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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un 16. 2018

하나의 사건, 여러 개의 이야기들

차페크:  유성(Povětroň)

유성(카렐 차폐크 지음, 김규진 옮김, 리브로)





당신은 외국 도시의 거리를 거니는 미지의 사람입니다. 
불시착자인 당신은 거리의 풍경을 다만 꿈속처럼 느끼고 이해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당신은 그냥 한 인간일 뿐이고, 
오직 주체이며 내적 자아일 뿐입니다. 
눈과 심장일 뿐이고, 놀라움일 뿐이고, 기쁨 없는 체념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잃는 것보다 더 서정적인 것은 없습니다. 
- 카렐 차페크, 유성, p177 -


   영화의 거장, 구로자와 아키라(黒澤明) 감독이 만든 라쇼몽(羅生門, 1950)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지러운 시절이었던 헤이안(平安시대, 라생문이라 불리는, 다 쓰러져가는 문 아래에 나무꾼과 스님 둘이 앉아서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어…”라는 말만 되뇌고 있다.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 소릴 듣고 무슨 연유인지를 묻자 나무꾼과 스님은 자신들이 목격했거나 증언했던 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나무꾼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가다 칼에 꽂혀 죽어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관가에 신고를 했다. 범인으로 지목된 산적은 곧 포획되어 관가로 이송되고 수령의 주관 아래 그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이 전개된다. 산적이 지나가던 부부를 만나서 부인을 겁탈하고 남편을 죽였다는, 별로 복잡하지 않을 듯한 진술인데… 문제는 명백해야 할 이야기가 진술하는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놓고 그것을 이야기하거나 증언하는 사람들의 진술, 즉 범인인 산적의 진술, 현장의 직접 피해자인 아내의 진술, 무당에 의해 혼령으로 소환되어 증언하게 된 피살자 남편의 진술, 그리고 현장에 숨어서 모든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는 그 나무꾼의 진술… 모두의 진술이 다 다르다. 이렇게 이미 일어난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목격했다거나 아니면 직접 그 사건의 구성원이었던 사람들의 진술들이 다 다르다면,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하나의 사건과 여러 가지 진술들…



   이상이 영화 라쇼몽에 대한 간단한 소개다. 라쇼몽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소설이 있었으니, 이제부터 이야기하고자 하는 “유성(카렐 차폐크 지음, 김규진 옮김, 리브로)”이란 작품이다. 체코의 국민작가로 알려져 있는 카렐 차폐크(Karel Čapek)의 “철학 소설 3부작” 중 그 두 번째인 유성은 큰 틀에서 라쇼몽과의 엇비슷한 구조를 가진다. 라쇼몽의 원작은 1915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라는 작가가 쓴 단편이고 “유성”은 1934년에 출판되었다. 지역과 시기가 다른 두 작품이지만 ‘라쇼몽’이나 ‘유성’ 모두 겉으로 던지는 화두는 언뜻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전체 내용은 ‘무엇’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가 된다. 진실이 “무엇(What)”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이 “어떻게(How)” 이야기되는가가 화두로 떠 오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성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세 가지의 해석을 담은 옴니버스 식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세 개의 이야기는 비슷하면서도 제각기 다르다. 천둥 번개를 동반하며 거대한 빗줄기를 퍼부어대는 폭풍이 몰아치던 어느 밤, 경비행기 한 대가 유성처럼 긴 꼬리를 그리며 추락한다. 조종사는 즉사하고 옆에 타고 있던 승객은 전신 화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후송된다.  번데기처럼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그 소리조차 버거운 숨결을 겨우 뱉어내며 가느다란 생명의 줄을 힘겹게 붙잡고 있는 의식 불명의 이 환자. 그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에 병원 측에서는 그를 “환자 X”라고 차트에 기록한다.  하지만 의문투성이의 이 환자 X가 무슨 연유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이 밤에 죽음을 무릅쓰고 급하게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특별히 부각된다. 그 병원에 있던 수녀와 신경증 환자인 천리안 그리고 시인 세 사람이 각기 나름의 방식을 통해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시도한다. 주어진 단서는 단지 비행기가 날아온 방향, 그의 주머니에서 나온 몇 나라의 동전 몇 개와 몸에 난 상처, 그리고 병원 의사들의 단편적인 견해. 이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세 사람의 이야기는 공통분모를 갖는다. 어머니의 부재, 부유하지만 엄격한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반항, 떠남, 과들루프, 아이니, 트리니드 등등의 이름도 낯선 서인도 제도와 카리브 해 곳곳에 숨겨진 섬들로 이어지는 방황, 열대, 열기, 흥분, 과음, 타락, 혼수상태, 무기력, 열병 그리고 각성과 더불어 이어지는 성마른 귀향… 하지만 떠남과 돌아옴을 결정짓는 계기들은 저마다 다르고 돌아와야만 했던 절박감을 향한 이야기의 전개는 곳곳에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함의를 담고 있다.


