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셀 공드리: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좋은 기억은 추억으로 영원히 남기를 바라겠지만 나쁜 기억은 망각이라는 심연에 가둬 지워버렸으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란 것이 취사선택의 영역이 아니라서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그것 때문에 눈물짓고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니체는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경구는 지금 소개할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에서도 나오는 말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미셸 공드리가 2004년에 만들었지만 2015년에 다시 개봉할 정도로 호평을 받은 멜로 영화다. 주인공인 케이트 윈슬렛이야 워낙 다양한 영화에 주연으로 자주 출연해서 당연히 그러려니 하겠지만 코믹 배우로 각인된 짐 캐리의 경우라면,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몇 안 되는 비코미디 영화 중 <트루먼 쇼>와 함께 가히 그의 인생작이라 할 수 있을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재개봉될 때 출시된 포스터의 카피는 "사랑은 그렇게 다시 기억된다"였고 최초 개봉 시에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요?", "기억은 지워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지울수록 특별해지는 사랑..." 등의 카피로 포스터를 장식했다. 영문 카피 역시 "당신의 마음속에서 한 사람을 지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사랑으로부터 그 사람을 지우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렇게 이 영화의 카피들은 모두 "기억"과 관련된다. 그 기억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이며 특히, 아픔으로 남아있는 그 사랑의 기억을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를 영화는 그리고 있다.
이른 겨울 아침,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조엘 배리쉬(짐 캐리 분), 이날 아침은 다른 여느 날의 아침과 다를 바 없다. 출근하려고 집을 나섰을 때 자신의 차는 옆이 일그러져 있다. 누군지 몰라도 주차하다 세게 긁어버린 듯하다. 화는 나지만 누군지 알 수 없기에 "고맙수!"라는 쪽지를 옆에 주차된 차 앞 유리창에 끼워둔 채 일그러진 차를 몰고 전철역으로 향한다. 회사로 가는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마침 건너편에 몬토크 행 열차가 들어온다. 갑자기 그는 달리기 시작했고 급하게 건너편으로 넘어가선 닫히는 몬토크 행 열차의 문을 간신히 비집고 올라탄다. 어떤 운명처럼 그는, 그날 회사 출근도 포기한 채 아무 이유도 없이 무작정 몬토크로 향했다.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대는 몬토크의 겨울 바다, 사람도 없는 황량한 해변가 모래사장 어디쯤인가엔 별장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2월의 몬토크 해변은 너무 춥다. 혼자서 바닷가를, 바닷가의 별장을 배회하다 보니 파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한 여자가 멀찍이 서 있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갔지만 어떤 인연인지는 몰라도 바닷가의 식당에서도, 귀로길의 전철역에서도 그녀와 마주친다. 전철을 탔을 때 기어이 그녀는 먼저 아는 체했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갖고 놀리지 말라고 했다. 우리도 익히 아는 그 노래, "넓고 넓은 바닷가의 오막살이 집한 채... (중략)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라는 미국 민요의 그 클레멘타인이다. 기차에서 내려 서로 헤어졌지만 걸어가는 클렘(클레멘타인)을 발견한 조엘은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동승을 제안한다. 도착해서는 술 한잔 하고 가라는 그녀의 초청에 그는 머뭇거리며 그녀의 집으로 들어간다. 술을 좋아하는 클렘은 성격이 외향적이고 적극적이며 충동적인 반면 조엘은 과묵하고 소심하며 내성적이다. 이런 상반된 둘의 성격은 이상하게 서로를 끌어당긴다. 계속 술을 마시며 자유분방하게 조잘대는 클렘, 조용히 미소만 지으며 이야기를 듣는 조엘. 일찍 출근해야 한다며 집을 나서는 조엘의 손에 반드시 전화를 달라며 클렘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준다. 집으로 돌아온 조엘은 의자에 앉아서 잠시 주저하다 전화번호를 누르기 시작한다. 너무나 기뻐하는 클렘, 만면에 미소를 띠며 행복해하는 조엘. 클렘은 다음날 밤에 빙판 위의 신혼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밤, 둘은 꽁꽁 언 찰스 호수 위에서 장난치며 서로 나란히 누웠다.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시시껄렁한 별자리 이이기를 하며 깔깔거렸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이제 연인 사이로 발전할 조짐이다.
