셔의 <Picture Gallery>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맞물린 공원>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된 에셔의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었다.


Picture Gallery, 1956

   소설 속의 주인공이 독자와 만나게 하는 구조를 그리다 보면 그 뒤틀림은 나선 구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림 내에서 그런 나선 구조를 이용한 뫼비우스의 뒤틀림이 함께 표현되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소설의 안과 밖, 즉 픽션과 현실을 동시에 공존시키는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런 뒤틀림의 지점이 바로 가상과 현실을 이어주는 길목이 될 것이다. 에셔의 <Pictuer Gallery>는 캔버스의 중심을 기준으로 갤러리 내에 전시된 액자 속의 거리 풍경을 비틀어 끄집어 냄으로써 그림 속의 가상의 거리가 실제 거리와 연결시키고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감상 중인 그림 속으로 집어넣어 버린다. 이 작품은 갤러리에 걸린 그림의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어버림으로써 그림과 현실, 가상과 현실을 공존시키고 있으며 동시에 "A AND ~A"를 그대로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공존의 양식이 <맞물린 공원>이 가지고 있는 경계 허물기의 구조를 한눈에 시각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예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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