   자비와 동정심으로 가득 찬 수녀는 생면부지인 환자 X를 지극정성 간호하며 그를 위해 매일같이 기도한다. 그러다 그를 꿈속에서 만나게 되고 그는 고백하듯 자신의 삶을 그녀에게 들려준다. X는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10대를 보낸 그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를 단지 정복하고자, 사랑의 승리를 맛보고자 그녀와 하룻밤을 같이 보냈고, 돌아 누운 그에게 그녀가 던진 한마디, “저는 이제 당신 거예요!”. 그 한마디에 그때까지의 그의 삶 전체가 흔들려버렸다. 가식 없는 지고한 사랑은 하룻밤의 치기 어린 가벼운 사랑으로, 일시적인 육체적 만족을 목적으로 했던 그를 두려움으로 몰아넣었다. 그가 다시 그녀를 안으려 하자 그녀는 원숙한 여인처럼 “안돼요, 다음에…”라고 말하곤 가벼운 키스만 남긴 채 방을 나섰다. 한량없는 정직함과 완전한 사랑의 인내,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인해 그날 그 역시 소녀를 떠나 버렸다. 그리고 카리브 해의 섬 여기저기를 방황하며 타락, 과음, 무기력으로 20년이라는 세월을 방탕으로 보낸다. 마치 타락한 삶에 대한 징벌처럼 그는 결국 병이 들었고 죽음이 찾아왔음을 알게 된다. 방탕한 삶을 사는 동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는 닥쳐온 죽음 앞에 서게 되자 두려움을 느꼈고 그것에 대하여 자신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쉽게 생각했던 그 죽음은 지속적이며 영속적이란 사실이며 자신은 그런 지속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쉽게 생각했던 소녀의 사랑이 지고지순한, 지속되는 사랑이었다는 걸, 그가 그녀를 떠난 것 역시 지금의 죽음 앞에서의 자신처럼 그런 지속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임을 깨닫게 했고 자신의 미성숙과 용기 없음, 두려움을 그제야 후회하게 된다. 이를 통해 그는 단편적이고 평범한 삶은 죽음에 의해 삼켜지는 반면 완벽하고 실제적인 삶은 죽음에 의해 완성된다는 어떤 진리를 깨우친다. 그것이 바로 영원으로 결속되는 두 개의 절반이자 죽음으로써 이어지는 삶이란 것을, 죽음과 삶이 동시에 자신 앞에 서 있음을… 소녀의 그 사랑 앞에서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도망쳐 버렸지만 그는 죽음 앞에서는 도망칠 수 없었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제 그는 죽음을 완성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서 소녀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안돼요, 다음에…”란 말은 “아니에요. 지금은 아니에요.”를 의미하며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었음을, 따라서 당신은 나의 것이고 당신은 기다릴 거라고, 내 몸에 죽음과 생명을 간직한 채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그는 믿었고 이번에는 반대로 “저는 이제 당신 거예요!”라고 소녀에게 고백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그는 절박하게 느꼈다. 이제 그는 더 늦기 전에 소녀에게로 돌아가야만 했으며 폭풍우 속의 위험천만한 그 비행도 지금의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천리안은 텔레파시를 통해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 매사가 우연은 없고 모든 것이 인과 법칙에 의해 결정된 필연성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천리안은 X에 대한 자신의 진술이 논리적 근거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전에 자신의 추론의 근거를 장황하게 이야기한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사전에 주어진 몇 가지 단서와 의사가 말한, 또는 의사의 생각을 읽어서 알아낸 X의 현재 상태를 토대로 X에 대한 논리적 추론을 시작한다. 물론 사람의 생각을 읽는 그였지만 생각을 할 수 없는, 뇌사 상태에 빠진 X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었기에 그의 심연의 무의식으로부터 자신의 추론의 단서가 될만한,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기질을 건져낸다. 서로 반대되는 두 기질, 고독과 반항. 고독은 그를 침잠으로, 나태로, 수동적으로 만들지만 반항은 그를 진취적으로, 열정적으로, 능동적으로 만든다. 고독의 원천으로 그는 어머니의 부재와 그 부재를 채워주지 못하는, 부유하지만 권위적인 아버지를 끌어냈고 그런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그의 고독에 맞서게 된다. 이런 두 기질의 싸움이 그때그때 서로의 우위를 점하며 그의 삶 전체를 지배했으며 이 투쟁이 낳은 산물은 방황이었다. 유럽의 어느 설탕 공장에서 측량기사 및 화학자로서 일을 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연구를 하는 도중 그는 놀라운 화학식을 하나 발견했다. 공장 실험실에서의 실험에 한계를 느낀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세계적인 화학 선각자를 찾아가서 자신의 위대한 발견을 설명하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실험이 필요함을 열정적으로 설득했다. 하지만 선각자는 이 풋내기 화학자의 놀라운 가정을 단번에 격파해 버렸으며 제대로 된 과학자로서 거쳐야만 할 도제적 과정을 제시한다. 성마르고 참을성이 없는 그는 크게 실망했고 고독이 그의 선택이 되었다. 설탕 공장의 실험실도, 위대한 발견이 될 수도 있을 그 화학식도 버리고 카리브 해의 섬들 속으로 자신을 가둬 버렸고 그 결과는 20년간 이어지는 방황이었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삶을 방탕하게 허비하여 재산과 건강 모두를 날려 버리게 된다. 무기력에 침잠해서 몽롱한 상태로 누워 있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집어 든 잡지에서 육각형 형태의 그림을 보게 되었고 갑자기 벽지의 무늬들은 화학식 도형으로 바뀐다. 그 순간 그는 20년 전에 자신이 발견했던 화학식을 생각해 냈고 그것이 돈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그 공식을 생각해 내려고 했지만 그동안의 과음과 나태, 비행(非行)과 고독으로 이미 균형감각을 상실한 상태였다. 다행히 그것을 기록해 둔 노트를 생각해 냈고 그 노트가 자신의 고향집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렇게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생겼고 실제로 그는 돌아왔지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유성의 불타는 꼬리만 남기게 되었다. 