찰스 호수에서 밤을 새우고 클렘을 집으로 바래다주는 조엘. 클렘의 집 앞에서 잠든 그녀를 깨웠을 때 그녀는 조엘의 집에 가고 싶다고 한다. 조엘은 흔쾌히 수락했고 클렘은 칫솔을 갖고 오겠다면 집으로 들어갔다. 차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누군가가 차창을 두드린다. 창문을 내렸을 때 처음 보는 젊은 친구가 말을 건다. 도와드려요? 무슨 말씀이신지... 어떻게 도와드려요? 아뇨.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조엘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여기서 뭐하세요? 젊은 친구의 질문.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군요, 이렇게 조엘이 대답하자 고맙다는 답변만 남긴 채 그 친구는 사라지고 화면이 페이드 아웃된다.
이렇게 대략 18분 정도의 긴 스토리가 전개되고 나서야 영화의 타이틀이 뜨고 주연 배우들과 감독의 이름이 화면 하단에 표시된다. 출연진들의 이름이 표시되는 동안 스크린에는 눈물을 머금은 채 괴로워하며 불안하게 운전대를 잡고 있는 조엘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집으로 향하는 조엘, 그리고 벤을 타고 그를 뒤따르는 두 명의 남자... 아파트 현관 우편함에서 우편물을 챙기고 있을 때 클렘을 위한 발렌타인데이 선물은 준비했냐면서 이웃집 남자가 아는 체한다. '라큐나 주식회사'라는 발신처가 찍힌 옆집 남자의 우편물이 조엘의 눈에 들어온다. 저녁 8시 15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며 인사를 고하는 조엘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옆집 남자를 뒤로 하고 조엘은 집으로 와서 잠옷을 갈아입고 처방된 알약을 먹고 불을 껐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집 내부를 살피다 스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곧이어 벤을 탄 두 남자가 이상한 장치들을 들고 조엘의 집으로 들이닥친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두 겹으로 겹쳐 흐른다.
친구 부부인 롭과 캐리네 집에서 조엘은 클렘이 변했다며 울분을 토로한다. 발렌타인데이 선물로 고심하고 고심해서 고른 앤티크한 목걸이를 들고 클렘이 일하는 서점으로 갔지만 그녀는 전혀 자신을 모르는 사람 취급하면서 다른 남자와 연인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계속 괴로워하던 조엘을 달래던 친구는 와이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엘에게 쪽지를 하나 건넨다. 그 쪽지에는 "이킨 부처에게, 클레멘타인 크루친스키는 조엘 배리쉬에 관한 기억을 제거했습니다. 그녀에게 둘의 관계를 언급하지 마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그 쪽지는 라큐나 주식회사 명의로 되어 있었고 그 회사는 고객이 원하는 특정 기억을 지워주는 업체였다. 그제야 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클렘이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지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스스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회사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믿긴 어려웠지만... 그는 그 회사로 직접 찾아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메리 스베보(커스틴 던스트 분)라는 여자가 상담 접수를 담당하고 있었다. 메리의 안내로 담당 박사인 하워드 미워즈위크(톰 윌킨스 분)를 만났다. 그 결과 클렘이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사실에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 조엘 역시 클렘과 관련된 기억 삭제를 하워드 박사에게 의뢰하게 된다.
