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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May 25. 2023

나룻배


한 때는 나룻배였다

밧줄에 매여

물가 언덕을 떠나지 못하는

작은 배였다


한양 도성을 벗어나

한참을 걸어온 이들이

공양물을 품에 안고

푸른 강을 건너는 나무틀


초승달처럼 물 위에 떠서

흔들리는 쪽배였다


사월초파일이면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줄처럼

강 이편과 저편으로 쉼 없이 들락거렸다


흰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은

곡식 자루를 머리에 이고

어린아이를 한 손에 걸쳤다


모가 병들었을까

지아비가 출타하여 돌아오지 않은


수도산 산길 너머 작은 법당에

말없이 앉아있는 부처님만이 아실 터였


늦은 오후 햇살 반짝이는 강 한복판

삐걱대는 판자 사이로 물이 스며들었다


설마 깊은 물길을 다 못 건너갈까나

그래도 정성을 들였으니

아범은 무사히 돌아오겠지


삿갓 쓴 사공은 의연히

강거죽을 노로 젓고

난간을 부여잡은 여인의 시선은

물결 따라 흔들렸다


한때 나룻배는 한밤중에도 

그렇게 떠난 이들의

발길을 놓아보내지 못했다






* 강남 삼성동의 봉은사는 옛 광주 땅에 세워진 인근 선정릉의 수호 사찰이었다.

(최초의 모습은 신라시대 연회국사가 창건하여 견성사라 이름하였는데 조선조 연산군 시절 정현왕후가 성종의 능인 선릉을 위해 중창하고 봉은사로 개칭하였다)

이후 교세가 확장되며 선종대본찰이 되었고 보우대사가 기거하며 선풍을 진작했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속에서도 불맥을 이어와 오늘날 천년이 넘는 수도권의 대표적인 고찰이 되었다.


첫 방문자들은 대부분 의아해한다.

어떻게 강남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이렇게 큰 절이 있을까...


사실 봉은사 정문 길 너 코엑스 대형 전시관과 무역센터 부지 등은 옛 봉은사에서 승과평이 열리던 장소이다. 이런저런 역사적 변곡을 겪으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크게 축소된 형국이다.

더구나 봉은사가 자리한 수도산 꼭대기에 군사정권  시절의 실세들이 완력으로 경기고등학교를 이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 모습과 자취가 많이 훼손되었지만 이곳은  오늘날 코엑스 국제회의에 참가한 외국인들의 단골 방문 장소가 되었다.

요즘은 근처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삼삼오오 사찰 내 산책로를 거닐기도 한다.


이곳 봉은사는 옛 한양 사람들이 걷거나 소달구지를 타고 강변에 이르러 다시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이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생업에 매인 이들이 일생에 몇 번이나 참배할 수 있었겠는가?


봉은사 영각에는 지장보살 좌우로 봉은사에 주석했던 옛 선현들 일곱 분의 초상이 걸려 있다.

그중에는 당 유생들하대와 멸시 속에서도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국난을 극복했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영정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하심은..자신을 바로보라는 뜻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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