하지만 천리안은 여기서 덧붙인다. 겉으로 드러난 성마른 귀향의 이유는 그 노트였지만 그의 인생 전체를 통찰했을 때 돌아가야만 했던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방탕했던 그 기나긴 젊은 날을 보낸 뒤의 깨달음, 성숙한 인간으로 돌아온 그는 무섭고 냉혹한 인생의 압박감을 깨닫게 되고 죽어야 할 의무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두 기질, 고독과 반항이 결정지은 운명이다. 두 기질의 투쟁은 그를 한 곳에 머물지 못하게 하며 떠나게 만든다. 그 노트를 다시 찾는다고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20년 전 그가 그 선각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도 그는 기질상 참지 못했을 것이고 그 과업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과업은 이미 그를 넘어서는 일이었고 그에게 어울리지 않은 과업이었다. 이제 두 기질의 화해는 죽음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고 그것이 필연이자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는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귀향은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기에 그 무시무시한 폭풍우도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천리안의 논리적이며 필연성에 근거한 추론에 비해 시인의 경우는 필연과 우연이라는 두 축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사건들을 차용하여 환자 X의 과거 자체를 창조해 낸다. 천리안이 환자 X에 대해서 이성적 분석을 가했다면 시인은 예술적 관점에서 환자 X를 주인공으로 하는 하나의 이야기를 창조한다. 그 속에서 시인 자신이 환자 X가 되었다가 관찰자가 되기도 하면서 X를 몽환적으로 구성해 간다.  환자 X는 쿠바의 어느 곳에서 칼을 맞고 쓰러져 기억을 상실하게 된다. 그곳 귀족에게 구출된 그는 잃어버린 기억들의 빈 공간을 채우기라도 하듯 비상한 기억력을 드러냈다. 쿠바 귀족은 이런 그의 능력과 그가 서양인이라는 사실이 그 시대의 자신의 사업에 크게 도움될 것이라 판단하고 그에게 ‘케텔링’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제 그는 귀족이 벌이는 사업의 모든 문서를 타자기로 작성하고 관리하는, 실제적으로 귀족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그에게 신뢰를 받는 새로운 삶을 산다. 하지만 인정받는 만큼 더 커져가는 ‘케텔링’이라는 이름에 대한 낯섦과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의구심. 점차 그는 기계적으로 일하고 순종하는 나날을 보내는 반면에 점점 더 권태와 무기력에 빠졌고 술과 취기, 주사로 이어지는 중독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러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온 귀족의 딸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그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 그의 수족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을 느꼈고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반드시 돌아오겠노라는 약속을 남기고 그녀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사업을 하게 되면서 그는 카리브 해의 지도로부터 숨어 있는 여러 섬들과 오지를 돌아다녔다. 그녀의 아버지는 설탕에 투자했고 그의 밑에서 일하는 동안 자신의 머리에 꼼꼼히 기록했던 귀족의 재무 상태나 사업 수완을 역으로 발휘해서 그의 설탕 사업을 사양화시켜 버렸다. 반면에 그는 아스팔트에 투자했고 아무도 들어가기 싫어하는, 역청 냄새와 악취로 가득한 검은 오지들을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아스팔트 산업 역시 블루오션이 아님이 판명 나면서 심지어 귀족에게 굴욕적으로 도움을 청하게 된다. 그렇게 불굴의 의지로 오랜 시간을 버텼던 그는 결국 파산과 더불어 건강까지 잃어버렸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동시에 무기력으로부터 그를 일으켰던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음을 그녀에게 고백해야 했고 눈물을 흘리며 사랑하는 그녀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물론 그 편지는 타자기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쓰여야 했다. 유리알처럼 어른거리는 글자들을 한 땀 한 땀 이었고, 혼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마무리하기 위해 최후의 서명을 했을 때 그 서명은 케텔링이 아니라 그의 무의식으로부터 온, 잊어버렸던 자신의 본명임을 알게 된다. 그 순간 모든 것이 투명해지며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게 된다. 되찾은 기억 속에서 그는 부유한 아버지를 두었으며 권위적이며 그리 정당한 수단을 거치지 않고 재산을 쌓은 아버지에 반항하여 제멋대로의 삶을 살며 10대를 보냈다. 아버지는 변호사를 통해 그런 탕자의 삶을 청산하고 돌아온다면 거대한 재산을 물려준다고 했지만 그의 자존심은 그 제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고향을 떠났고 서인도 제도의 열대 지방을 방황하며 아버지가 부쳐 주던 자그마한 돈마저 끊기자 자신의 애인을 매춘으로 엮어주는 삐끼짓까지 하며 심지어 스스로 그녀를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밑바닥 인생을 몸소 겪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쿠바에서 우연찮은 사건에 휘말려 과거를 잃게 되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는 흥분했다. 마침내 그는 그녀에게 돌아갈 명분과 수단이 생겼다. 내키진 않았겠지만 탕자의 귀환을 흉내 낸다면 아버지가 약속한 막대한 유산은 자신의 것이 될 것이고 이제는 당당하게 그녀에게로 금의환향할 수 있을 것이다. 환자 X는 그녀에게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기 위해 성마르게 귀향을 서둘러야 했고 몰아치는 폭풍우 따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세 가지의 이야기는 모두 추측이며 상상이며 그냥 이야기다. 또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은 엇비슷하다. 하지만 각 이야기마다 나름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고 화자의 입장에 따른 차이를 고스란히 담은 채 X의 과거가 구성된다. 