기억 삭제 절차는 먼저 클렘과 관계된 모든 기억을 모으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녀와 관계된 물건이라면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모두 모아서 가져오라고 회사는 요구했다. 그리고 그녀와의 기억을 처음부터 회상해야 했고 하워드 박사는 그것을 모두 녹음했다. 클렘과의 첫 만남은 롭과 캐리 부부와 함께 갔던 몬토크 해변에서였다. 다른 여자 친구와 사귀다 헤어지고 마지못해 그들과 여행을 갔던 그는 몬토크 해변에서 녹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클렘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렇게 만난 둘은 사랑에 빠졌고 동거에 들어갔다. 조엘과의 열정적이고 충만한 관계를 반영하듯 클렘은 머리를 붉은색으로 물들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오렌지 색으로 바꿨다. 오렌지 색 머리에 조엘은 그녀를 "나의 탠저린(tangerine, 귤)"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조엘과 외향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인 클렘은 사사건건 부딪히게 되면서 성격 차이로 인한 다툼이라는 남녀 사이의 전형적인 과정을 답습한다. 역시 그날도 다투고 나간 클렘은 밤늦게 만취한 상태로 조엘의 차를 몰고 집으로 왔다. 이 일로 다시 말싸움이 붙었고 조엘은 하지 말았어야 할 심한 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클렘은 정색하며 밖으로 나가버렸고 조엘이 따라나갔다. 클렘의 음주 운전으로 인해 옆쪽이 심하게 긁여 있는 자신의 차를 몰고 그녀를 따라갔다. 클렘에게 사과하고 그녀를 달랬지만 클렘은 요지부동으로 자신의 길만 걸어갈 뿐이다. 그때 거리에 늘어 선 가게의 간판들이 하나둘씩 지워지면서 거리는 무너져 내리더니, 어디선가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엘은 깨달았다, 자신은 꿈속에 있으며 현재 상황은 자신의 요청으로 라큐나 직원들이 클렘과의 기억을 제거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전개되는 두 겹의 이야기는 바로 조엘의 기억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인 현실과 제거 중인 클렘과의 기억들이 펼쳐지는 조엘의 꿈이다. 조엘은 그날 집에서 기억 제거기를 머리에 쓰고 잠들어 있고 라큐나 직원 스탠(마크 러팔로 분)과 패트릭(일라이저 우드 분)이 복잡한 장치를 연결하고 기억 제거 작업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클렘이 자신의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 역시 홧김에 라큐나를 찾아가선 기억 제거를 신청하고 그녀와 연관된 물건을 모으고 그녀와의 처음 만남부터의 기억을 반복하면서 기억 제거 작업에 동참하는 과정을 꿈속에서 다시 보게 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반가사 상태에서 깨어나지는 못한 채로 클렘과 관련된 꿈은 계속 꾸지만 작업 중인 스탠과 패트릭의 사적 대화까지도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화는 가관이다. 패트릭은 스탠에게 최근에 새로 사귄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한다. 그 여자는 바로 클렘이었다. 클렘의 기억을 지워주면서 그는 그녀에게 반했고 그날 그녀의 팬티를 훔쳤다고 했다. 직업적 윤리를 따지는 스탠에게 패트릭은 '뭐 어때?'라고 반문한다. 패트릭은 한발 더 나아가서 조엘이 모아 온 클렘과의 수많은 기억의 잔재들을 자신의 가방에 모두 보관하고는 그 기록들을 통해서 조엘이 클렘에게 했던, 그리고 클렘이 감동했던 달콤한 말들을 적시적소에 속삭여 그녀의 호감을 사게 된다. 조엘의 기억을 지우던 그날 밤, 역시나 항상 충동적인 클렘은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혀 울며 불며 패트릭에게 전화를 했고 패트릭은 그녀를 "나의 탠저린"이라 부르며 그녀를 달랬다. 이 모든 대화가 꿈을 꾸는 조엘에게 생생하게 들렸다. 자신의 기억을 훔쳐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여자 친구를 낚아챘다는 사실과 클렘이 자신과 관계된 기억을 지운 행동이 그가 그녀에게 했던 심한 말이 계기가 된, 역시 그녀 다운 충동적 행동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조엘은 기억 제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기억을 지우려는 자들과 기억을 지켜려는 자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현실과 꿈속에서 치열하게 전개된다.
꿈속에서 조엘은 클렘과의 다정했던 순간순간들을 다시 경험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꿈은 무너지고 기억의 장면들은 백지가 된다. 조엘은 클렘에게 기억이 지워지고 있음을 고백했고 클렘을 데리고 계속 다른 기억 속으로 도망가지만 추적자들은 집요하다. 이에 클렘은 자신과 연관된 기억이 아닌 순수한 조엘만의 기억으로 도망가지고 제안한다. 조엘은 클렘과 함께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도망갔다. 한편, 스탠의 작업을 보조하던 패트릭은 계속 힘겨워하는 클렘을 달래기 위해 그녀에게로 가겠다고 한다. 마침 메리가 작업하는 걸 직접 보고 싶다고 찾아왔기에 스탠은 흔쾌히 허락한다. 패트릭이 떠나자 스탠과 메리는 자동 추적 기능을 걸어두고 함께 술을 마시며 사랑놀이에 빠진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조엘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도 그들을 찾을 수가 없자 어쩔 수 없이 자고 있는 하워드 박사를 깨운다. 부인과 함께 자고 있던 하워드는 전화를 받고 출발했고 박사의 부인은 급하게 나서는 그를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본다. 조엘의 집에 도착한 하워드는 곧바로 노트북을 장치에 연결하여 추적에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엘과 클렘이 숨은 곳을 찾아냈다. 기억 제거 작업을 재개했을 때 조엘이 갑자기 눈을 떴고 하워드는 더 강한 수면제를 주사한다. 상황은 진정되었고 조엘은 이제 제거 대상이 되는 클렘과의 달콤한 기억 속에 다시 위치해 있다. 조엘은 기억 제거를 막기 위해 꿈속에서 클렘을 데리고 기억 속의 하워드 박사를 찾아가지만 그들의 얼굴은 이미 뭉개져 있다. 이때 클렘이 기발한 방법을 제안한다. 남들에게 털어놓지 못할 조엘만의 은밀한 기억, 예를 들어 수치스러운 기억 속으로 도망가는 것이다. 곧장 꿈속의 기억은 바뀌어 조엘은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자위를 하고 있다. 방문이 열렸고 엄마가 당황스러운 얼굴로 다급하게 문을 닫아 버린다. 바로 옆에 함께 누워서 부끄러워하는 조엘을 보며 깔깔거리는 클렘.
현실에서는 상황을 안정시켰다고 생각한 하워드가 자리를 뜨려고 하는 순간 스탠은 또 조엘을 놓쳐 버렸고 박사는 다시 자리에 앉는다.
자위로 인한 수치스러움에 고개를 베개에 파묻고 옆에서는 클렘이 깔깔거리던 순간, 둘이 함께 있던 침대는 순식간에 조엘의 방이 아니라 몬토크의 눈 내린 해변가에 위치해 있다.
하워드의 추적으로 다시 기억이 무너져 내리고 둘은 진짜로 꽁꽁 숨겨둔 조엘의 기억 속으로 숨기로 했다. 그 기억은 유년 시절의 서글픈 기억이다. 동네 아이들이 조엘을 둘러싸고 뭐라고 외치고 있고 조엘은 망치를 들고 뭔가를 내려칠까 망설이고 있다. 대상은 죽은 새였고 애들의 외침에 조엘은 새를 망치로 내려쳐 묵사발로 만들고 있다. 놀리는 아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클렘은 조엘을 끌고 나온다. 남자아이들이 둘이 사귄다고 계속 놀려대고 조엘은 아니라고 반항하지만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클렘은 묵묵히 조엘의 손을 잡고 그 무리들 속에서 그를 달래면서 데리고 나왔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그런 부끄러운 기억... 하지만 그때 그의 손을 잡아끌며 위로했던 여자 아이가 클렘이었다. 그렇게 둘은 어린 시절을 함께 했었고 그 기억은 클렘과의 기억이었기에 박사에게 추적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기억은 무너져 내린다. 자신의 아파트 방 침대 위에서 함께 뒹굴며 장난치던 기억 속에서 클렘은 사라졌고 이번에는 눈 덮인 몬토크 해변가에서 뛰어놀던 기억 속의 클렘 역시 사라져 간다.