   꿈에서의 수녀와의 대화, 그것은 하나의 종부성사(終傅聖事)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고해성사였고 그의 비행은 속죄와 용서를 위한 돌아옴이어야 했다. 소녀는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해 줄 것이며 그는 속죄를 통해 죄사함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비행은 지불하지 못할 파산자의 비행으로 결말을 맺었고 추락은 갚지 못할 부채였음을 증명할 뿐이다. 이런 결말 앞에서 신심이 가득한 수녀는 어떡해서든 X를 위한 종부성사를 열어야 했을 것이고 그 간절함이 꿈의 형태를 빌어 그를 위한 죄사함을, 하나님 앞으로 가기 전 자신의 과거에 대한 고해와 용서, 과거와의 화해의 장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텔레파시를 매개로 하여 합리성과 이성적 논리로 환자 X를 명확히 인식하고자 하는 천리안. 그는 꿈이나 다른 설명할 수 없는 매개물이나 상상 따위를 거치지 않고 현상을 직접 분석하고 그것으로부터 필연성을 연역해야 했으며 그것을 해석하고 설명해야 했다. 노트는 부차적일 뿐, 고독과 반항이라는 두 기질의 화합할 수 없는 투쟁의 변증법은 지양을 필요로 했고 그것은 죽음으로써 그의 삶을 완성해야만 한다는 신경증적 강박이 그를 강제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귀향은 우연이 아니라 그의 운명이 점지해준 필연일 뿐이라고 천리안은 서둘러 결론짓는다. 어찌 보면 그에게는 환자 X를 죽임으로써 필연성의 원을 닫아야 할 선험적 의무가 부여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환자 X의 성마른 귀향은 정해진 결말을 위한 가능한 수단일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그는 돌아온 것으로 충분했어요”.