한편 재추적에 성공한 하워드의 일하는 모습을 사랑과 존경이 담긴 눈길로 쳐다보던 메리... 그녀는 명언 인용집에서 읽었던 명언들을 이야기한다. 니체의 "망각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와 이 영화의 완전한 제목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라는 시구를 담고 있는 알렉산드 포프의 시를 인용하며 하워드의 말들도 그런 인용집에 실릴 것이고 그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하워드 곁으로 와서는 그에게 키스를 했다.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고 그 때문에 출근 시간이 기다려졌다고 고백하는 메리에게 하워드는 자신은 가정이 있다고 둘러댔지만 곧 둘의 입술은 재회한다.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서 그 장면을 조용히 바라보던 스탠, 갑자기 차 한 대가 급하게 멈춰 섰고 하워드의 아내가 내린다. 스탠은 재빨리 클랙션을 울려 경고를 했지만 이미 하워드 부인은 그 장면을 목격한 뒤였다. 급히 뛰쳐나온 하워드는 오해라고 극구 변명했고 메리는 자신이 먼저 유혹했다고 강하게 그를 변호했다. 부인은 기가 찬다는 듯 한 숨을 쉬고는 메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이 말 한마디만 남기고 떠나 버렸다.
"불쌍한 아가씨... 아가씨 마음대로 해. 전에도 그랬잖아!"
메리는 이전에 이미 박사와 불륜 관계였고 가정을 지키고자 했던 박사를 위해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메리는 사무실로 가서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찾았고 박사의 서랍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자료첩과 테이프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테이프에서는 괴로워하며 박사와의 기억을 회상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편 클렘의 집으로 간 패트릭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울면서 클렘은 갑자기 그 야심한 시각에 꽁꽁 언 찰스 호수를 보고 싶다며 보스턴으로 가자고 한다, 그것도 지금 당장! 패트릭은 급히 가방을 뒤져 찰스 호수에서의 조엘의 기억을 찾는다. 찰스 호수 빙판 위에 나란히 누워있는 조엘과 클렘의 그림이 그려진 종이 위에는 환희에 찬 조엘의 글도 함께 적혀 있다.
"봐! 찰스 호수에 있던 우리의 모습이야... 지금 죽어도 좋아, 클렘. 행복해, 이런 느낌 처음이야. 비로소 내 자리를 찾았어."
패트릭은 한술 더 떠서 조엘이 클렘을 위해 발렌타인데이 선물로 준비했던, 미처 전하지 못했던 앤티크 목걸이를 자신이 준비한 선물이라며 그녀에게 건넨다. 자신의 취향을 아는 남자 친구와의 데이트가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클렘의 미소 띤 표정은 언뜻 굳어버린 듯하기도 했다. 꽁꽁 언 찰스 호수 위에서 클렘과 나란히 누운 패트릭은 종이에 적힌 조엘의 그 말을 그대로 반복한다. 그 말을 들은 클렘은 갑자기 변덕을 부려 집에 가겠다며 일어선다.
박사의 기억 제거 작업은 계속되었고 이제 조엘의 마지막 기억, 클렘과의 첫 만남의 기억만 남아 있다. 조엘은 사람들이 붐비는 몬토크 바닷가에서 초록색 머리에 오렌지색 스웨터를 입고 홀로 서 있던 클렘의 뒷모습을 보았고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홀로 해변가 계단에 앉아있던 조엘 옆으로 클렘이 왔고 허락도 없이 조엘이 먹고 있던 닭다리를 하나 집어 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지금은 조금씩 지워져 간다. 그들에겐 이제 마지막 기억, 몬토크 해변가의 별장에 무단 칩입했던 기억만이 남았다. 충동적인 클렘은 춥다면서 별장 창문을 따고 들어가서 술을 찾았고 소심한 조엘은 나가자고 보챈다. 클렘의 막무가내 행동에 조엘은 밖으로 나갔고 그때 별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둘 사이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둘은 이미 알고 있다. 기차를 타야 한다며 별장을 떠나려는 조엘에게 클렘이 말한다,
- 당신은 가지 말았어야 했어!
늦었지만 조엘은 그제야 고백한다.
- 나도 그러고 싶었어, 지금도 그러고 싶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는데... 나도, 정말, 정말 머물고 싶었어...
- 그런데 왜? 클렘이 반문했다.
- 몰라, 애들처럼 겁을 먹었었나봐, 생각이 안 나네, 모르겠어.
- 겁이 났어?
- 당신도 눈치를 챘을 거라 믿었지.
- 내가 뭐라고 했어?
- "그럼, 가요"라고... 깔보는 투였어, 알아?
- 미안해.
- 괜찮아.
이제 별장은, 기억은 거의 다 무너져 내렸다. 조엘은 밖으로 나와서 뛰어가고 무너지는 별장의 계단에서 클렘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한다.
- 이번엔 그냥 있지 그래? 적어도 작별인사는 해야지, 기억에 있는 척하는 거야...
조엘이 돌아서서 다가온다. 클렘도 계단에서 내려온다. 무너져내리는 별장 앞에서 둘은 마주했고 클렘이 말한다.
- 잘 가, 조엘...
조엘이 대답한다,
- 사랑해...
클렘이 키스를 하며 조엘에게 나지막이 속삭인다,
- 몬토크에서 만나...
그렇게 모든 기억은 완전히 제거되었고 하워드는 노트북을 닫고 하품을 한다. 스탠은 기억 제거기를 조엘의 머리에서 떼어내고 철수를 위해 장비를 챙기기 시작한다. 날은 이미 밝았다. 스탠이 벤을 사무실에 갖다 놓겠다며 하워드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조엘은 침대에서 눈을 떴고 여느 때처럼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고 자신의 차 문짝이 심하게 긁힌 것을 보았고 뜬금없는 쪽지를 옆 차에 남겼고 전철역으로 갔고 건너편에서 들어오는 몬토크행 기차를 보고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고 가까스로 그 기차에 올랐다.
스탠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메리는 자신의 짐을 챙겨서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스탠이 메리에게 다가갔다. 메리는 그가 자신의 기억 제거에 참여했는지 물었고 스탠은 아니라고 답했다. 이번에는 하워드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었는지 물었고 그는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스탠이 고백했다, 네가 정말 좋아, 메리 스베보, 알고 있니? 메리의 짐을 건네주고는 그는 조용히 돌아섰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메리는 트렁크에 짐을 쑤셔 넣고 차에 올랐다. 테이프와 문서가 가득 담긴 상자들이 빼곡히 메리의 차 뒷좌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이야기는 영화의 타이틀이 표시되기 직전의 상황으로 되돌아온다. 클렘을 기다릴 때 뜬금없이 차창을 두드리곤 도와드려요?라고 했던 그 젊은 친구는 바로 패트릭이었다. 클렘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집으로 찾아온 참이었다. 클렘은 집에서 재빨리 양치질을 하며 전화기의 음성 녹음 메시지를 듣는다. 패트릭의 애걸복걸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클렘은 가볍게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는 우편물들을 챙겨서 급하게 집을 나선다. 조엘이 기다리는 차에 올라탔고 활기차게 스페인어로 말한다, 출발하시죠, 선생! 차가 출발했고 조엘은 지난밤 찰스 호수에서의 그 밤이 너무나 근사했다고 말했다. 클렘은 우편물을 확인하는데... 우편물에는 이상한 글이 적혀 있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워드 미워즈위크 박사의 환자들에게... 제 이름은 메리 스베보입니다. 우린 만난 적 있지만 기억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기억 제거를 의뢰한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이건 너무 끔찍한 일이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여러분의 파일을 돌려드립니다."
그리고 우편봉투에는 테이프 하나가 들어 있었다. 클렘은 차 카세트 데크에 테이프를 꽂았다. 곧바로 클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 제거를 시행하기 전 마지막 녹음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 내용은 조엘과의 끔찍했던 만남을 잊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흘러나오는 테이프의 내용에 표정이 일그러지는 조엘, 이럴 수가 없다며 당황해하는 클렘. 테이프에선 조엘에 대한 클렘의 비난이 점점 더 심해진다. 더 이상 듣지 못하고 기어이 조엘은 차에서 내릴 것을 요구한다.