   처음부터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랐던 시인은 천리안의 그러한 논리성에 반감을 가졌고 은연중에 그런 차이로 인한 긴장감이 드러난다. 시인은 천리안에게 말한다. “당신은 인식을 하지만 저는 창조를 하지요. 시인은 환자 X를 분석하지 않았고 인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천리안의 그런 전제나 논거를 위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전혀 필요 없었고 단지 몇 개의 트리거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작가답게 환자 X의 과거를 철저하게 창조해냈다.  몇 개의 작은 조약돌만으로도 그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 조약돌(petro)은 그에게는 반석(petra)이다. 그 조약돌 위로 거대한 왕국이 일어서고 제국이 무너질 것이며 평범한 어느 남자가 평범한 인생을 살고 호르두발의 심장은 여전히 뛸 것이며 로봇이 투쟁하고 도롱뇽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호주머니에서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생산될 것이다.


   저마다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환자 X의 실제 삶에 대한 가상의 이야기들을 풀어내지만, 이 세 가지의 이야기들 중 어떤 것이 진실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순히 어떤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가 발화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세 이야기 중 어떤 것이 환자 X의 진실과 부합되는가의 문제는 비켜가야 할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것에 대한 질문은 이미 소설 유성과 맞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진실들을 구성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하나의 진실’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개의 진실들’이 문제가 되며 그 진실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미지의 X를 보는 다양한 관점을 통해 서술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만이 있다. 미지의 X, 그것은 하나의 변수다. 변수라는 것은 수학의 관점에서 볼 때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면 그 속에 들어올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기도 하다. 물론, 몇 가지 조건은 유성에서도 이미 주어져 있고 그 조건에 따라서 세 사람의 이야기의 전개 역시 비슷하게 흘러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릇 X는 구성될 수 있는 어떠한 잠재적인 이야기들도 담을 수 있는 하나의 변수다. 그렇기에 그것은 X = 무엇이라는 정답, 즉 하나의 확정적 내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X ≒ 무엇들이라는, 다양한 내용들을 담을 수 있는 형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유성에서 제기한 미지의 그 무엇 - 환자 X에 대해서, 몇 가지 주어진 희미한 조건을 시작으로 이제 겨우 세 가지의 이야기가 구성되었을 뿐이다. 그럼, 여러분들도 여러분 나름의 구성을 통해 X에 대한 차이를 간직한 내용들을 그 형식에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마다 구성 가능한 환자 X의 과거들, 이야기들,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거대한 폭풍우를 뚫고 비행기에 몸을 싣게 만든 수많은 우연과 필연들 환자 X는 이제 수많은 자신의 과거를 지니게 된다. 그럴수록 그의 신비는 더 증폭될 것이다.


   이제, 유성을 읽고 난 뒤 여러분도 환자 X의 과거를 나름대로 구성해 본다면 어떨까???



2008년 5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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