차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온 클렘은 집 앞에서 구질하게 매달리는 패트릭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방으로 와서 울기 시작한다. 클렘은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조엘과의 과거와 그 기억을 지우고자 하는 자신의 목소리라니... 결심한 듯 무작정 차를 몰고 조엘의 집으로 향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때 집안 전체에서 퍼지고 있는, 이번엔 반대로 그녀와의 기억을 지우고 싶다는 내용이 녹음된 조엘의 목소리. 방으로 갔을 때 방 한켠에 넋을 놓고 멍하니 앉아만 있는 조엘을 발견한다. 조엘이 자신이 그렸던 클렘의 그림을 가만히 보여 준다. 얼굴만 제대로 그렸고 몸은 해골로 묘사된 그녀. 흘러나오는 소리는 온통 클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리뿐이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끄려 했지만 클렘은 계속 듣자고 한다. 점점 더 심한 소리가 나오고 더 이상 듣지 못하고 클렘은 방을 나와 버린다.
아파트 복도를 걸어 나올 때 뒤에서 조엘이 뛰쳐나와 그녀를 부른다.
- 기다려요!
- 왜요?
- 모르겠어요...
- 왜 그래요, 조엘?
- 좌우지간 기다려요! 몰라요... 잠시만 기다려줘요, 제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서로 멍한 표정으로 바라만 본다. 조엘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가 대답한다.
- 좋아요!
- 정말요?
- 난 개념 없는 여자예요.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천방지축이죠. 난 완벽하지 않아요.
- 내겐 당신의 결점이 안 보여요.
- 언젠간 보이겠죠...
- 지금은 그래요.
- 당신도 언젠간 알게 되고 나도 당신이 지겨워지고... 역시 그렇구나~ 이를 갈겠죠...
조엘은 어깨를 추켜 올린다.
- 좋아요.
클렘이 답한다.
- 좋아요.
조엘은 미소 짓고 클렘은 웃으며 눈물을 흘린다.
- 좋아요.
- 좋아요.
둘은 서로 마주 보며 웃는다. 온통 하얀색으로 덧칠된, 눈 덮인 몬토크 해변가에서 서로 장난치며 뛰어노는 조엘과 클렘을 담은 아름다운 화면을 끝으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영화 제목 <이터널 선샤인>의 원제는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로서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알렉산드 포프의 시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Eloisa to Abelard)>의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메리가 읊었던 시는 다음과 같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ed
순결한 처녀인들 과연 행복할까?
잊힌 세상에 의해 세상은 잊힌다.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이여.
어느 이뤄진 기도와 무산된 소망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에는 지금은 유명하지만 당시엔 몰라봤었던 반가운 얼굴들도 눈에 띄었다. 어벤저스의 헐크 '마크 러팔로'와 토비 맥과이어가 주연한 스파이더맨의 그녀 '커스틴 던스트', 그리고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 난쟁이 '일라이저 우드'의 파릇파릇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반갑기도 했다. 또한 이 영화가 제작된 시기가 2000년대 초반이었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는 <터미네이터 2>나 <매트릭스>와 같이 컴퓨터 그래픽의 개가를 이룬 작품들이 이미 나왔던 터라 기억 제거 장치나 제거를 위한 추적 과정을 화려한 그래픽으로 처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장치들이나 추적 과정은 매우 고풍스럽고 투박하게 표현되어 아날로그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이는 디지털적인 화려함에 관객들이 매몰되는 것을 막는 동시에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제에 대해 좀 더 천착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의도가 맞다는 가정 하에서 이 글에서는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기억과 망각의 문제를 중심으로 두서없는 이야기를 풀어갈 것이다.
이 영화는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기억의 문제는 SF물의 주된 소재가 된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안드로이드에게 가짜 기억을 심어주기도 하고 <다크 시티>에서는 외계인이 필요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매번 만들어진 새로운 기억을 심어줌으로써 매일매일 사람들을 전혀 다른 삶을 살도록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기억은 새롭게 증여된 가상의 기억이다. 그것은 기억의 덮어쓰기이자 기억의 첨언이다. 반대로 <이터널 선샤인>은 원래 있던 기억의 소멸이다. 그것도 취사선택을 통한 특정 부분의 기억에 대한 인위적인 제거로서의 소멸이다. 이런 식의 기억의 소멸이라면, 니체의 말대로 이것은 축복이지 않을까? 보르헤스는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지나간 자신의 모든 순간을 무한소 차원까지 그대로 기억하는 기억의 천재를 다룬 바가 있다. 그렇다면 푸네스가 어쩌다가 기억을 상기시켜야 할 때는 과거에 그가 경험했던 매 순간순간만큼의 시간을 소비해야만 기억을 재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푸네스 식의 기억이라면 망각이 없는 기억은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을 듯하다.
<이터널 선샤인>은 망각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을 수 없는 사랑의 기억을 마치 운명처럼 이야기한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의 문제를 시간과 동치시키면서 단절이 아닌 연속으로서의 기억을 주창했고 공간화된 과학적 시간을 거부하며 그 증거로서 기억을 내세운다. 그리고 기억을 근대의 인위적 인식론이 아니라 결코 분할할 수 없는 직관의 차원에서의 인식으로, 무의식의 층위로 새롭게 위치시켰다. 이렇게 베르그송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기억은 인위적으로 지울 수 있는 차원의 소재는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베르그송이 재림해서 <이터널 선샤인>을 본다면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이터널 선샤인> 식의 이런 기억의 제거는 시간의 단절을 전제하는 환상에 지나지 않기에...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의 무한한 저장소에 점층적으로 쌓여 우리 인식의 기반을 이룬다. 하지만 그 기억은 우리가 원한다고 맘대로 꺼내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닌, 지질학적 퇴적층처럼 어쩌다 운 좋게 발견되는 그런 흔적으로서의 기억이며 그렇기에 결코 지워질 수 없는 무한한 퇴적물로서의 기억이다.
어쩌면 비슷할 수도 있겠다. <이터널 선샤인>은 망각을 이야기하면서도 결코 지울 수 없는 어떤 기억을 아스라이 부여잡고 있다. 그것은 사랑의 기억이다. 망각에도 불구하고 마치 퇴적층의 특정 단층처럼 발견되기를, 우연으로라도 다시 이어야만 할 필연으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수많은 사연으로 점철되어 어떻게든 만나야 함에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이별도 있다. 그런 이별이라면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이렇게 문득 그대 보고 싶을 때 우리 사이 너무 멀어요"라는 조하문의 노랫말처럼 만날 수 있고 만나야만 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 관객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드는 안타까움을 자아낼 것이다. 그런 안타까움은 비단 남녀 간의 사랑에만 국한될 것도 아니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라면, 남북 이산가족의 비극에서 그 안타까움의 서정은 더욱더 도드라질 것이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런 안타까움의 기억마저 제거해 버린다면... 제삼자인 관객의 안타까움은 극도에 다다르지 않을까? 그래서 영화로라도 그 안타까움을 이어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그런 안타까운 이별을 적지 않게 작품화했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마침내 영화 <너의 이름은>을 통해서 처절한 그 안타까움을 극복해 버렸다. 기억에선 지워졌지만 운명의 실을 통해서 아스라하게 그 연을 이어 주었을 때 관객들은 환호했다.
어쩌면 <이터널 선샤인>의 미셀 공드리도 그런 관객들의 환호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공드리의 원래 각본에는 나이를 지긋이 먹은 뒤의 클렘이 조엘과의 기억의 잔재들을 비닐봉지에 담고 또다시 '라큐나 주식회사'를 찾는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관객들의 환호를 위해서 공드리 스스로 그 장면을 지웠을지도 모르겠다. 영문판 대본에는 클렘 이전의 여자 친구 나오미와 조엘 사이의 심각한 대화도 있었고 나오미와의 원나잇 스탠딩 장면도 찍었지만 영화에서는 사라지고 없다. 어쩌면 공드리는 사랑은 그렇게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라는 일상의 평범한 진리를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관객들의 바람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런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의 제거가 아니라 대본의 제거... 어찌 보자면 베르그송의 기억론과 일맥상통할 수도 있겠다. <이터널 선샤인>에서의 기억의 제거는 기억의 소멸이 아니라 그 기억을 무의식의 심연 속에 더 깊이 감춰 드러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제거된 기억은 소멸이 아니라 망각이라는 두터운 덮개 아래에 숨겨진 기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라큐나 주식회사'에 의해서 깊숙이 숨겨져 드러나선 안될 기억이 어떤 우연을 통해서 다시 반복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